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의 깊이와 판화의 감각적이고 억센 힘이 공존하는 곳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핀스크린애니메이션이 바로 그것이다. 이 낯선 애니메이션의 세계적인 대가로 인정받고 있는 자크 드루앵 특별전이 한국독립애니메이션상영전과 함께 오는 5월30일부터 6월30일까지 중앙시네마에서 열린다. ‘애니광 구출! 상영작전’이라는 이름의 이번 상영전은 지난 1월부터 (주)라바메이저(rabamajor.com)와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kiafa.org)가 시작한 독립단편애니메이션 정기상영회의 네 번째 행사. 국내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들었던 자크 드루앵의 핀스크린애니메이션 다섯 작품과 한국 독립애니메이션 일곱 작품이 하루씩 번갈아가며 선보이게 된다.
핀스크린애니메이션은 본래 러시아 출신의 애니메이터 알렉산더 알렉세예프(Alexandr Alexeieff)와 그의 동료이자 아내 클레어 파커(Claire Parker)가 함께 고안한 기법이다. 자크 드루앵은 이들이 캐나다국립영화제작소(NFB)와 교류하는 동안, 핀스크린애니메이션 기법을 전수받아 현재 이 분야의 대가(master)로 불리며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잡았다. 자크 드루앵이 이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로 불리는 이유 중에는 재미있게도 현재 그 자신 외에 핀스크린애니메이션 작품을 발표하는 이가 없다는 점도 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이 작업을 하는 애니메이터는 손에 꼽을 만큼 수가 적다. 그들의 수가 많지 않은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그 작업방식의 까다로움. 한 프레임씩 신경써야 하는 다른 애니메이션 작업들 역시 쉬울 리 없겠지만, 핀스크린애니메이션의 경우 다른 애니메이션 작업방식보다 좀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 이유는 핀스크린애니메이션 제작방식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핀스크린애니메이션의 핵심이 되는 핀스크린은 A3나 그 이상 크기의 흰색 판자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꽂힌 수많은 검은 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검은 핀들은 흰색 판자에 뚫린 구멍 사이에 꽂혀 있어 상하로 움직일 수 있는데, 이들이 스크린 위에 솟은 정도에 의해 흑백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쉽게 이해가지 않는다면 70, 80년대 신문지에 말아 보관하던 건조된 국수면 묶음을 떠올려보자. 신문지 같은 큰 종이에 둘둘 말린 빼곡한 건조 국수면 묶음. 이 묶음을 옆에서 젓가락으로 눌러본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다음 프레임 촬영을 위해 이미지를 수정하거나 지우고 싶다면, 반대쪽 스크린으로 밀려나온 핀들을 다시 누르면 자연스레 이미지는 지워진다. 물론, 핀스크린에 세워진 핀을 직각으로 위에서 보게 되면 이미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약간 비스듬히 옆에서 봐야만, 흰 바탕 위에 올라온 핀들이 마치 도트와 같은 역할을 하며 이미지를 구성하게 된다. 길게 올라온 핀일수록 검은 화소를 많이 갖게 되며, 전혀 올라오지 않은 핀은 흰 점을, 약간 올라온 핀은 약간의 검은 화소를 띠게 된다.
엄청나게 번거로운 작업이지만, 핀을 누르는 힘의 강약에 따른 농담 변화와 선의 터치가 프레임마다 살아 있다는 점은 핀스크린애니메이션 작업의 불편함마저 잊게 만든다. 생동감을 유지하며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자크 드루앵의 작품들에는 신비감을 느낄 정도의 매력마저 느끼게 된다. 특히 <Mindscape>에서 보여준 반복된 컷인 연출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애니메이션에서 사용되는 핀스크린 기법은 이러한 핀스크린의 특성에 빛(조명)을 더한다. 비스듬히 핀스크린을 비추는 카메라의 각도(물론 대부분의 경우 이 각도는 고정되어 있다), 핀스크린을 비추는 조명의 세기와 기울기 등에 의해 핀스크린에 나타난 이미지는 회화나 다른 그림애니메이션(Drawn Animation)류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깊이를 지니게 된다.
빛의 사용! 이것은 자크 드루앵의 이름을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전에는 흑과 백, 단순히 조명의 흰(?) 빛과 어둠뿐이었던 핀스크린애니메이션 작업에 자크 드루앵은 색채를 넣으며 독자적인 표현방식을 개발했다. 핀스크린을 비추는 조명에 셀로판지를 얹어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게 된 그는 조명 외에 프로젝터 등을 활용해 좀더 다양한 표현을 추구하게 된다. 그의 대표작 <Nightangel>(1986)은 이런 그의 실험방식이 멋지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핀스크린에 쏟아지는 원색의 빛은 그야말로 화려한 영상미를 자랑한다. 프로젝터를 통해 미리 촬영해둔 천사의 영상과 어우러진 핀스크린애니메이션은 그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영상을 선보였다.
그러나 자크 드루앵이 선보이는 핀스크린애니메이션은 <A hunting lesson>(2001)에서 그 한계를 드러낸다. 빛과 색채 사용에 성공한 그는 이 작품에서 음성에 도전했다. 대화와 내레이션을 사용하며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에 충실하려는 그의 시도는 결과적으로는 실패. 말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 자신조차 자신의 작품이 탐탁지 않았던 듯, 당분간 음성이 들어 있는 그의 애니메이션은 보기 힘들 것 같다. 이번 상영회에서는 볼 수 없지만, 그의 신작 <Empreintes>(2004)에서는 대화와 내레이션을 뺀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자신에게 적합한 표현방식은 역시 이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무렴 어떠랴? 그의 작품이 전하는 영상미는 여전히 강력하다!
자크 드루앵 특별전 & 한국독립애니메이션상영전
장소 중앙시네마 5관
관람료 4천원
관람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문의 02-776-9024(중앙시네마), 02-765-8312(라바메이저), www.jacinema.co.kr
자크 드루앵 섹션
<알렉세예프의 핀스크린 기법을 사용한 자크 드루앵의 세편의 습작>
핀스크린애니메이션의 화상 자체가 지닌 높은 회화적 완성도와 움직임을 조화하려는 자크 드루앵의 실험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곳에서 보여준 이미지간의 전환과 반복되는 컷인을 사용하는 그의 독특한 연출은 <Mindscape>에서 좀더 세련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음의 풍경>
아트록 장르의 앨범 재킷으로 봄직한 수많은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작품. 빛에 의한 명암의 표현, 컷과 컷 사이를 오가며 변화무쌍하게 변화하는 이미지들은 ‘핀스크린애니메이션의 매력은 이런 것이다!’를 조용히 외치고 있다. 자연 풍경을 그리던 중 캔버스를 매개로 자신의 내면 세계로 빠져버린 화가. 그가 자신의 내면을 이루는 중심점을 찾고, 내면 세계에서 벗어나기까지의 과정이 7분 남짓한 시간 속에 빠르게 진행된다.
<밤의 천사>
핀스크린애니메이션에서 최초로 컬러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핀스크린애니메이션이나 자크 드루앵을 말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작품. 세계적인 인형애니메이션의 대가로 알려진 체코의 애니메이터 브제티슬라브 포야르와 공동으로 작업했다. 핀스크린과 인형애니메이션이 멋진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데, 원색의 빛을 사용하여 화면 전체에 부여하는 환상적인 느낌이 일품. 무엇보다 주인공이 시력을 잃은 뒤 보여준 두 감독의 연출은 이 작품의 백미다.
<사냥 수업>
소설가이자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자이기도 한 자크 고드브(Jacques Godbout)의 소설을 원작으로, 새롭게 각본을 쓴 작품. 전작인 <Nightangel>에 비해 컬러와 표현이 풍부해졌지만, 그 어디에도 신선함을 찾을 수 없다. 유려해진 영상에 비해 작품으로서 지닌 매력은 다른 작품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대사와 내레이션 활용 등으로 좀더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었지만, 되레 작품의 의도가 불분명해지고 초점이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남는다.
한국 애니메이션 섹션
<눈안의 세계>
자크 드루앵이 <Nightangel>에서 보여준 시력을 잃은 뒤의 연출이 인상 깊었다면, 이 작품은 어떨까? 시력이 약해진 한 남자의 심리 변화와 그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포착해내는 감독의 연출이 인상적이다. 한편의 스릴러를 보는 듯, 담담하게 전하는 남자의 내레이션과 음악이 멋지게 어울린다.
<멍>
계원조형예술대 출신의 곽경윤, 김민규, 김영진, 김혜숙, 박진아, 전승훈의 공동연출작. 탄탄한 호흡과 화면 분할, 그리고 멋진 개그 센스가 빛나는 작품. 쇠사슬에 갇혀 있던 식용견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던 애완견. 행복해만 보이던 애완견의 삶을 따라 정신없이 웃으며 즐기다보면, 어느새 기억 속에 사라진 식용견의 모습이 떠오른다. 웃음 속에 전하는 그들의 메시지, 그리고 그 놀라운 기교에 감탄사가 나오는 작품. 얼마 전 애니마문디2005(제13회 브라질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국제경쟁부문 초청작으로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