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추수기> Harvest Time
2005-05-02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감독 마리나 라즈베즈키나/러시아/2004년/68분

“그날 이후 엄마는 더이상 미소짓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기법을 차용한 <추수기>는 소원이라곤 두가지 뿐이었던 소박한 여인이 영원히 미소를 잃어버리게 되는 서글픈 우화다. 1950년대 러시아의 시골 마을, 두 아이의 엄마인 안토니나는 마을에서 유일한 여성 수확기사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두다리를 잃고 돌아온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무 여자나 쉽게 사랑하게 되는 남편의 바람기를 질투하고, 꽃무늬 캘리코천으로 옷을 지어 입는 꿈을 꾸곤 한다. 그러나 행복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최고의 수확량을 거두어 붉은 깃발을 수여받은 안토니나는 그 깃발에 집착하면서 점점 미쳐간다. 비에 젖을까, 쥐가 파먹을까, 깃발만을 근심하는 안토니나에게 버림받아, 남편 또한 죽을 때까지 술을 퍼마시는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한다.

<추수기>는 둘째 아들이 옛날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영화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소개하고, 간신히 걸음마하는 어린 자신을 소개하고, 어머니의 마지막 미소를 소개한다. 그때문에 관객은 비극은 예정돼 있고, 돌이킬 수도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며 영화를 지켜보게 된다. 추수기를 맞은 황금색 들판과 이삭 위에 펼쳐진 맑고 푸른 하늘까지도 애달픈 정조를 띠게 되는 것이다. 때로 <추수기>는 남루한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빛이 난다. 두다리가 없지만 상체는 단단한, 매우 잘생긴 남자가 두팔만으로 곡예를 펼쳐보일때, 그를 보는 아내가 근심없이 웃을 때, <추수기>는 이미 알고 있는 비극을 부정하도록 만든다. 매우 짧은 <추수기>는 돌처럼 굳어버린 여인의 표정과 다리 없인 살아도 사랑없인 살수 없었던 남자 때문에 68분 그 이상의 생명을 갖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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