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레온 에라주리즈/칠레/2004년/101분
함정에 걸려든 두 젊은이를 속도감 있게 뒤쫓는 영화. 카를로스와 페드로는 마약을 거래하러 나갔다가 상대방에게 돈을 강탈당한다. 그들에게 일을 맡긴 사람은 백주대낮에도 살인을 저지르기로 악명 높은 깡패 야오. 임신한 여자친구와 가정을 꾸리고 싶어하는 카를로스는 혼자 할머니를 보살피는 페드로와 함께 어떻게든 돈을 구하고자 훔친 돈으로 권총을 산다. 그들은 토요일까지 야오에게 돈을 갖다주어야 하지만, 도시의 뒷골목은 예측불허 전쟁터다.
많은 청춘영화가 그렇듯 <나쁜 피>도 도둑맞은 500달러가 아니라 그 돈에 이르기까지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 때이른 임신과 뒷골목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는 가난을 눈여겨보는 영화다. 아이를 키우겠다고 결심하지 않았다면, 카를로스는 야오를 찾아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비루하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에게만은 다정한 페드로도 딱히 이런 곤경에 처해야만 할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총알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누구라도 총알에 맞을 수 있다.
감독 레온 에라주리즈는 우리가 혁명의 땅으로 알고 있는 칠레의 현실을 기록하기 위해 1년 가까이 조사와 취재를 했다고 한다. 카를로스와 페드로가 눈비고 다니는 빈민가와 번화한 도시 시내는 그들의 발걸음과 똑같은 속도로 스쳐가면서 다큐멘터리처럼 거칠고 생기있는 자국을 남긴다. 그처럼 현실에 밀착돼있는 이 영화는, 남미의 많은 청춘영화들처럼, 어쩔 수 없이 비극이다. 가난한 젊은이들에게도 미래는 있는 거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배반에 배반을 거듭해도 <트레인스포팅>처럼 넥타이 매는 일상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광고와 비디오로 단련된 감독답게 데뷔작임에도 탄탄하게 붙는 속도와 꾸밈없는 현실성이 돋보이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