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루크레시아 마르텔 [1]
2005-04-26
글 : 심영섭 (평론가)
글 : 박은영
사진 : 이혜정
여성영화제 개막작 <홀리 걸> 연출한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론

들리나요? 당신의 삶이 부식되는 소리가

루크레시아 마르텔이라는 이름은 아직 생소하다. 지구 정반대편 아르헨티나에서 이제 두편의 영화를 만들어내놓았을 뿐인 이 여성감독은 그러나, 칸영화제를 비롯한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앞다퉈 초청장을 보내는 유력한 감독이 되었다. 데뷔작 <늪>에 이어, 고향인 아르헨티나 북부에서 촬영한 두 번째 영화 <홀리 걸>은 사회와 가정, 소통과 욕망의 문제를 차갑고 건조한 영상에 담아낸 수작이다. 서울여성영화제에서 <홀리 걸>을 개막작으로 선보이며 방한한 루크레시아 마르텔을 영화평론가 심영섭씨가 만났다. 남아메리카영화와 여성영화에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둬왔던 심영섭씨는 이 둘의 교집합격인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영화세계를 주목했고, 지난해 가을 <씨네21>의 특집 기사 ‘거장 예감, 세계의 신성 감독’ 편에 마르텔을 추천하며 열렬한 지지의 변을 전한 바 있다. 1966년 말띠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이들은 ‘여성’과 ‘영화’에 대해 많은 교감을 나누었고, 심영섭씨는 이 만남을 통해 업그레이드된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감독론을 보내왔다


화장을 짙게 한 어린 꼬마 소녀가 선풍기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닥터 존은 오늘 수술이 있네. 응급실에서. 환자는 스물한살이라네. 그녀는 너보다 한살 어려….”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늪>에 나오는 이 노래의 다음 구절은 다음 영화 <홀리 걸>에서 어쩌면 이렇게 바뀔지도 모른다. “닥터 하노는 이비인후과 의사라네. 길거리에서. 그는 어린 소녀의 엉덩이를 더듬었지. 그녀는 그 순간 어깨죽지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걸 느꼈어….”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세계는 그런 식이다. 늪과 호텔과 집이 중첩되어지고, 성(性)과 성(聖)이 겹쳐지며,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감독에 의하면 <늪>에서 나온 노랫속의 의사가 어쩌면 <홀리 걸>의 의사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니까 <홀리 걸>의 소녀, 아멜리아는 지금 길거리에서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는 의사의 영혼을 느끼고 있다. 그를 구원해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호텔과 집, 이비인후과 학회와 신비스런 종교적 놀이에 낀 그들. 과학과 종교에 끼어, 17세기라면 자신의 경험을 충분히 기적이라 믿고 어쩌면 수녀가 어쩌면 성녀가 되었을지 모르는 한 소녀의 경험은 20세기의 윤리적 시선에 의해 심각한 성 희롱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루크레시아 마르텔 본인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영화는 살아 있는 인간의 몸과 윤리적 보철물 사이에 낀 외과 수술 같은 것. 그렇다면 <홀리 걸>은 한 소녀에게 가해진 성적 억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선과 악에 직면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야기, 심지어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내용을 담은 이야기는 아닐까? 그것은 성스러운 무지를 담은 동시에 미묘하게 웃기고 심지어 풍자적인 어조로 연주되는, 경계가, 삶이, 부식해가는 영화이기도 하다.

권태라는 이름의 유령

<홀리 걸>

아직까지는 늘 북부 아르헨티나의 지형 안에서 움직이는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늪>과 <홀리 걸> 모두에서 축축하고 후덥지근하고 겉으로는 번듯하지만 안으로는 곪아가는 경제적 위기를 지닌 백인 부르주아 가정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어머니는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고, 딸은 가정부와 한 침대에서 몸을 부비는 이들 가정에서는 길게 늘어져버린 오후의 그물 밑으로 잠자리 날개 같은 비밀과 욕망이 진동한다. 그때 마르텔의 소녀들은 침대가나 수영장에서 엎드린 자세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을 잡는 카메라는 무감각하고 나른하고 질식할 듯한 권태의 공기로 흘러넘친다(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집 내부에서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인 공간은 바로 둘 다 반라의 상태로 엎드려 있을 수 있는 사적인 공간, 수영장과 침대이다). 자신들만의 비밀스런 세상으로 둘러처진 사춘기 아이들은 다음번엔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고 마르텔의 영화 역시 다음 컷이 무엇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대개의 경우 카메라는 그저 주인공들의 등 뒤에서 어슬렁거릴 뿐. 한 가득 화면 안에 담긴 얼굴들은 구원은커녕 자폐적인 인장으로 봉인된 자신들만의 세계에 대해 관객에게 비밀스런 귓속말을 속삭인다(그리고 그녀는 이러한 자폐성을 아르헨티나 사회에 대한 은유처럼 사용한다). 그 근시안적인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렌즈 앞에서 욕망이란 책상 머리맡에서 삼각자로 빛을 굴절시켜 만든 한순간의 무지개처럼, 선풍기 앞에서 휘어져 다시 돌아오는 노랫소리처럼, 한순간 반짝 발아하다 다시 지리멸렬한 공기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일회성의 떨림으로 기화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바로 이러한 세계, 기회가 운명과 알 수 없는 내기를 거는 모호함으로 가득 찬 세계에 대해 말하려든다. 인물들의 실낱 같은 내면의 결을 무표정한 표면과 은밀하게 엮어 짠다.

<홀리 걸>

지난해 칸 경쟁부문에서 처음 <홀리 걸>을 보았을 때, 동료 평론가들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아르헨티나 여성감독에게 ‘무엇’이 있다는 예감을 떨치기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바로 ‘소리’ 혹은 화면 ‘밖’을 꾸려나가는 그녀의 솜씨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경쟁작에 함께 올라온 타이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소리가 열대의 풍광에 드리워진 서정적인 영혼의 소리, 바람의 소리였다면, 그녀는 화면 밖에서 흘러넘치는 자연스런 음향과 일상적인 대사들 혹은 프레임에 의해 잘려나간 외화면의 이미지로 화면 안을 보기 좋게 꾸려가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늪>에서 탁한 열대의 물속에서 고기를 잡던 소년들은 갑자기 둑이 터지는 엄청난 소리를 듣는다. 거센 물살이 화면을 덮는 스펙터클, 고인 늪에서 터진 물로 전환되는 의미심장한 주제가 노출되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마침내 모든 걸 휩쓸어버릴 것 같은 물줄기 소리로 먼저 관객의 귀를 덮쳤다. 마찬가지로 <홀리 걸>에도 주인공인 닥터 하노는 귀에 대한 검사를 하는 이비인후과 의사지만, 그는 소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연주하는 엇갈리는 욕망의 이중주를 듣지 못한다. 고치지 못한다(그는 의사들로 이루어진 극단에서 연극을 했는데, 그때도 의사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의사는 소녀의 엄마이자 호텔 주인인 헬레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속에서 나오는 뭔가를 듣는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반은 사적이고 반은 공적인 장소인 호텔에서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일상을 파고드는 소음을 뚫고 주인공들의 시선을 차분하게 잡아낸다. 오히려 <홀리 걸>에서 자노에 대해 성적 욕망을 느끼는 소녀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다. 항상 의사의 뒤에서 그것도 목 부분에 똑같은 렌즈를 써서 잡는 소녀의 시선은 일정하다. 혹은 세상의 모든 것을 더듬듯이 클로즈업으로 촬영된 소녀의 손은 아름답지만 역시 반복되고 고정된 육체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반대로 소녀 주변의 외화면의 소리는 흘러넘친다. <홀리 걸>의 첫 장면에서 소녀들은 길거리에서 연주되는 신비스런 테레민(전자악기)의 소리를 듣고, 카메라는 다시 그 소리를 듣는 소녀들을 본다. 이 장면에서 즉 소리는 보여지는 셈이고, 할리우드식의 액션장면 대신 리액션 장면으로 불쑥 영화는 시작한다. 이렇게 다층적인 연출 장치와 소리들로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에서, 자신은 듣지만 남들은 듣지 못하는 안의 소리에 대해 그녀 역시 아마도 무언가를 들었고 그 들었던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데뷔작 <늪>이 늪에 빠진 죽은 들소의 이미지나 목욕탕을 타고 흐르는 시꺼먼 진흙의 이미지로 아르헨티나 중산층 밑바닥에 켜켜이 침전된 영화라면, (그리하여 훨씬 계급적이고 사회적인 비평의 모양새를 띠었다면) <홀리 걸>은 훨씬 더 가볍고 나른하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사람들 사이의 불협화음을 나직하게 들려준다. 마르텔은 그 욕망들에 대해 재판하거나 조화롭고 통합적인 무엇으로 사용하기보다 주변을 흘러가는 소음들과 슬쩍 섞어둔다. 그것은 어쩌면 저 두껍고 깊은 콘크리트 벽 안쪽에서 사그락거리며 사라지는 소리. ‘내 소리가 들리나요?’ 헬레나의 이명 현상을 검사하며 의사가 던지는 <홀리 걸>의 이 대사는 다시 공기 중의 미세한 입자를 타고 관객에게 되돌아온다. 비록 해석되거나 재단될 수 없지만, 잡을 수 없고 분리할 수 없지만. 수많은 스펙트럼의 행간을 가지고. 이름 지어지지 않은 공간을 지닌 채.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소리들은 항상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들리나요? 당신. 삶이 부식되어져가는 소리가.

<홀리 걸>
<홀리 걸>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누구인가?

새로운 남미영화의 대표주자

<늪>

1966년 아르헨티나에서도 특히 보수적인 북부 지역의 살타에서 나고 자란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한때 저널리스트를 꿈꿨지만, 영화에 대한 꿈을 꾸면서 애니메이션을 배웠고, 시나리오 습작을 지속해왔다. 1998년에는 영화학교에도 들어갔지만, 극도로 악화된 아르헨티나의 경제상황에서 제대로 된 수업이나 수련은 불가능했다(마르텔은 이후 데뷔작 <늪>을 들고 들른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자국의 경제상황과 이것이 영화산업에 끼치는 영향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냈고, 아르헨티나 안팎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단편영화와 TV시리즈를 만들며 창작의 허기를 달래던 와중에 완성한 시나리오(<늪>)를 눈여겨본 유력 프로듀서 리타 스탠틱이 선댄스 출품을 권하면서, 장편 연출 데뷔의 길은 트였다. 이 시나리오가 NHK상을 수상하고 10만달러의 상금을 받아 들면서, 영화화의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데뷔작이 된 <늪>은 2001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신인상에 해당하는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받으며 주목받았고, 2002년 광주영화제에도 초청 상영되었다. 두 번째 영화 <홀리 걸>은 2004년 칸영화제 본선에 진출해 또 한번 눈길을 끌며 ‘라틴아메리카영화의 르네상스’라는 새 징후의 선봉에 섰다. 칸영화제 상영 당시에는 만장일치의 호평을 얻은 건 아니었지만, 이후 유력 영화지와 평론가들의 2004년 베스트 10 목록에 심심찮게 언급되기도 했다.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영화는 남미를 탱고의 정열로 기억하는 이들에겐 충격일 만큼 차갑고 건조하다. “남미영화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을 기대하는 건 잘못”이라는 그의 지적을 빌리지 않더라도, 중산층 가정의 균열을 들추는 그의 손끝은 충분히 서늘하다. 데뷔작 <늪>(2001)에서 그는 친척 사이인 두 가정을 주시한다. 주인공의 집안은 몰락했지만, 부르주아 근성이 남아서 하녀를 박대하기 일쑤고, 딸은 하녀와, 남편의 정부는 아들과 밀애를 나눈다. 집은 늪의 이미지에 다름 아니고, 수영장의 물은 썩고 있다. 사실적인 디테일이 돋보이는 <늪>에 비해 두 번째 영화 <홀리 걸>(2004)은 조금 추상적이다. 가톨릭 교육을 받는 소녀 아말리아는 엄마 엘레나와 함께 호텔에서 지내고 있다. 그녀는 거리에서 자신의 엉덩이에 몸을 밀착시켜 오는 중년 남자의 손길에서 엉뚱하게도 신의 손길, 아버지의 손길을 느낀다. 소녀의 엄마 엘레나도 이 중년 남자(닥터 하노)에게 연정을 품지만, 딸과 이 남자가 연관돼 있다는 건 알지 못한다. 한편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남자친구와 애널 섹스를 하는 아말리아의 친구는, 아말리아와 하노의 비밀을 엉뚱한 순간에 엉뚱한 계기로 폭로하고 만다. 하노의 성추행 전모가 드러나려는 순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안고, 영화는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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