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오시마 나기사 [1]
2000-04-11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불굴의 전사, 불멸의 사무라이, 불운의 코스모폴리턴
촬영현장에서의 오시마 나가사

“부모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뭐란 말인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기껏 일찍 죽는 것 정도가 아닐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뉴웨이브는 아비의 집을 불태우고 거리에 나선 아이들의 몫이었다. 악동 프랑수아 트뤼포가 ‘아버지의 무덤을 파헤치는 묘굴꾼’이란 비난 속에 프랑스 평단을 들쑤셔 놓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젊은 감독들은 아버지의 영화의 죽음을 고한 ‘오버하우젠 선언’을 내놓았다. 전후 일본영화계 최대의 문제아 오시마 나기사(1932∼ )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27살의 나이에 데뷔하는 진기록을 세우더니 “일본영화는 없다”는 도발적 발언으로 일본영화계를 뒤집어 놓았다. 오시마도 아비에 대한 저주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그가 1973년에 쓴 에세이 <내 아버지의 부재-내 실존의 결정적 요소>는 이렇게 이어진다.

“내 아버지는 내가 6살에 돌아가셨다. 난 어머니라는 존재의 보호막이 싫었다. 그게 내 삶을 평범하게 만들었다. 내 속에 비범한 게 있다면 그건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다. 난 직장에 들어갈 때까지 연장자를 대하는 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최근 내 속의 예의와 순응성을 발견했지만, 이미 많은 문제를 일으킨 뒤의 일이다. …이런 행동이 내게 이롭지 않다는 건 분명하지만, 적어도 평범함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데는 도움을 주었다. 내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가 6살이 될 때까진 아이를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다. 이제 아이는 6살을 훨씬 넘었다. 언제라도 난 죽을 수 있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문제아, <사랑과 희망의 거리>

<고하토>를 만들던 99년의 오시마

동서양의 공모처럼 보이는 이 도저한 살부의식과 공격적 허무주의, 오만과 불안의 자기파괴적 수사야말로 일본 뉴웨이브, 그리고 새 물결의 으뜸 전사 오시마 나기사의 삶과 영화를 관류하는 체액이다. 오시마는 통제불능의 문제아였다. 총기가 지나쳐 불안한 눈빛의 이 새파란 젊은이를 40년 전통의 보수적 영화사 쇼치쿠가 전격 데뷔시킨 건 관객 급감에 직면한 그들의 고육지책이었다. 일단 실험은 성공했다. 데뷔작 <사랑과 희망의 거리>는 어딘지 삐딱했지만 좋은 평을 얻었고, 두 번째 영화 <청춘잔혹이야기>는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대대적 성공을 거두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세 번째 작품 <일본의 밤과 안개>는 기성 일본사회와 당시 일본 운동권의 지주 일본공산당을 저주하는 격렬한 정치영화였다. 게다가 연극 기법과 다큐 스타일을 혼용한 형식의 도발성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영화사가 3일 만에 슬며시 간판을 내리자, 오시마는 쇼치쿠를 비난하는 격문을 발표한 뒤 쇼치쿠를 나왔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일본의 밤과 안개> 학살에 항의하며 이 글을 쓴다”로 시작된 이 격문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난 포기하지 않는다.…일본영화의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늙기 전에 죽고 싶다”고 외치던 60년대 미국의 로커처럼 오시마 나기사도 자기 인생에 늙는다는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투로 말하고 행동하며 60년대를 보냈다. 불안과 격정의 소용돌이에서 그의 대표작들은 태어났다. 60년대 초 일본 학생운동의 신좌파 이념에 동조한 오시마는 일본영화의 전통과 싸웠을 뿐 아니라, 일본의 기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일본인들의 허위의식과 위선과도 사무라이처럼 싸웠다. 그의 공격 대상은 일본식 군국주의 같은 현상적 이데올로기를 넘어 국가 자체를 향했다. 그는 일본에서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만들어지는 의사 미국영화(The pseudo-American film)를 혐오했고, 자신의 영화가 세계인의 언어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으며, 장 르누아르의 “나는 영화라는 공산주의 국가의 시민이다”라는 말을 사랑한 국제주의자였다. 오시마는 또한 형식의 정치성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자각한 예술가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날 것 그대로가 아니라, 기성 형식에의 쉼없는 도발을 통해 드러냈다. 오시마는 불안할 정도로 온통 60년대적이었다.

동양의 고다르, 왜?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 포스터

오시마 나기사는 종종 동양의 고다르로 불린다. 고다르의 아류라는 뜻으로 오인되지 않는다면, 이건 틀린 비유가 아니다. 오시마 자신은 고다르와의 공통점을 묻는 질문에 “첫째는 영화, 둘째는 정치”라고 시원하게 대답한 적이 있다. 장 뤽 고다르와 오시마 나기사는 양국 뉴웨이브의 최전선이었고, 영화의 정치성이 형식의 정치성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는 신념을 지킨 정치적 모더니스트였다. 이것이 오시마가 자신과 고다르의 공통 주제가 영화와 정치라고 말한 것의 의미다. 그러나 둘의 차이는 공통점만큼이나 크다. 영화와 정치는 두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였지만 그 의미의 거리는 꽤 먼 것이었다. 잘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 뉴웨이브 감독들은 영화광이었다. 트뤼포는 영화중독자클럽을 결성할 정도로 광적인 영화애호가였고, 고다르 역시 종종 인생이 영화보다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자신의 영화 속에서 던지며 영화광임을 감추지 않았다. 청년기 고다르에게는 영화가 인생보다 적어도 더 흥미로운 것이었고, 파리의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고 뉴웨이브 동료들과 영화 토론하기를 일상의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삼았다.

오시마 나기사는 이 점에선 거의 정반대였다. 그와 영화의 만남은 거의 우연이었다. 그가 원했던 직업은 기자였다. 명문 교토대 법학부 출신의 이 열혈청년은 비교적 진보적인 <아사히신문>에서 일하길 원했지만 입사시험에서 무슨 이유에선지 불합격했다. 심지어 섬유, 제지 회사에도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택한 곳이 쇼치쿠라는 영화사였다. 일본의 메이저영화사들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드물게 30년대부터 조감독을 공채로 선발하는 방식을 오랫동안 유지해오고 있었다. 이 관행은 강력한 도제제도와 함께 영화를 창조력과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여타의 상품과 마찬가지로 숙련과 경험의 산물로 간주하는 주류적 전통의 틀을 유지하는 근간이었다. 오시마는 수석으로 쇼치쿠의 조감독 공채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당시의 오시마는 훗날의 고백대로 영화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조감독 오시마에게는 그러나 청년 고다르에게는 없던 것이 있었다. 바로 정치적 열정이었다. “나의 청춘은 처음부터 정치라는 것과 연관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오시마는 토로했다. 프랑스의 청년영화광들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들락거리며 영화와 문학과 철학을 논하고 있을 때 교토학생연맹 의장으로 활동하던 오시마는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다. 일본 전후 세대들의 이상주의적 열정은, 때로 몽상적인 혁명론으로 치닫고, 마침내 구제불능의 극좌 테러리즘 노선을 걸으며 자멸해갔지만, 전후 일본의 반성없는 번영을 견제하는 최대의 방부제였다.

작품이나 발언을 통해 보면 오시마는 특정한 정치적 계파에 속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하나 확실한 것은 오시마의 정치의식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계기는 50년대 학생운동의 실천이었고, 이를 통해 일본 신좌파의 이념에 깊이 동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 신좌파는 60년대 중반 이후에 그들이 가장 비난했던 관료적이며 파시스트적인 행태에 함몰해갔지만, 적어도 출발은 정치적 성과보다 과정의 혁명성을 중시한 근본주의였다. 그런 점에서 트로츠키주의나 무정부주의에 가까웠다. 오시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일본인의 정신이 지닌 비밀을 밝히지 않는다면, 숨가쁘게 살다가 숨가쁘게 죽은 그 일본인의 정신을 밝히지 않는다면, 일본은 곧 전쟁에 다시 이를 것이다. 영화로 치유를 하기 위한 실험을 하기는 너무 늦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다른 할 일이 없기에 조용히 영화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국가가 소멸할 날을 먼 후일을 꿈꾸며.” 오시마에겐 영화보다 삶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사무라이, 질풍노도의 60년대를 통과한 힘

<도쿄전후비사>

오시마 나기사의 60년대 영화들은 노한 사무라이의 칼부림 같았다. 일본 뉴웨이브의 도래를 알린 <청춘잔혹이야기>는 그의 영화 중에는 얌전한 편인데도 보는 사람의 느린 맥박을 허용하지 않는다. 집 나온 청춘남녀의 연애와 일탈이라는 소재는 이 시기 동서양 청춘물의 단골 메뉴지만, 오시마는 급진적 정치 논평과 실존적 비애를 깊이 묻어둠으로써, 청춘영화의 한계를 멀찍이 넘어선다. 문제의 <일본의 밤과 안개>에 이르면 오시마의 정치적 근본주의와 형식의 도발성은 폭발한다. 구좌파 신랑과 신좌파 신부의 조화로운 결혼식장이 한 청년의 난데없는 출현으로 정치토론장으로 변하는 과정을 통해 스탈리니즘의 몽매성이 여과없이 폭로되고, 카메라는 일본사회의 어둠을 긴 트래킹쇼트로 쫓는다. 이후 그가 내놓은 <교사형> <백주의 살인마> <신주쿠 도둑일기> <도쿄전후비사> 등은 60년대 일본 뉴웨이브의 탁월한 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오시마의 대표작들. 연극적 기법의 거리낌 없는 활용, 픽션과 다큐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실험성, 예민한 정치적 통찰이 그의 60년대 영화를 특징짓는다. <교사형>은 일본 뉴웨이브의 모자람 없는 대표작으로 인용되고, 노엘 버치는 <백주의 살인마>를 에이젠시테인의 <10월>에 비견되는 걸작 몽타주 영화로 상찬했으며, <도쿄전후비사>는 전위영화의 교과서마다 빠지지 않는 전범이 되었다.

한국에서 개봉한 오시마의 첫 영화 <감각의 제국>은, 하드코어 포르노와 예술영화의 첫 만남이라는 연대기적 의의로 더 유명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중대한 분기점에 놓인 작품이다. 일본대·도쿄대 투쟁의 패퇴, 그리고 신좌파의 잔혹한 린치살해사건(아사누마 산장사건)이 일어난 60년대 말 70년대 초를 거치면서 오시마는 더이상 불굴의 전사가 아니었다. “아무리 체제가 변해도 밑바닥 인생은 변하지 않는다.” “일본사회가 싫증났다. 이제 국제 무대에서 일하고 싶다”며 약한 모습을 보이더니 정치적 긴장을 놓기 시작했다. <감각의 제국>은 그의 소원대로 프랑스 자본을 빌려 만든 국제적 프로젝트였다. 오시마 스스로는 “두 남녀의 섹스는 사회적 속박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필연적인 충동”이라며 영화의 사회성을 강변했지만, 또 많은 서구 평론가들이 남녀주인공의 자기파괴적 성애에서 전복적 성정치학을 읽었지만, 여기엔 오시마 특유의 정치적 긴장 대신 탐미적 장식이 들어서 있다. 남자주인공이 거리를 행진하는 군대를 피하듯 외면한 채 골방에서 죽음 같은 섹스에 몰두하는 모습에선 출구없는 허무에 빠진 감독 자신의 비감한 시선이 느껴진다.

비상과 추락을 오가며 신화적 명성은 계속된다

<고하토>

이후 그의 행로는 노성(老成)은 물론 달관의 길도 아니었다. 오히려 데이비드 톰슨의 말대로 국제성을 획득하려다 자신의 뿌리를 잃고만 불운한 코스모폴리턴의 공허한 제스처만 남았다. 2년 뒤에 만든 <열정의 제국>은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긴 했지만 전작의 모티브를 그대로 빌어온 안일한 기획이었다. 일본군의 포로수용에서의 서양인과 일본인의 심리적 갈등을 다룬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는 일본인의 전근대적 심성을 공격하는 듯 하지만 이야기와 캐릭터의 허술함을 채워줄 별다른 형식적 미덕이 없는 태작이었다. 이 작품은 1983년 칸영화제에서 뉴웨이브 동료였던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에 황금종려상을 뺏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침팬지와 한 외교관 부인의 미묘한 애정을 다룬 <막스 내 사랑>에 오면 오시마는 어떤 미학적·정치적 긴장도 보여주지 않는다.

한 감독의 생애에서 오시마만큼 격한 조락을 보이는 경우도 흔치 않다. 오시마는 시대의 변화에 너무 민감했다. 그의 경이로운 미학적 에너지는 정치적 전선의 소멸과 함께 증발해버렸다. 그럼에도 그의 신화적 명성은 빛바래지 않았다. 뒤늦게 그의 60년대 작품들이 정치영화의 전범으로 평가되면서 오시마의 필모그래피에는 더욱 많은 조명이 쏟아졌다. 1995년 영화 100주년 기념으로 영국영화협회(BFI)가 기획한 영화 100년 다큐멘터리의 일본편은 다름 아닌 오시마에게 맡겨졌다. 지난해 오시마 나기사는 <막스 내 사랑> 이후 13년 만에, 그것도 뇌졸중의 시련을 딛고 <고하토>를 완성했다. 세계영화계는 오시마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베를린영화제는 <고하토>를 초청하기 위해서 물밑 교섭을 열심히 벌였지만, 오시마는 결국 칸을 택했다. 최선의 경우라면, 2000년의 칸은 오시마 나기사의 부활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값진 축제가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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