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바흐만 고바디 [2] - 인터뷰
2005-04-19
정리 : 김현정 (객원기자)

“내 영화는 총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감독 바흐만 고바디가 말하는 나의 영화, 나의 민족

-당신이 태어난 쿠르드 거주지역에는 영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당신은 어떻게 영화감독이 되었는가.

=나는 영화와 관련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다만 8mm 카메라로 30편 넘는 단편영화를 찍었을 뿐이다. 테헤란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배운 건 거의 없지만 단편을 만들면서 조금씩 영화 만드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돈이 많지 않았다. 내가 살던 집의 주인들은 언제나 집세를 내라고 독촉하곤 했는데, 그들을 막기 위해서, 내 영화에 캐스팅하곤 했다. 내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도 내 영화에 조수로 참여해왔다. 쿠르드족 거주지역은 전쟁과 쓰디쓴 생존이 만연한 곳이다. 그곳에서 목격한 모든 일들이 나를 감독으로 만들었다.

-당신은 언제나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해왔다. 그들로부터 극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을 텐데.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을 나는 시나리오 대신 종이 몇장만을 들고 시작했다. 내가 찾아낸 비전문 배우들은 처음엔 카메라를 두려워했지만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담고자 했기 때문에 차츰 카메라를 편안하게 느끼게 됐다. 그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신의 삶을 연기했다. 나 또한 쿠르드족이다. 나는 내가 찍는 이야기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거북이도 난다>의 위성은 어린 시절 내 자신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나도 위성처럼 아이들의 리더였고 영리했고 살아남고자 싸웠다.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다. 내 영화들은 내 과거의 일부를 반영하고 있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의 국경을 넘는 노새나 <고향의 노래>의 변방지역 도적은 내 부모와 내가 어린 시절 고향 베인을 떠나면서 겪었던 일들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당신의 두 번째 영화 <고향의 노래>는 어른들의 이야기지만, <거북이도 난다>는 첫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처럼 아이들이 중심이다. 왜 당신은 아이들의 이야기로 돌아갔는가.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먹지는 않았다. 나는 내 과거를 돌아보는 도시의 영화를 만들고자 했지만, 미군의 이라크 침공 2주 뒤에 찾아갔던 바그다드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전쟁은 유독 아이들에게 가혹하다. 불구가 된 아이들을 보고 전쟁에 반대하는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고향의 노래> <거북이도 난다>는 참혹한 현실을 담고 있지만 때로는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유머를 발견할 수 있는가.

=이란 속담에 “솜털로도 목을 벨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내 영화에서 유머는 바로 그 솜털이다. 나는 슬픔을 좀더 부드럽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 영화들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유머는 또한 쿠르드족이 매일매일 버틸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가족이나 친구를 잃어본 적이 없는 쿠르드족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웃고 노래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는가. 그들은 더이상 흘릴 눈물조차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살아남아야만 하므로, 닥치는 순간들을 즐기고자 애쓴다.

-쿠르드 출신 감독으로서, 당신은 쿠르드족의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2천만명이 넘는 쿠르드족은 이란과 이라크, 시리아, 터키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독립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는 독립적인 쿠르드 국가가 태어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쿠르드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자신들끼리 싸워왔고 총과 탄약만으로 서로를 대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선 보통 사람들, 내가 보기에는 가장 선한 사람들이,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폭력에 다치고 희생될 수밖에 없다. 나는 총을 가진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침묵하는 이들, 그저 보통 사람들이다. 나는 내 영화로 무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내 영화들은 쿠르드족의 현실을 대중에게 일깨웠고, 사람들은 쿠르드족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당신이 만든 세편의 장편영화는 대단히 정치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이 애초에 의도했던 것인가.

=나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바흐만, 너는 무기 대신 카메라를 들고 있어”라고 말해왔다. 나는 쿠르드족의 문화가 배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정치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쿠르드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담 후세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곤 했다. 나는 그냥 쿠르드족이 아니라 정치적인 쿠르드족이 되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영화들은 정치적이다. 내가 정치적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이 쿠르드족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 인터뷰는 토론토와 런던국제영화제, <인디와이어> 등이 진행한 인터뷰를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아이들의 고난, 그 자체가 시나리오

<거북이도 난다> 제작기

바흐만 고바디는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하고 2주일 뒤에 그곳에 갔다. 그는 이미 사담 후세인을 영화에 인용한 적이 있었지만(<고향의 노래>에서 쿠르드족 노파는 “사담이 우리에게 한 일에 대가를 치렀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이번엔 주연이 한명 더 있었다. 미국 대통령 부시였다. <고향의 노래>의 상영관으로 향하면서, 두 군데 권좌로부터 쏟아진 파워에 너덜너덜해진 쿠르드 땅을 목격한 바흐만 고바디는,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아이들을 위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재앙이었고 악몽이었다. 나는 탱크와 지뢰, 부상당한 아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써야겠다고 결정했다.” 그것이 영원히 날개를 가질 수 없는 아이들의 영화 <거북이도 난다>이다.

30여명의 보디가드에게 둘러싸여 불안한 전후 국경지역에 도착한 바흐만 고바디는 그를 돕겠다고 나선 300여명의 ‘프리프로덕션 군단’을 동원해 쿠르드족이 살고 있는 모든 마을을 촘촘하게 훑어내렸다. 연기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폭로할 수 있는 아이를 원했고, 그렇게 들어온 아이가 히레쉬 페이살 라흐만(헹고)이었다. 두팔이 없는 그 소년은 일곱살 때 불발탄과 오래된 유탄이 흩어져 있는 옛 전쟁터에서 놀다가 고압선에 걸린 새를 구해주려고 했다. 폭발지역 부근에 늘어져 있던 고압선은 피복이 벗겨져 있었고, 아이의 두팔은 불타버렸다. “팔이나 다리를 잃은 아이들은 정신적으로도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카메라 앞에서 그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아이는 카메라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영화에 출연하기로 동의했다.”

그처럼 처참하지는 않아도 <거북이도 난다>의 아이들은 쿠르드족이라면 누구나 감내해야 하는 고난에 익숙했다. 아브돌 라흐만 카림(아그린의 아기 리가)은 실제로도 앞을 거의 보지 못했고, 아바즈 라티프(아그린)는 태어나서 한번도 전기를 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영화 그 자체가 그들의 현실이었다. 영화 속에서 아이들은 지뢰를 파내 내다판다. 누가 그 지뢰를 사는 건가. 바흐만 고바디는 “정부가 지뢰를 사들인다. 그들은 미래의 분쟁지역을 예상해서 그곳에 미리 지뢰를 묻어두기 때문이다. 이것은 끝이 없는 이야기다. 아이들은 지뢰를 파고, 정부는 지뢰를 묻고. 헹고는 예지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특별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20, 30년 뒤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리라고 예언할 수 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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