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쾌락의 끝은 어디인가, <권태>
2005-04-20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권태>는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세드릭 칸의 1998년 영화다. 40대를 넘어선 중년의 철학교수 마르탱(샤를르 베르링)은 자신을 둘러싼 삶이 지루하기만 하다.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으며, 구상 중인 소설도 진척없이 지지부진하다. 그러던 어느 새벽, 클럽에서 술값을 내지 못해 궁지에 몰린 화가 메이어(로베르 크라메르)의 술값을 대신 내주고는 그에게서 그림 한점을 선물로 받는다. 마르탱은 그가 궁금해지고, 며칠 뒤 그의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거기서 듣게 되는 소식은 그가 자신의 모델과 정사 도중 급사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17살 소녀 세실리아(소피 길멩)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죽음의 순간을 함께한 세실리아의 태도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태연하다. 마르탱은 이제 메이어의 뒤를 이어 세실리아의 매력에 빠져들어 섹스를 하게 되고, 점점 더 그녀와의 육체적 관계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그들은 장소와 시기를 가리지 않고 섹스를 나눈다. 더불어 마르탱은 점점 더 세실리아를 소유하려 들고,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촉각을 세우는 질투의 화신이 되어간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그 관계에 단 한번도 얽매이지 않을뿐더러, 마르탱을 만나는 것과 상관없이 다른 남자도 함께 사귄다. 그러면서 화내는 마르탱에게 왜 다른 남자를 동시에 만나면 안 되냐고 궁금한 눈빛으로 되묻는다.

세드릭 칸은 영화를 끝간 데 없이 몰아간다. 마르탱 역의 샤를르 베르링은 무력한 중년 지식인에서 섹스의 마력에 빠져든 허약한 섹스 중독자까지 표현해내고, 세실리아 역의 소피 길멩은 17세기 회화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풍만한 육체와 야릇한 분위기를 풍긴다. <팻 걸> 등으로 유명한 카트린 브레이야의 <36 fillette>에서 조감독으로 일하기도 했던 세드릭 칸은 브레이야의 조작적인 섹슈얼리즘을 넘어서는 진짜 쾌락의 허와 실을 <권태>에서 보여준다. 장기간 수입추천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다가, 지난 3월 18세 이상 관람가를 받아 무삭제 국내 개봉하게 됐다.

<권태> 예고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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