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루크레시아 마르텔 [2] - 인터뷰
2005-04-26
사진 : 이혜정
정리 : 박은영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이 말하는 ‘나의 영화’

“닫힌 공간에서 도덕적 타락이 일어난다”

심영섭 | 당신의 영화에서 아르헨티나 북부 지역이 갖는 의미가 궁금하다. 계급이나 인종문제도 포괄하고 있는데.

루크레시아 마르텔 | 내가 태어나서 19년 동안 산 곳이고, 아르헨티나 문화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다. 문화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상당히 보수적이고, 가톨릭 색채가 강하다. 계급 격차라는 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빈민층은 지역 원주민이고, 부유층은 유럽 이주민들이라는 구분도 유사하다. 미국을 잘 아는 사람들은 아르헨티나 북부가 미국 남부와 비슷하다고들 한다.

심영섭 | 두 작품에 모두 백인 부르주아에 대한 비판이 섞여 있고, 그것이 가족문제로 환원되는 경향을 보인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내가 보기에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하는 모든 악의 근원은 중산층에 있다. 물론 중산층보다 도덕적으로 더 많이 타락한 고위층들이 있지만, 중산층은 정치에 너무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많은 심각한 문제들을 낳고 있다. 이 계층의 문제에 대해 알리고, 나 스스로도 인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심영섭 | <홀리 걸>에는 집의 이미지가 없다. 호텔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잡은 데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루크레시아 마르텔 | 영화에서 호텔은 확장된 집의 느낌이다. 또 호텔에서의 삶이라는 것은 단기간 동안 삶의 판타지를 표출하게도 한다.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호텔에서 자살도 많이 하고, 혼외정사가 일어나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본다.

거짓 천국으로서의 수영장

심영섭 | 중의적인 공간적 장치들 중에서도 수영장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영화 모두 수영장에서 끝나고, 수영복을 입은 소녀들의 나른한 모습이 비쳐지고, 중요한 대화가 이뤄진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수영장은 현실과 동떨어진, 자그마한 천국과도 같은 의미다. “돈을 벌면 수영장을 갖겠다”는 대사를 농담처럼 넣었지만, 그건 17세기 사람들이 노예를 부리고 호화롭게 살아가던 것과 맞먹는 일일 수도 있다.

심영섭 | 하지만 수영장에서 천국의 느낌을 받기는 힘들었다. <늪>의 수영장은 탁하고 어두운 심연처럼 느껴졌다. 갈등을 감추고 있는 깊고 어두운 심연.

루크레시아 마르텔 | 맞는 말이다. 수영장이 상징하는 천국은 ‘거짓 천국’이다. 그런 의미 말고도 공개적인 장소임에도, 옷을 벗거나 살짝만 걸친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느껴지는 공간이다. 어느 건축이나 시대를 상징하는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지금 아르헨티나에도 폐쇄적인 지역이 생겨나고 있다. 몇집이 스스로를 가두고 분리하는 벽을 세우는 식이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개의치 않고, 안에서 그들만의 천국을 이루고 살면 그뿐이다. 사회의 도덕적인 오류가 생겨나는 건, 그렇게 닫힌 공간이 생겨나고 사람들이 그곳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어서다. 계급 차이도 커지고, 부자들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갇혀 지낸다.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건, 겉으론 부유한 듯 보이지만, 실제론 별 실속이 없는 그런 계층의 가정들이다.

심영섭 | 캐릭터와 관계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나는 소녀들의 관계가 흥미로웠다. 그들 사이엔 동성애적 감정도 흐른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그 나이대엔 성적 호기심이 발동하게 마련이다. 단짝 친구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고 연인으로 발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런 관계에 흥미를 느껴왔다. 10대 소녀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런 종류의 우정이 비밀 공유의 장치로 작동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사이는 연인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시간과 함께 사라진다. 나중에 그들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성(聖)에 대한 이해가 욕망과 맞닿다

심영섭 | 당신의 영화는 성(性)과 성(聖)을 함께 다룬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한국에서는 두 단어가 똑같이 발음된다는 얘길 듣고, 무척 재밌어한다) 아말리아의 성적 욕망은 속된 무엇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신성한 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신성한 방식으로 그 욕망이 표출된다. 그 욕망은 몸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심영섭 | 그렇다면 성(聖)이 긍정적인 것인가? 영화를 보면 소녀들을 억압하는 장치로 느껴지는데.

루크레시아 마르텔 | 성(聖)스러운 것을 종교적인 것과 관계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가톨릭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도, 종교가 성스러운 건 완벽을 추구하는 그 과정 때문이다. 성이 완성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고 본다. 아말리아가 느끼는 성스러움도 종교적인 것과는 별개다. 그녀가 프랑스 신비주의 텍스트를 읽는 장면은 그런 상황을 정확히 설명해준다. 그 텍스트에는 신과 사람 중에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인간을 구원할 거라는 말이 나온다. 종교가 아니라 성(聖)에 대한 이해가 욕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도, 많은 이들이 성스러운 것과 종교적인 것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에서만 조금 달랐을 뿐이지, 영미권에서도 그랬고, 심지어 같은 언어권인 스페인에서도 혼란스러워했다.

심영섭 | 두 영화에 모두 ‘기적’의 장치가 있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인물들의 바람이면서 나의 소망이기도 한데, 성적인 것이 드러나길 바라는 조바심 같은 게 있다. <늪>에서 처녀성은 인물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홀리 걸>의 첫 장면은 종교적인 영감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성스러운 것의 추구가 남자에 대한 욕망으로 나아가고, 욕망이 신의 부름인 양 전이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라틴아메리카영화 하면 마술적 리얼리즘을 기대한다. 영화를 그런 식으로 보는 건 문제다. 만든 사람은 그런 걸 의도한 게 아니니까.

심영섭 | 클래식 음악과 성희롱의 만남이 흥미로웠다. 미카엘 하네케도 <피아니스트>에서 클래식 음악과 포르노를 접합시킨 일이 있었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음악 선택은 신경썼다. 부조리한 상황에서 바흐 음악이 흐르면, 재밌지 않겠나 싶어서. 사실 거리의 악사가 쓰는 테레민(전자악기)에도 신경을 썼는데, 그것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은 없다. (테레민은) 비치 보이스의 음악이나 히치콕 영화, 40∼50년대 영화, B급영화에 종종 등장하는데, 내 경우는 길에서 피아노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설정이 곤란해서 그렇게 했다.

심영섭 | 그 전자악기는 영화 속에서 매우 중요한 장치인 것 같다. 닥터 하노는 이비인후과 의사이고, 소녀의 엄마 엘레나는 이명을 겪는다. 악사의 연주를 보는 것은 소리를 눈으로 보는 경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화에서는 ‘소리’가 더 중요해진 것 같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사실 그런 게 다 유머다. 사람들이 별로 안 웃어서 그렇지. (웃음) <홀리 걸>은 <늪>과 다르지만 관계가 있다. <늪>은 주변에 사는 인물들을 다뤘다. 소녀가 선풍기 앞에서, 환상 속의 남자에 대해 노래하는 장면 기억하나. 그 남자가 바로 <홀리 걸>의 닥터 하노일 수 있다. 하노라는 인물에는 환상적인 데가 있고, 페이크가 있다. (그래서 여기에도 남자 목에 대한 페티시가 있는 것 같다, 라는 얘길 듣고) 좁은 공간에서 같은 렌즈를 써서 찍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나는가보다.

“내게 제일 중요한 건 음향”

심영섭 |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제가 커뮤니케이션에 어려움을 겪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노는 귀를 고치는 의사지만, 소녀와 그 어머니의 성적 욕망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라는 대사가 중요한 메시지처럼 다가왔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특별히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나 어려움을 이야기하려던 것은 아니다. 어린 소녀가 절대 이뤄낼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던 것이다.

심영섭 | 클로즈업으로 인물을 포착하곤 한다. 인물의 무엇을 드러내려고 그렇게 가까이 가는 건가.

루크레시아 마르텔 | 의도하거나 의미하는 바는 없고, 이야기를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다.

심영섭 | <늪>을 보면, 삼단 거울을 통해 나눠진 아버지의 모습, 그런 것들이 인상적이다. 화면 짜기에서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루크레시아 마르텔 | 직접 드러나지 않거나, 절반만 드러나거나 하는 느낌을 좋아한다. 사물에 전적으로 다가가는 것도 멀어지는 것도 아닌 듯한 느낌. 카메라를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보여주는 것도 그런 이유다.

심영섭 | 낮장면이 유난히 많은 것 같은데.

루크레시아 마르텔 | 밤에는 워낙 비밀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래서 낮에 비밀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이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낮에 비밀을 감추는 것에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심영섭 | 영화 만들 때 어떤 것이 기준이 되나. 스토리, 캐릭터, 장소, 이데올로기 중에서 중요한 기준이 되고 토대가 되는 요소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내게 제일 중요한 건 음향이다. 시나리오 쓰기 전부터 음향을 먼저 생각한다. <늪>에선 실제로 비가 내리거나 폭풍이 치진 않지만, 폭우나 폭풍이 가까이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려고 음향에 신경을 썼다. 총소리, 천둥소리가 겹쳐서 나타나도록. 그래서 그런 소리들이 어떤 위협처럼 느껴지도록. 관객은 그 어떤 요소보다도 음향으로 영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홀리 걸>에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잔잔한 톤으로 전하고, 거짓이나 과장된 이야기는 높은 톤으로 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다음 영화는, 꿈에 취한 사람이 겪는 이야기

심영섭 | 인물을 풀숏으로 잡는 게 아니라, 중간에서 끊어 잡는 숏이 많아서 흥미로웠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그건 의사의 시각이 반영됐기 때문에 그렇다. 가까이 가서 보고, 신체를 부분적으로 보고 하는. 카메라를 누군가의 시각으로 두고 관찰하는 걸 좋아한다. 주인공 소녀 아말리아의 시각으로도 많은 걸 보여주지만, 비중으로 보면 의사의 시각에서 더 많은 일이 전개된다. 소년처럼 호기심이 많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어수선한 타입이 아니라, 한 장면에 집중해 발견해내는 타입의 관찰자다.

심영섭 | 그렇다면, 당신은 닥터 하노의 성희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이 아닌 건가.

루크레시아 마르텔 | 그렇다. 성추행 사실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그 남자 자신이다. 그런 의미를 담고 싶었다.

심영섭 | <빌리지 보이스>의 평론가 에이미 토빈은 이 영화에 감독 자신의 가족사가 반영됐을 거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어떤 장면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가족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사의 반영이라면, 엄마 엘레나와 삼촌의 관계 정도? 다른 인물들도 나와 관련됐을 수 있겠지만,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심영섭 | 다른 감독의 영향을 받았다면, 누구인지 궁금하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내가 이제까지 본 모든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을 거다. 시나리오 쓸 때 영향을 주는 건 엄마와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 그들과 나눈 대화다. 우리집은 대화가 많은 편이다. 가족과 이야기를 할 때면 테마가 이리저리 튀곤 한다. 그런 비형식적인 대화, 일상 회화가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특정한 대사가 아니라 내러티브 구조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서울에 오기 직전에 코스타리카에 가서 사람들의 일상 대화를 녹음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했다. 한국에서도 그러고 싶었는데, 말을 못 알아들어서…. (웃음)

심영섭 | 남미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 여성 프로듀서 리타 스탠틱과 작품을 함께해왔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앞으로도 그녀와 계속 일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진행하는 작품은 내가 직접 제작을 맡았다. 조금 실험적인 작품이다.

심영섭 | 어떤 작품인지,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루크레시아 마르텔 | (다이어리에서 돛단배가 떠 있는 강 사진을 꺼내며) 티그레라는 도시에 있는 강인데, 간만의 차가 무척 크다. 여기 이 배는 내 소유인데, 배를 타고 가면서, 길 잃은 사람이 항해일기를 쓰는 것처럼 만들어갈 생각이다. 항해를 하면서, 가족사와 과거의 기억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건데, 잠에서 막 깨어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뭘 하는지 모르는, 그런 막막한 심리를 표현하게 된다. 꿈에 취한 상태(intoxicated dream)라고나 할까. 나도 새벽에 깨면 한두 시간 정도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이상한 시추에이션 아닌가. 연말쯤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찍어놓은 것만 8시간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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