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박중훈이 충무로를 향해 던지는 몇가지 충고 [1]
2001-07-13
글 : 김혜리
사진 : 이혜정

박중훈(36)에게는 1997년쯤부터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고민이 있었다.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로 아이돌 스타를 해봤고 <칠수와 만수> 등에서 ‘민중 배우’ 소리도 들었으며 로맨틱코미디의 주인공으로 한 철을 보냈는가 하면 <투캅스>로 최고 흥행작 히어로도 해봤다. 이제 어디로 갈까? 그건 더 올라갈 데가 없다는 교만이 아니라 작심한 긴 여행이 끝나려면 한참 멀었는데 어느 쪽으로 걸음을 떼야 현명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된 여행자의 막막함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연초 선댄스에 본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반한 조너선 뎀 감독이 보내온 <찰리의 진실>(The Truth about Charlie) 시나리오는 그의 머릿속 매듭을 단칼에 끊어버렸다. 아예 거듭날 수 있는- 그만큼 만나기 힘든- 영화를 하거나, 더 넓은 관객층을 향해 열린 할리우드영화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정리하던 참이었다.

그의 선택이 정말 옳았나보다 생각한 것은 파리 촬영현장의 박중훈과 통화한 지난 5월이었다. 막 연애를 시작한 스무살 청년처럼 건강한 홍조를 띤 그의 음성은 피곤한 밤샘 촬영 뒤끝이라는 말을 흘려듣게 했다. 3월12일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던 박중훈은 지난 7월4일 <찰리의 진실>의 모든 촬영에 마침표를 찍고 서울로 돌아왔다. 지난 6월17일 일시 귀국해 <세이 예스>의 남은 촬영을 마치고 23일 다시 파리로 날아가긴 했지만, 그것도 자신의 출연분이 없는 카리브해신을 찍는 동안 살짝 한국에 다녀간 것이니 촬영 소요기간은 총 4개월이었던 셈이다. 서른편의 영화를 만든, 충무로의 두 번째 고참 스타 박중훈의 할리우드 프로덕션 경험은 배우 개인에게도 소중한 기억이지만 한국영화를 만들고 지켜보는 사람 모두에게도 솔깃한 화제다. “왜 미국영화 가운데 가장 탄복할 만한 요소인 시스템의 천재성(the Genius of System)을 보지 않는가”라고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제자들에게 일깨운 것은 앙드레 바쟁이었다. <씨네21>은 안쪽으로부터 관찰한 그 견고한 시스템의 일면을, 지난 봄부터 “아주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던 박중훈으로부터 청해 들었다. 사람과 상황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습관이 밴 베테랑 배우이자, 비유와 요약에 능한 달변가답게 그는 넉달의 할리우드 체험을 충무로와 견주어 생생히 들려주었다. 혹시 “난 이런 것도 해봤는데”식의 오만한 ‘서방 견문록’으로 읽히지 않을까 걱정하는 기색을 지우지 못하면서.

1분이라도 계획을 짜서 쓴다

미국을 떠나 파리와 카리브해 마티니크에서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을 진행한 <찰리의 진실> 스탭들은 본국에서 작업할 때보다 훨씬 조직화가 덜 된 프로덕션이라며 “우리에겐 어드벤처”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박중훈 역시 한미합작 영화 <아메리칸 드래곤>에 견주어 꽉 짜여져 있다는 느낌이 덜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제작에 소요되는 시간을 마디마디 철저히 계산하고 효율적으로 ‘완전 연소’시키는 철칙은 <찰리의 진실>에서도 엄수됐다.

할리우드 프로덕션의 시간관리는, 제작기간의 1.5배에 해당하는 시간을 투자해 완벽을 기하는 프리 프로덕션과 세밀하고 정확한 촬영계획을 통해 이루어진다. 어떤 제작 시스템에서나 시간의 문제는 돈의 문제와 연동되게 마련이다. 제작비 규모가 큰 스튜디오 영화는 시간과 맞바꿔지는 돈은 액수만으로도 중압감을 안긴다. 순제작비 5천억원이 든 <찰리의 진실>의 경우 하루는 13억원, 한 시간은 곧 1억원. 완벽한 사전준비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충무로와 할리우드에서 시간을 운영하는 태도에 결정적인 차이를 만드는 것은 고용방식이라는 것이 박중훈의 결론. 배우를 포함한 제작진이 정확히 하루 12시간 노동과 12시간 휴식을 계약하고 주급제 보수를 받는 할리우드 프로덕션에서 시간은 곧 돈이다. 반면 우리의 스탭들은 1일 작업시간이나 촬영기간과 무관하게 “시작부터 끝까지”라는 계약을 맺고 착수할 때 보수의 반을 받고 끝날 때 반을 받는다. 그러나 이 끝나는 시점이란 것이 애매해 촬영종료 뒤 스탭들은 눈치를 보며 영화사에 드나들기 일쑤다. 촬영시간을 명시하고 주급제를 도입하면 사전준비가 철저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특수효과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고 한다. 그건 현장에 가서 이것저것 다 시험하기 때문이다. 비내리는 장면을 예로 들어도 할리우드에서는 내릴 자리에 정확히 비를 미리 심어두니까 바로 원하는 장면을 얻지만 우리는 몇배의 시간이 든다”고 말하는 박중훈은 “여기서 재미있는 건 우리도 하면 된다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예컨대 대규모 엑스트라가 동원돼 하룻밤을 더 샐 경우 일당이 정확히 더 나가거나 비싼 기자재를 대여했을 때는 어느새 일사천리로 촬영이 진행된다는 것.

심지어 박중훈은 4∼5년 전쯤 100회 촬영을 기준으로 100원을 받는다면 100회 이내에 끝나면 80원만 받고 100회를 초과하면 100원보다 더 받겠다는 계약을 하면 어떨까 하고 안성기 선배와 의논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것도 상업영화 시스템 안에서 주연급 배우가 변화를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제작자들의 어깨에 부담을 얹는 일인 듯해 접긴 했으나 변화가 절실하다는 견해는 변함이 없다. 그런가 하면 주급제의 냉정함은 ‘프로페셔널’을 낳는다. “현장은 학교가 아니라 프로들이 영화를 만드는 곳이다. 신인이란 처음 영화를 한다는 뜻이지 미숙해도 용납된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 프로야구 신인 선수가 타율이 1할이면 어느 감독이 용인하겠냐”고 박중훈은 되묻는다. 일주일 단위로 해고가 가능한 시스템은 프로덕션의 긴장을 유지하는 기능을 갖는다는 지적이다.

<찰리의 진실> 현장에서 배우들은 일일 촬영 계획표에 따라 분단위로 움직였다. 박중훈은 화장실에 갔다가 헤드세트로 몇분 있다 나올 거냐는 무전을 받은 적도 있다며 웃었다. 전담 조감독이 주연의 움직임마다 따라붙는 건 기본. 경제적으로 디자인된 촬영방식도 시간을 절약한다. 촬영은 몇 쇼트냐의 개념이 아니라 조명의 세트업 단위로 계획됐고 세팅을 철수하고 장소를 옮기는 횟수를 최소화하도록 동선이 꼼꼼히 짜였다. 그런가 하면 주말의 휴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 1년을 한 영화에 매달리더라도 주말이면 친구와 가족을 만나 쉴 수 있다면 정상적인 생활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 터다.

중국에 가서 13개월 동안 찍건, 한달 동안 멜로드라마를 찍건 개런티가 비슷한 현실은 “샥스핀으로 한끼 먹나 떡볶이로 먹나 배를 채웠으니 마찬가지”라는, 노동의 무게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논리가 아니겠냐고 박중훈은 반문한다. ‘시작부터 끝까지’식 작품계약이 일반적인 충무로의 상황에 대해 그는 또다른 우려를 표한다. 차기작 스케줄을 제대로 잡을 수 없는 여건은 우리 영화인들이 충무로 영화만 하는 시대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해외로 진출하는 영화인이나 합작 프로젝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쓸 데는 쓰고 아낄 것은 1달러도 아낀다

“우리 영화를 찍다보면 회의가 들 때가 있다. 나는 직업은 있지만 직장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내가 ‘거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벽에 기대어 도시락을 먹고, 인근 구멍가게 화장실을 빌려 쓰며 죄지은 사람도 아닌데 고개숙이고 볼일을 볼 때 그런 심정이 된다. 만약 자기 회사에 화장실이 없어서 회사 앞 가게 화장실을 다녀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박중훈은 얼마 전 서울 종합촬영소에서 피투성이 분장을 한 채 <세이 예스>를 찍던 중 일반 관람객이 화장실에서 나갈 때까지 기다리느라 애를 먹었다. 종합촬영소는 관람객과 배우, 스탭이 출입문과 화장실을 함께 쓰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관람객의 동선도 통제가 안 된다. “글 쓰는데 옆에 와서 누가 계속 찌른다고 생각해보라”고 그는 상황을 설명했다. 물론 그 정도야 대범하게 넘기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지만, 신경이 바늘 끝처럼 곤두서 있는 촬영현장의 배우로서는 고통스러운 노릇이다. 할리우드 프로덕션은 이처럼 작업의 ‘정상 조건’을 확보하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일정한 조명으로 분장을 고칠 수 있는 분장차가 대기중이고 스탭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천막이 마련된다. 영화의 최종 전달자인 배우의 몸과 마음이 정리된 상태로 카메라 앞에 나설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제작비의 현격한 차이에서 나오는 결과 아니냐고 일축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같은 비용을 필름 값과 마찬가지로 없으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없는 기본비용으로 간주하는 태도라고 박중훈은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영화에 꼭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부분에서는 단돈 1달러도 악착같이 아끼는 것이 할리우드 프로덕션이다. 32만5천달러(4억원)로 낙착된 개런티 협상에서 이미 할리우드의 냉철한 셈법을 실감했던 박중훈은 ‘핸드폰사건’을 통해 그 가차없음을 확인했다고. 촬영 시작 무렵 스튜디오쪽으로부터 촬영기간중 사용할 수 있는 휴대폰을 지급받은 박중훈은 뒤에 휴대폰에 제작과 관련된 전화번호가 모두 입력돼 있어 그 번호 외의 통화에서 발생한 요금은 정확하게 배우 개인에게 청구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배우를 소중히 해야 최고의 장면을 뽑는다

6월 말 귀국 당시 여러 인터뷰에서 박중훈이 전했 듯, 할리우드영화는 제작 시스템이 구조적으로 배우가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다시 말하면 배우를 돌보는 일에 일정한 비용을 투자함으로써 같은 배우의 베스트를 뽑아내고 그것이 영화에 수백배의 가치를 더하는 편이 이익이라고 보는 셈이다. 구조적 메커니즘뿐 아니라 촬영현장의 기술적 측면에서도 이 원칙은 견지된다. 조너선 뎀 감독의 스타일이기도 하겠지만, 현장에서 카메라 메커니즘을 잘 의식할 수 없었다고 박중훈은 말한다. 포커스 풀러(Focus Puller)가 계속 고개를 움직이며 무선장치로 느낄 수 없도록 초점을 조정하는 현장에서 배우들은 포커스로 말미암은 스트레스로부터 거의 자유롭다. 덕분에, 16년에 걸친 충무로 연기경험으로 어디부터 어디까지 움직여야 하는지 통달한 박중훈은 훨훨 날다시피 해 스탭들을 놀라게 했다고. 그런가 하면, 신과 신의 연결을 체크하는 27년 경력 스크립트 슈퍼바이저와 이전 장면의 디테일을 두고 말싸움을 벌였다가 스탭들 앞에서 리플레이로 확인해보고 박중훈의 기억이 맞다는 사실이 확인된 적도 있었단다. 한마디로 모래주머니를 떼고 달린 셈.

배우의 안전보장 수준도 매우 높다. 힘은 엄청 들지만 전혀 위험하지는 않은 촬영장에는 간호사, 의사면허 소유자가 늘상 대기한다. 스크린에서 가장 위험해 보이는 장면이 실은 현장에서 가장 안전한 장면이다. <찰리의 진실>에서 전직 특수부대 요원으로 분한 박중훈에게는 계단에 얼굴을 부딪히며 질질 끌려 내려가는 장면이 있었지만 카펫 아래 부드러운 고무가 일일이 설치되어 통증이 전혀 없었다. 홍보일정이 시사 이후로 몰려 있어 촬영중에 전혀 신경을 분산시킬 일이 없다는 점도 스타로서 오랫동안 영화를 찍는 도중 홍보활동에 시달려온 박중훈에게는 부러운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늘 촬영 없는데 왜 인터뷰 안 되냐고 항의를 하는데 그건 권투 선수들이 라운드 사이에 1분씩 쉴 때 이야기시키는 것과 매한가지다”라고 박중훈은 비유한다. 심지어는 유니버설이 배포할 자체 홍보자료 촬영팀도 항상 배우의 아이라인 안으로 ENG카메라가 침범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박중훈을 내심 놀라게 했다.

시스템이 서야 영화찍기가 행복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박중훈이 사랑하는 영화고,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이명세 감독과 함께한 소중한 영화이며 <찰리의 진실>까지 다리를 놓아준 고마운 영화다. 하지만 그 영화를 찍는 동안 박중훈이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끝도 없이 오래 찍고, 오래 찍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괴로운 현장의 하이라이트였다.” 어느날 이명세 감독에게 항의했더니 “나는 이러저러한 숏을 원하는데 그것을 얻을 때까지 해야지 어떻게 하겠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예술가로서 그같은 고집은 전혀 흠잡힐 일이 아니다. 문제는 감독도 스탭도 어떻게 해야 얼마나 어렵게 해야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던 점이며 그것을 예상하고 시험하고 테스트할 수 있는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박중훈은 그때 깨달았다.

“지금도 나는 평생 영화배우를 하고 싶다. 하지만 남은 생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촬영기간처럼 보내야 한다면 포기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관객이 2천만명 들고 600억원 개런티를 받고 오스카 트로피를 스무개쯤 받는다 해도 그렇게 몸이 곯아서는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박중훈은 고개를 젓는다. 12시간 최선을 다해 일하고, 그중 점심시간 1시간을 보장받고 촬영이 끝나면 12시간 휴식을 갖는 시간표. 그것은 합작 영화 <아메리칸 드래곤>이나 호주에서 촬영하며 호주 스탭을 기용했던 <현상수배>의 프로덕션에서도 준수된 원칙이었다. 인간이 정상적 체력과 정신상태를 유지하며 일이 끝날 시간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박중훈이 생각하는 행복의 중요한 조건이다. 하지만 우리 영화계에서는 영화를 완성해야 한다는 큰 명분 하나로 과정이 희생되는 일이 빈번하다고 그는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받는 돈이 많건 적건 힘있는 배우건 없는 배우건 기본적인 인간의 노동환경은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 대신 “조명팀이 밤새 매달아놓았는데 너는 하룻밤도 못 새우냐”, 즉 나도 벗었으니 너도 벗으라는 논리가 배우와 스탭들에게 연쇄적으로 적용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너는 150억 받으니 4개월간 잠잘 생각말라”는 이야기도 어불성설이고, 사흘 굶었으니 아무거나 먹으라고 하는 것도 안 될 말이다. 사흘 굶은 이도 밥먹기 전에는 물을 마시고 싶을 수 있고 짠 반찬은 짠 거 아니겠냐고 박중훈은 답답해한다.

개봉날짜를 목표로 질주하면서 크고 작은 희생이나 낭비를 모아 영화를 완성하는 힘을 끌어내는 우리 영화계와 달리 할리우드는 책임 소재를 야박하리만큼 분명히 하는 것으로 계약으로 엮인 팀원을 단단히 옭아맨다. 배우가 현장에 늦게 도착하면 수송 담당자가 책임을 지고 현장 도착에서 분장하고 머리를 만지는 과정이 정해진 시간 안에 완료되는 문제만 관리하는 조감독은 전체 영화가 뭘 찍고 있는지 돌아볼 새도 없다. 맡은 바에 차질이 생기면 중도 해고되는 일도 생긴다. 배우 역시 현장에 도착할 때와 떠날 때 출근부에 도장찍듯 사인을 남겨 혹시 있을지 모르는 소송에 증거를 남긴다. “책임이 세분화되고 소재가 분명하다는 것은 책임감을 그만큼 강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프로페셔널을 만드는 것은 시스템이다.” <블랙 레인> 촬영 당시 한 시간 반 지각해 그만큼의 돈을 물어냈다는 다카쿠라 겐의 일화도 들었다는 박중훈의 결론이다.

<찰리의 진실>은 대우와 오라이온이 제작비를 반씩 투자했던 합작 영화 <아메리칸 드래곤>에 이은 박중훈의 두 번째 할리우드영화다. <현상수배>는 호주의 시스템을 사용해서 만든 한국영화, <아메리칸 드래곤>은 한국 자본이 미국영화 시스템을 활용한 영화였고 <찰리의 진실>은 배우가 단신으로 메이저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 들어간 영화라고 박중훈은 정리한다. (<찰리의 진실> 이전에 <해프 패스트 데드>(Half Past Dead)라는 패트릭 스웨이지와 공연이 예정된 액션영화 제의가 있었으나 IMF 위기로 무산된 바 있다.)

<아메리칸 드래곤> 제의를 받았을 때 매니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한국 톱스타가 왜 그런 싸구려 영화를 하느냐”며 말리기도 했지만 박중훈은 시나리오도 읽지 않고 응했다. 그에게는 ‘경험’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다음 스텝을 전제했기 때문이냐고 묻자 “그 영화만으로 끝이었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끝날 거면 그 영화를 하건 안 하건 끝날 경력이니까”라고 시원스레 단언한다. <찰리의 진실> 작업을 비교적 만족스럽게 끝내고 조너선 뎀 감독으로부터 그가 제작 또는 연출할 로맨틱코미디 출연의사를 넌지시 타진받기도 한 지금, 박중훈은 <아메리칸 드래곤>이 있었기에 할리우드 시스템에 당황하지 않았고 영어대사에 대한 감을 얻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 새삼 다행스럽다.

박중훈은 오는 8월부터 <찰리의 진실>의 개런티 섭외, 변호사 선임을 돌봐주었던 이주익 대표가 이끄는 빅뱅 크리에이티브로 소속을 옮긴다. 그리고 그의 일을 보살펴온 매니저는 미국으로 영어유학을 떠난다. 말할 것도 없이 할리우드 진출을 염두에 둔 장기적 포석이다. 박중훈이 서운한 것은 사람들의 욕심스러운 기대다. “주윤발과 나를 비교하는데 나와 주윤발은 같은 아시아 배우더라도 덴마크 스타와 프랑스 스타의 국제적 지위만한 차이가 있다. 유학 당시만 해도 일본영화와 중국영화를 커리큘럼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한국에서도 영화가 제작되는지를 물었다. 주윤발에게는 오우삼 같은 감독, 프로듀서의 든든한 지지가 있지만 나는 혼자다.” 막연한 꿈에서는 예전에 깨어났고 기나긴 게임에 대한 담담한 예감이 있을 뿐이다. 박중훈이 불쑥 말했다. 사랑하면 그 여자 집 앞에 무조건 하염없이 서 있어야 한다고. “푸대접을 받아도 참을성 있게 서서 기다리고 장미꽃을 바치고, 그러다 차이면 차여도 차인 이유를 알게 돼요. 그리고 다음 연애 때 지혜를 얻게 되죠. 하지만 휴대폰 통화나 하다 차이면 아무것도 모른 채 끝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존심 상한다고 그 집 앞에 서 있지 말라고 해요.” 그는 이제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그 집 앞’에 적어도 먼동이 틀 때까지 서 있을 태세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 오기어린 미소를 머금고.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