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아톤>은 초원(조승우)의 이야기를 남김없이 풀어냈지만 코치 정욱에 대해선 많은 호기심을 남겨두었다. 창창했던 마라토너의 미래가 꺾인 뒤 술과 담배로 무기력한 시간을 위안하며 살아온 정욱은 초원과의 만남에서 어떤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을까. 초원을 만나기 전에 어떤 과거를 가졌던 사람일까. 정욱을 연기한 이기영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궁금증은 갈수록 더해간다. 알 수 없는 배타심으로 초원과 초원의 엄마를 냉대할 때 정욱의 눈빛에서는 사연이 읽힌다. 개봉을 앞둔 <달콤한 인생>의 백상파 킬러 오무성도 그렇다.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뿔테 안경을 써 눈동자를 감춘 오무성은 평소엔 그저 시장바닥의 장사치다. 그러나 주차장에서 선우(이병헌)에게 경고를 날릴 때, 사람을 천장에 매달아두고 곁에서 커다란 칼을 갈고 있을 때, 무성의 그늘진 얼굴과 뒷모습은 전말이 궁금한 사연을 담고 있다. 이기영은, 영화가 설명하지 않은 부분에도 호기심이 일어나게끔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다.
한때 이기영은 화면 안에서 언제나 강했다. TV드라마 <머나먼 쏭바강>(1993)에서 “전쟁의 화신”이라는, “굉장히 멋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다 현장에서 유탄을 맞고 얼굴에 긴 흉터가 남은 뒤부터 그랬다. 남은 2개월 촬영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수술해논 상처는 갈수록 깊이 패였고, 베트남에서 8개월 지내고 와 어둡게 탄 얼굴에 짧은 까까머리로 길을 나가면 경찰차도 피해갈 만큼 그 인상이 삭막했더랬다. 배우로서의 삶은 끝. <말아톤>의 정욱처럼 술로 그해 가을과 겨울을 보낸 이기영은 “왼쪽 뺨에 칼자국이 있는 춘우”라고 시나리오까지 수정해가며 출연 제의를 해온 영화 <테러리스트>에 출연하면서 강하고 거친 남자의 전형을 보여줬다. “그 다음부터 우리나라의 모든 조직두목, 킬러 역할은 99.9%가 다 왔다갔”고, 멜로드라마를 해도 고뇌에 찬 예술가가 되어 아픈 사랑, 다치는 사랑을 했다. 정욱의 눈빛이, 무성의 뒷모습이 달리 사연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기영은 자신이 맡은 캐릭터들을 통해 배우로서 일관된 색채의 이야기를 쌓아온 셈이다.
실제 성격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기영은 “나는 남자다”라는 생각을 한결같이 품어온 사람이다. “남자는 절대 시선을 떨어뜨려서도 안 되고, 상대와 이야기를 할 때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서도 안 된다”고 가르쳐온 아버지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는 스스로 강한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아파도 신음소리를 내지 않고, 추워도 옷을 벗어던질 줄 아는 모습은 매우 고전적인 남성상이지만 그것없이 ‘남자’를 말하기도 쉽지는 않다. 그와 작업한 감독들은 바로 그 점을 필요로 해서 이기영과 작업했던 것이고, 천생 그의 눈빛과 야문 입매는, 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남자의 그것이다.
나, 이렇게 알려졌다.
당연히 <테러리스트>지. 특별히 맘에 드는 장면 없이 다 좋지 뭐. 그 작품은 내가 얼굴에 흉터를 가진 채로 출연하는 대신 감독에게 내 요구를 많이 했었거든. 내 오토바이 끌고 출연하고, 단발머리도 안 자르겠다고 했고. 몇신 안 되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것도 그 때문인 거 같아. 그리고 <말아톤>도 당연히 기억에 남을 영화고. 내가 멋있게 나와서 명장면이라기보다 찍으면서 정말 가슴에 와닿았던 건, 승우가 운동장 100바퀴 돌고 내 손을 자기 가슴에 갖다대잖아. 그 장면은 500% 이해하고 찍었어. 내 조카가 비슷한 장애를 가졌다는 얘기도 다른 인터뷰에서 하긴 했지만, 사실 어떤 장면에서도 배우가 100% 몰입한다는 건 쉽지 않거든. 다음 대사 생각해야 하고, 상대방 반응 살펴야 하니까. 근데 무아지경이라고 하는 걸 그 장면 찍으면서 경험했던 거 같아.
나, 이렇게 살아왔다.
세상에 왜 이렇게 관심가는 게 많은지.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어렸을 때 형한테 기타 배우고 아버지한테 하모니카 배우다가, 중학교 가서 피아노가 배우고 싶은 거야. 집에 돈은 없고. 친척집 순례하면서 용돈 받아서 두달 동안 오버타임해가면서 열심히 배웠지. 고등학교 때는 쌍화차니 뭐니 해서 차 세트랑 책 팔아서 드럼 배우고. 한번은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내가 학교에서 이문 남는 장사하니까 상담하자고 자기 집에 오래. 그래서 갔는데 선생님이 아직 집에 안 오신 거야. 근데 그 집에 유치원 다닐 또래의 딸이 있더라고. 그래서 사모님한테, 아이 유치원 보내세요? 하고 물어봤지. 안 보낸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바로, 사모님, 애들은 지금부터 교육을 시키셔야 해요, 그러면서 그 당시에 3만8천원짜리 교재 팔았잖아. 할부로. 선생님이 나중에 집에 와서는 “넌 알래스카 데려다놔도 냉장고 팔 놈이다” 그러시더라고.
형 추천으로 서울예대 간 다음부터가 완전히 내 세상이었지, 뭐. 선생님들 다 예뻐해주시고, 친구들도 좋아해주고. 교수님이 추천해주셔서 학생 신분으로 기성무대에 데뷔했잖아. 안민수 선생님이 연출하신 <리어왕>(1983). 군대 다녀왔을 때가 스물서넛이었는데 대극장 주연도 하고. <피핀>이라고 당시 제작비가 4억원짜리였는데, 그거 끝내고 호주로 유학을 갔다왔지. 장학금도 받고, 현지에서 광고니 단역이니 하면서 학비 벌었어. 학교 청소, 배달, 생선 공장에서 생선 골라내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지금도 나는 세상에서 겁나는 게 하나도 없어.
나, 이렇게 울고 웃었다.
살면서 특별히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적은 많았어도, 그게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거든. 작업을 하면서도 매번 즐거워. 그럴 때는 늘 힘들지. 연극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연출자와 의견이 불일치할 때. 앞뒤 맥락을 봐선 분명히 이게 맞는데, 우리 배우도 고객이 OK할 때까지 거기 맞춰줘야 하는 직업이잖아. (웃음) 근데 인간인지라 그렇게 수긍이 잘 안 되는 거야. 그럼 연기를 해도 집중이 안 되지. 사전에 미리 연출자와 대화를 많이 했으면 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나, 이런 모습도 있다.
사실은 되게 여리고, 되게 감정적이야. 가오 때문에 참는데, 눈물도 많아. 그래서 속상하면 빨리 어디로 튀어. (웃음) 바보같이 정도 많아서 있는 대로 다 퍼주는 편이고, 야멸차게 굴지도 못하고. 내가 비즈니스를 하면 6개월 안에 분명히 망할걸.
Filmography
<테러리스트>(1995)
<퇴마록>(1998)
<조용한 가족>(1998)
<반칙왕>(2000)
<흑수선>(2001)
<몽중인>(2001)
<가문의 영광>(2002)
<말아톤>(2005)
<달콤한 인생>(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