오광록은 여백이다. 조연배우가 여백을 채우는 사람이라 믿는 사람들에게는 낯설 테지만, 오광록은 터질 듯한 긴장 속에 거꾸로 여백을 만들어 넣는다. 송강호의 가슴에 무심하게 칼을 쑤셔넣는 무정부주의자(<복수는 나의 것>)와 개를 안고 자살하는 남자(<올드보이>), 허허실실한 문화재 도굴꾼(<마지막 늑대>). 쉬이 손에 잡히지 않는 캐릭터와 골도에서 공명해 나오는 듯 독특한 음색은 뇌리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오랜 연극무대의 삶을 즐기면서도 상업영화와 작가영화의 경계에서 작업해온 오광록은 <잠복근무>에서 어딜 봐도 정상이 아닌 조폭 두목을 연기했다. 친구들을 ‘동지’라 부를 만큼 투철한 철학을 지닌 그에게 상업영화의 희화화된 캐릭터는 조금 이질적이기도 하다. “고민이 꽤 많았다. 하지만 <잠복근무>는 리얼리즘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나는 일루전(Illusion: 환상)을 관객에게 심고 싶었다.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영화를 보는 즐거움 말이다.” 일루전이라는 단어를 재차 강조하듯, 오광록이라는 배우는 잔혹한 현실을 휘휘 둘러서 비현실적인 상황으로 치환해낸다. 박찬욱이라는 든든한 동지가 애초부터 오광록을 염두에 둔 캐릭터를 시나리오에 만들어 넣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일루전과 여백. 좋은 산수화를 그릴 줄 아는 사람에게 여백은 필요한 법이고, 잔혹한 순간을 신기루처럼 만들어줄 수 있는 배우도 귀한 법이다.
오광록은 무게로 30kg가 넘는 시를 써온 시인, 연극계의 오랜 지기, 텃밭을 가꾸는 촌부, 떠도는 여행객이자 사회와 대화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배우는 특히 사회를 바라보는 눈들을 잃지 말아야지. 사회에 대해서 더욱 푸른 눈을 지녀야 해. 아니면 타들어간다.” 영화 속의 그는 자주 타들어갔다. 하지만 이 남자의 영혼은 스스로 연기한 악인들을 함부로 내치지는 않았다. “이 땅의 악역들은 처형지에서 사는 거다. 무고함으로 돌아올 수 있는 제도의 장치도 없으니까 사회에 대한 저항이 반감으로 변해버린 거다.” 오광록의 악인이 순수악의 언저리에도 다가갈 수 없어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일까.
그는 산문처럼 명료한 질문에 운문으로 답을 하면서도 자꾸 말이 다른 데로 샌다며 출발점을 되짚곤 했다. 그냥 오늘 인터뷰는 흐르는 대로 가는 게 좋겠다고 말하자 찬찬히 한강을 바라보며 말한다. “앞으로는 무구한 역할들을 하면 좋겠지. 무구함은 고독이 오고 절망이 와도 좋다. 고독은 인간이 받은 최선의 선물이고, 고독한 순간에 가장 말간 마음으로 도착하는 것들을 보게 되니까. 그렇게 연기하는 거지.” 그에게는 거추장스런 반사판을 앞에 둔 영화현장의 고독, 청중을 앞에 둔 연극무대의 고독, 눈쌓인 산에서의 고독이 다 마찬가지다. 비어 있는 순간에 모든 것은 차오른다. 오광록은 배우라기엔 시인 같고, 시인이라기엔 배우 같다.
나, 이래서 알려졌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조감독이 나를 찾아냈다. 연극배우협회에서 박웅 선생이 찍어놓은 사진을 보고 연락을 했더라고. 명필름에서는 시나리오에서 걸어나온 것 같다고도 했고. 하여튼 독립영화 <눈감으면 보이는 세상>을 제외하면 개봉이 된 첫 영화였다. 박찬욱도 그렇게 알게 됐지. 송강호가 박찬욱이랑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다가 그랬다더라고. “저 선배가, 대학로에서는 무대 위에서 고개만 옆으로 돌려도 의미가 있는 배우야”라고. 그래서 박찬욱 감독을 만났고 머나먼 길을 함께할 동지라는 느낌을 받았어. <복수는 나의 것>의 무정부주의자 킬러는 그렇게 나왔지. 합도 맞추지 않았고 프레임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나눴어. 전문적인 킬러가 아니라 겁도 많고 사회에 대해 서투른 놈이니까. 그러고 촬영 때 송강호 가슴팍에 칼을 꽂는데. 놀랐다. 찔리는 순간 나도 찔려버린 거다. 살해하는 순간 나도 살해된 거더라고. 그래도 <올드보이>에서의 자살하는 남자 역은 박찬욱 아니었으면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 불쌍한 역할은 난생처음이었으니까. 왜 하필 나냐고 물어봤더니 내가 연기하면 그 인물의 진심이 전해지지 않겠냐는 대답이 돌아오더라고.
나, 이렇게 살아왔다.
재수하다가 연극을 만났다. 연극한다는 아들놈 반대하는 아버지에 대한 마음의 저항과 반항 같은 게 많았지. 그래서 대학 수험표 받아놓고서 시험도 안 보러갔어. 대신에 배우예술원에서 공부하고 81년에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좋은 스승들을 만났다. 뭐 그렇게 흘러버리게 된 거지. 원래는 시인이나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는데 말이야. 자취생활은 83년에 스물두살 나이로 시작했어. 가난했지만 탓하진 않았지. 스스로 독립군이라고 생각했었거든. 자유라는 것을 누리려면 경제적으로도 독립해야 하니까 말이야. 그렇게 무대에 오르다가 86년에 했던 <앵무새 리코와 알파>에서 비로소 나만의 목소리를 찾았던 것 같아. 내 말투도 그때부터 나오더라고. 89년에 서커스 단장 역을 했던 <습관의 힘>도 잊을 수 없고, 94년에 했던 <허제비 놀이>에서는 시적투가 많아 맘놓고 느리게 했지.
나, 이렇게 울고 웃었다.
연극판의 어떤 잘 나가는 연출자든 독단적인 모습을 보일 때 난 단호하게 거부하고 나와버렸다. 할 수 없었다. 물론 내 속에 어떤 저항의 정신이 있더라도 당시에는 ‘인생이 어쩜 이리 파자마 같으냐’ 싶더라. 그런 시간이 꽤 오래갔었다. 영화가 준 괴리감은 그것과 조금 다르다. 매체의 불편함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지금은 슛! 액션! 하는 순간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내게 묻어나는 삶처럼 호흡에 맡겨놓고 들어서게 된다. 매체에 대한 괴리감이 없어지면서 동지가 더 많아진 거지. 좋은 거야. 사람들에게 서글해지고, 보이지 않는 스탭한테도 눈이 깊어지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배우를 하고, 시를 쓰고, 연극을 하고. 이게 다 사람에게 잘하고 싶어서지. 더 깊어지고 싶어서지.
나, 이런 모습도 있다.
텃밭을 하나 일구고 있어. 뭐 별건 아니고. 쌈으로 먹을 수 있는 거 여러 가지. 올해는 오이농사를 잘해보려고 해. 2년 전에 오이를 백 몇십개 따서 오이지를 만들었어. 간단해. 찬물에 굵은 소금 뿌리고 거기다 담가서 돌을 눌러놓으면 오이지가 되는 거지. 꼭 한번 놀러와. 동지들하고 아침에 모여서 오이지 같이 먹으면 참 좋지. 하얀 눈이 덮인 산에서 나를 다시 한번 씻어내고, 전에 쓴 시들을 뒤져서 책을 묶는 게 해마다의 작은 소원이었어. 하지만 올해는 내년 가을 즈음에나 그래볼까 해. 이렇게 호흡을 길게 놓으니까 마음이 더 편해지고 산보의 마음도 더 생기고 시도 더 쓰게 될 것 같아. 나는 게으르니까. 물론 신비한 게으름에 빠져서 살지만.
Filmography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복수는 나의 것>(2002)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2003)
<올드보이>(2003)
<마지막 늑대>(2004)
<우리형>(2004)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잠복근무>(2005)
<친절한 금자씨>(2005)
<소년, 천국에 가다>(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