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연애 ‘선수’들의 수다, <연애의 목적>의 박해일+강혜정 [2]
2005-06-02
사진 : 오계옥
정리 : 이영진
정리 : 오정연

I 미혹(迷惑)

유림: 우리 같이 자요.
홍: 왜 그러세요, 이 선생님.
…(중략)…
홍: 처음 만난 여자들한테 다 그래요?
유림: 아니오. 맘에 들고 좋아야 그러죠.
(#19)

박해일 | 제목도 그리 특이하지 않고, 그냥 무심코 읽었어. 방바닥에 누워서. 그때 맥주 한잔 까면서 봤나? 그렇게 보는데 유림이라는 캐릭터가 골때리더라고. 만화책 보듯이 그냥 헤헤거리면서 넘어갔어. 남녀관계를 푸는 게 신선했지. 옆집 남녀가 사랑하는 걸 훔쳐보는 것 같은 사실적인 느낌도 있었고.

강혜정 | 누가 시나리오 재밌다고 해서 받아서 읽는데, 난 ‘어쭈’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박해일 | 어쭈, 내 건데? 그런 건가? (웃음)

강혜정 | 어쭈, 읽히는데, 이러면 곤란해, 이러면서 읽었지. (웃음) 이 시나리오가 여태까지의 남녀 연애담처럼 친절한 기운이 하나도 없잖아. 불쾌할 정도로 친절하지가 않지. 근데 난 그런 거 좋아하거든. 예뻐 보이려고 치장하지 않고, 따뜻해 보이려고 뭔가 주지도 않고. 있을 법한 이야기를 남들 안 하는 형식으로 풀어내는 게 흥미롭던데. 라이브하다는 것도 그거야. 처음엔 그저 빨리 읽혔고, 읽다보니 이게 말이 되네, 그런 거지. 거창한 얘기도 없고, 어떤 철학도 없는데 근사했어. 그러던 참에 매니저는 이미 감독에게 부탁을 했고, 감독이 시나리오를 주고 싶었다고 해서 잘됐다고 했지.

박해일 | 그런데 읽고 나니까 ‘박해일 너, 잘할 수 있겠어’ 싶더라. 그때부터 나 자신과 인터뷰를 했지. 조금 자신이 없더라고. 조금이 아니라 많이. 근데, ‘해일아, 방법은 있을 거야, 하고 싶다면. 해보자’ 한 거지. 그때 넌 이미 결정한 상태였고. 에이, 모르는 건, 좀 힘든 건, 감독님이랑 너랑 얘기하면서 풀어가보자. 자신감 반 숙제 반 가지고 들어간 거야. 그냥 끌리니까. 그냥 단지 느낌이 해보고 싶었으니까.

강혜정 | 시나리오 보면 좋은 캐릭터로 이입이 되잖아. 난 유림쪽으로 많이 들어가더라.

박해일 | 사실 너한테 유림 캐릭터가 있지. 내가 오히려 홍 같고. 감독님도 그랬잖아. 그 얘기 들으니까 영화 찍기 싫더라니까. (웃음)

강혜정 | 감독님이 우리에 대한 신뢰가 없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

박해일 | 난 그래도 너랑 해보고 싶었거든.

강혜정 | 오빠 처음 봤을 때가 아마 <살인의 추억>을 본 다음이었을 텐데. 조용한데 파괴력이 있다 뭐 그렇게 느꼈던 것 같아. 시나리오 보면서도 속으로 해일 오빠가 했으면 좋겠다 했지.

박해일 | 처음엔 변태라 느꼈다 이거지. (조)승우 처음 봤을 땐 어땠니?

강혜정 | ….

Ⅱ 탐색(探索)

유림: 내가 한번이라도 선배 대접 받으려고 무게잡은 적 있어요?
…(중략)…
홍: 그러니까 나한테 찝적대지 마.
유림: (당황하며) 아니, 최 선생님,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찝적댄 게 아니라….
홍: 경고예요, 앞으로 나한테 손대지 마.
…(중략)
유림: 최 선생님을 좋아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좋아서…. 왜 그렇게 사람 마음을 몰라줘요?
(#46)


강혜정 | 가끔 오빠 속을 알 수 없을 때가 있었지. 처음엔 대단한 고민을 하고 있나보다 했는데 나한테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했잖아, 너도 그럴 때 있지 않느냐면서.

박해일 | 나, 홍이라니까.

강혜정 | 홍이 갖고 있는 개성 중 하나가 내가 어떠한 것에 반응하고 싶지 않을 때나 반응하기에는 너무 혼란스러울 때 아무것도 안 하지. 그러기 위해선 자신에게 솔직해야 하고 용기도 필요한데. 난, 그만큼의 용기는 없어.

박해일 | 예민한 데가 있긴 해. 가끔 현장에서 쥐죽은 듯 앉아서 생각하기도 하고. 너도 집에선 그렇다면서. 내가 유림 같은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홍처럼 방어를 하는 건 아니야. 그냥 생각이 많아지는 거지.

강혜정 | 연애영화를 찍으니까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기복이 심해지지만, 오빤 심했지. 아마 모를 텐데 오빠 별명이 뭔지 알아? 박기복이야. 박기복.

박해일 | 나중에 나도 그런 내가 재수없더라니까. 그래서 (혼잣말로) 어후∼유림이 너 때문에 영화 찍기가 엄청 힘들잖아 그랬어. 유림이라는 캐릭터가 워낙 일관되지 않고 기복이 심하다보니까 나도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더라고. 답 안 나올 때 너 보면 너도 고민하고 있는 것 같고.

강혜정 | 그래도 현장에서 내가 상대를 지나치게 배려하거나 지나치게 나를 과소평가할 때 와서 툭 건드리면서 ‘야, 그냥 자유롭게 놀아, 그러면 돼’ 그랬잖아. 의지가 많이 됐지. 전에 민식 선배님이나 지태 오빠처럼. 내가 내 손목에 수갑 채워놓고 있는데, 곁에 와서 열쇠를 틱 하고 던져주기도 하고.

박해일 | 나도 답없어, 야야야 혼자 찾으려고 하지 마, 그런 뜻에서 그런 건데.

강혜정 | 에∼ 거짓말.

Ⅲ 공감(共感)

유림: 사람 많은 거 별로 안 좋아하나봐요.
홍: 네, 좀…. 사람 많은데 가면 막 불안하고 손이 떨려서 뭐 잘 못 먹어요.
…(중략)
유림: 저도 그래요. 많이 나아졌는데 저 사실 비행기도 못 타요. 꼭 죽을 것만 같아요.
홍: 난 지하철 타면 그렇던데.
유림: 우리 언제 한번 정신병원이나 갈래요?
(#56)


박해일 | 초반에는 정말 불안했지. 프롤로그 다음 장면, 그러니까 나이 물어보는 장면은 나중에 재촬영한 거잖아. 사실 이 영화가 조금만 틀어져도 개기름이 쫙 흐를 수 있는데, 계속 귀엽고 쾌활한 구석을 유지해야 한다거나 여러 가지 숙제들이 많이 생기더라니까. 초반엔 이거 언제 다 찍나 싶었고, NG도 많이 내고. 주위에선 필름 많이 쓴다고 압박도 오고. 너한테 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 혼자 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인 거고. 너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강혜정 | 나도 초반에 왜 내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걸 (감독이) 못하게 하나, 돌아버릴 정도로 답답했지. 홍 같은 경우는 사실 과거가 드러나기 전까지 무슨 생각하는지 잘 모르는 인물이잖아. 그래서 가늠할 수가 없어서 감독님 어떻게 해야 돼요, 하면 그냥 사실적이었으면 좋겠다 하셨으니까. 그 때마다 여자인 고(윤희) 작가님한테 간 거지. 감독님은 이런데, 작가님은 어떻게 쓴 거냐? 내 말이 맞죠? 그러면 내 편 들어주시고.

박해일 | 그때마다 감독님이 긴장하셨지. (웃음) 일단 그럼 한번 볼까요, 그러시면서. 그래서 내가 촬영할 때 감독님 옆에 작가님 모셔놓고 하라고 농담했잖아. 감독님은 남자이고, 아무래도 유림의 입장에서 영화를 파악할 거고. 그런 점에서 홍의 캐릭터를 열어놓고 가기가 좀 그랬을 것이고. 나보다 네가 부담감이 있었겠지. 유림 혹은 감독님이 보고 싶어하는 홍인 거니까.

강혜정 | 근데 신기한 건 억눌렀던 감정들이 나중에 도움이 되는 거야. 감독님이 혼란스럽다면 혼란 그 자체를 보여주라고 했었는데 그걸 알면서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 작가님에게 갔더니 여자들조차 무시하고 싶어하는 감정이라고 하더라고. 홍은 센 척하지만 상대보다 우위에 있고 싶어하지만 사실 바보잖아. 쳐내고, 자르면서도 자기가 결국엔 상처받는. 힘없는 맹수 같은. 그걸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거지. 촬영 중반에 소각장 장면 찍을 땐 그래도 짜릿하더라. 모험가처럼 감독님하고 우리가 뭔가를 하고 있구나. 서로 에너지 싸움도 심했던 촬영이었지만.

박해일 | 같이 연구했다 둘 다 삼천포로 빠진 장면이지. 다소 오버톤으로 대사 쳤다가 캐릭터가 깨진다는 걸 알게 됐고, 그래서 테이크를 여러 번 갔지. 날씨도 되게 추웠는데. (웃음) 난 그냥 유림이 A형이라고만 생각했어. 감독님이 A형이거든. 유림은 감독님이 모델이다, 그렇게 믿자. <인어공주> 때도 진국 같은 박흥식 감독님하고 닮아 있다고 생각하고 했고. <살인의 추억> 때는 감독님한테 내가 범인이에요, 라고 물어봤는데 대답이 없어서 그래 난 범인이 아닌 걸로 하자 그랬고. 어쨌든 정하고 났더니 오케이가 금방 나더라고.

강혜정 | 홍과 유림은 보면 다른 것 같지만 사실 같은 사람인 것 같아. 둘 다 무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박해일 | 유림은 집에 가면 아동용 게임이나 즐기는 고립된 친구이고. 홍은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나고. 둘 다 안정적인 친구들이 아닌 거지.

Ⅳ 연애(戀愛)

홍: 이 선생님 이러면 여자친구한테 안 미안해요?
유림: 그러게 내가 최 선생님한테 결혼하자 그랬어요? 연애만 하자고요. 연애가 다른 게 아니에요… (중략)…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즐기면 되잖아요.
홍: 그럼 여자친구 허락받고 와요.
(#61)


강혜정 | 사람 감정이라는 게 끌리는 것과 거부하는 것과 동시에 존재할 수 있잖아. 관객은 홍의 심리가 뭘까 싶을 거야. 쟤네는 정말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 거야 혼란도 들 테고.

박해일 | 유림도 저돌적이지만 행동하면서도 끝없이 고민하거든. 홍이 좋긴 한데 그런 싸늘한 반응을 접할 땐 그만둘까 갈등도 하게 되고, 또 과거에 대해 알게 됐을 때도 그랬을 테고. 누군가를 좋아하다가 갑자기 옛 애인이 생각나는 것처럼 말이지. 물론 영화 속 유림한테서 그걸 보기가 쉽지 않지. 왜냐하면 행동을 하고 있으니까. 힌트라면 담배를 수시로 피워댄다는 거 정도가 아닐까. 끊임없이 불안한 거지. 엄마 젖 만지면서 안정감을 찾고 싶어하는 아이처럼.

강혜정 | 그런 점에서 순수하긴 해. 유림은.

박해일 | 잘 모르겠어. 유림이 순수한지, 아니면 계산적인 바람둥이인지는. 사실 머릿속에 진실만이 있는 건 아니고 거짓말도 있고 하니까. 유림 같은 경우도 순진한 구석이 있지만 순진하다고 단정할 순 없거든. 연인관계가, 사람관계가 그런 거잖아. 홍이 아는 유림도 순간마다 달라지는데, 그게 이 영화를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게 아닐까 싶어.

강혜정 | 남자나 여자가 모두 자신에게 결핍된 것에 이끌리고, 또 그런 것을 갖춘 이성에 대한 판타지가 있잖아. 그게 서로에게 보이면 특별히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끌리는 거지. 그런 점에서 유림과 홍이 언제 어떻게 끌리는지 영화 속에서 시점을 꼭 집어내긴 어려울 것 같아. 두 사람 모두 비슷한 때에 호감을 갖게 됐겠지만, 어차피 주관적인 감정이니까.

박해일 | 연애는 이런 거다, 그런 연애 지침서 영화는 아닌 것 같아. 네가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연애는 성장이라고 했는데 유림이나 홍도 마지막에 그렇잖아. 예고편만 보고 마냥 귀여운 영화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겐 다소 어두운 영화일 수 있겠지만, 관객이 유림이나 홍이 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만들어놓은 영화라는 점에서 만족스러워. 아까 차승재 대표님이 우리에게 청소년 대표라고 했잖아. 센스가 있으셔. 국가대표는 어떤 기간 내에 승부를 봐야 하는데 청소년 대표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고 짱짱하지. <연애의 목적>은 나한텐 음식 골고루 먹어라 그랬던 영화 같아. 나중에 컸을 때 원하는 연기할 수 있도록 자양분을 얻게 해준 것 같기도 하고.

강혜정 | 진짜 화술가다. 가끔 말을 살짝 더듬어서 그렇지. (웃음)

박해일 | 아무리 그래도 내가 승우보다 낫겠어? 그 노인네, 그거….

장소협조 스토리바 모놀 박해일 헤어 정준(라 뷰티코아)·메이크업 나니(라 뷰티코아)·스타일리스트 이민형, 구은선·의상협찬 휴고 보스 강혜정 헤어 서언미(뮤제)·메이크업 김수희(뮤제)·스타일리스트 김재아·의상협찬 로베르토 까발리, 셀린, 오브제, 레이카라테레, 수콤마보니, 제이에스티나, 블루마린, 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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