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스타워즈>가 완결편을 내고 화려하게 퇴장하는 이즈음, ‘우린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라고 외친 시리즈가 있다. 팀 버튼과 조엘 슈마허의 손끝에서 모두 네편의 에피소드를 풀어냈던 <배트맨> 시리즈는 태초의 진공으로 돌아가, 이제 어떻게 배트맨이 탄생하고 진화하게 됐는지를 이야기할 참이다. 그 영화 <배트맨 비긴즈>에서 배트맨 월드의 창세기를 빚어낸 이는 <메멘토> <인썸니아>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엑스맨>의 브라이언 싱어와 <스파이더 맨>의 샘 레이미에 이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 수혈된 독립영화계의 젊은 스타 놀란은 자신의 전작들과 친연성이 없어 보이는 <배트맨 비긴즈>에 어떻게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녹여넣었을까? 그가 만든 <배트맨 비긴즈>는 시리즈의 이전 작품들과 어떻게 다른지, 어떤 비주얼 컨셉으로 태어났는지를 이야기해본다. 또한 5월30일 <배트맨 비긴즈>의 월드 프리미어에 앞서 감독과 배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도쿄 기자회견 내용을 지상중계한다. 이제 <배트맨 비긴즈>의 예습을 시작할 때다.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과 로빈>에 실망했더라도, 팀 버튼의 <배트맨>에 매혹됐던 전력이 있다면 결코 <배트맨 비긴즈>를 외면할 수 없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의 탄생신화를 담고 있다. 팀 버튼의 <배트맨>에서 부모를 살해한 악당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배트맨이 되었다고 잠깐 이야기가 비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런 이유만으로 배트맨이 된다면, 돈이 많은 범죄의 피해자는 모두 배트맨이 되었을 것이다. <배트맨2>에서 보여준 펭귄맨과 캣우먼의 탄생비화와 비교해보아도, 배트맨의 탄생신화는 너무나 소홀하게 다루어졌다. 팀 버튼의 의도는 그러했지만, 배트맨이란 반영웅에 매혹된 관객이라면 <배트맨 비긴즈>를 기다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한 어두운 슈퍼히어로의 탄생신화
한때 열광했던 슈퍼히어로의 전사(前史)를 탐구하는 기쁨은 남다르다. 게다가 배트맨은 보통의 슈퍼히어로와는 다르다. 데어데블과 스파이더 맨, 판타스틱 포는 일종의 사고 때문에 우연히 초능력을 갖게 된다. 캣우먼은 고양이의 신비한 힘으로 부활한다. 스폰이나 크로우도 지옥에서 돌아온 전사들이다. 엑스맨은 유전자 이상으로 생겨난 새로운 인류다. 슈퍼히어로들은 저마다 독특한 탄생의 이유와 곡절을 지니고 있다. 브라이언 싱어가 <엑스맨> 도입부에 나치의 인종차별 장면을 집어넣고, 샘 레이미가 <스파이더 맨>에서 파커의 인간적 고뇌에 눈을 돌리는 이유는, 슈퍼히어로의 거대한 능력 이면에는 언제나 치열한 어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리안이 <헐크>에서 주력했던 것도 그런 어둠이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힘은 태생부터 저주받은 것이다. 슈퍼히어로의 탄생은 어떤 축복인 동시에 거역할 수 없는 사명이며 저주다. 가장 흥미로운 프리퀼의 하나는 미국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끈 TV시리즈 <스몰빌>이다. 극장판으로 만들어진 <슈퍼맨>을 보면 클립톤 행성에서 온 슈퍼맨에게는 별다른 고뇌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하기 때문에 느끼는 아쉬움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이 외톨이라는 것. 하지만 슈퍼히어로의 탄생신화를 청춘극과 결합시킨 <스몰빌>은 슈퍼맨의 성장과정이 어떠했는지,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필생의 숙적인 렉스 루서가 왜 그토록 슈퍼맨을 미워하는지도 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갈등을 미리 심어놓는다. 영화와는 달리, 슈퍼맨의 아버지가 그에게 부여한 임무는 지구를 정복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슈퍼맨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지구에서 친구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배트맨 비긴즈>에 기대하는 것도, 그런 의미심장한 탄생신화다. 그냥 복수심 때문이라면, 굳이 프리퀼이 필요없다. 배트맨 정도의 영웅이라면 뭔가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 이미 전작들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들도 꽤 있다. 브루스 웨인의 부모는 악당이 쏜 총에 살해되었다. 웨인은 재벌 가문의 외동아들인 덕에 다양한 무술을 배우고, 값비싼 첨단 무기를 이용하여 배트맨으로 변신한다. 굳이 ‘배트맨’인 이유는, 어릴 때 박쥐를 무서워했던 기억 때문이다. 이 정도만으로도 배트맨의 액션을 즐기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배트맨을 이해하기는 좀 힘들었다.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는 사실 악역인 조커와 펭귄맨 그리고 캣우먼에게 더욱 비중을 두었다. 배트맨은 단지 그들의 거울로서 존재했다. 가면을 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악당들의 존재 없이는 살아갈 가치가 없는 어떤 존재로서.
초능력이 없는 한 인간의 자본주의적 성공
배트맨이란 인물은 보통의 슈퍼히어로와는 달리 초능력이 없다. 누군가에게 세계를 구원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정의감 혹은 복수심 때문에 배트맨이 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데어데블과는 또 다르다. 헬스키친에서 자라난 데어데블은 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데어데블은 악과 싸우기 위해, 기꺼이 악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트맨은 다르다. 배트맨은 데어데블에 비한다면 고전적인 영웅이다. 배트맨에게 존재하는 것은 오히려 햄릿의 고뇌다. 사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싶다. 배트맨이 어떤 고민을 거치면서 강인한 슈퍼히어로로 변신했는지를. 그것은 일종의 창세신화인 동시에, 자본주의적인 성공 신화다.
의사였던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는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이상주의자였다. 고담 시민을 위하여 값싼 전철을 만들고, 갖가지 복지사업을 벌인다. 하지만 그들은 처참하게도, 그들이 구원하려 했던 빈민이 쏜 총에 맞아 숨진다. 브루스 웨인은 분노에 사로잡힌다. 어이없게 부모를 살해한 범인이 죽어버린 뒤, 브루스 웨인은 갈팡질팡한다. 부모를 죽인 범인에게 복수할 수는 없고, 아니 복수한다 해도 너무나 치졸하다. 그가 미워해야 할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의 분노로는, 그의 힘으로는, 모든 범죄자를 응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브루스 웨인은 아무도 모르게 집을 떠나 전세계를 방황하면서 범죄에 가담하기도 하고, 이유없는 싸움을 하기도 한다. 브루스 웨인은 히말라야에서 헨리 듀커드를 만나고, 라스알굴이 이끄는 자객단에 들어간다. 세상의 모든 악을 뿌리뽑기 위하여.
우직한 배트맨, SF영화 같은 리얼리티
배트맨의 딜레마는, 이미 팀 버튼의 <배트맨>에서 충분히 보았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과연 정의인지, 복수인지 헷갈려 한다. 어쩌면 단순한 자기만족일 수도 있다.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배트맨의 딜레마를 악역에게 투사한다. 라스알굴과 듀커드는 세상의 모든 악을 말살시키겠다는 인물이다. 그들이 힘을 기르는 이유는, 악과 싸우기 위해서다. 하지만 정의의 왕국을 세우겠다는 독재자들이 흔히 그랬듯이, 라스알굴 역시 폭정과 억압의 지배자일 뿐이다. 타락한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세계를 정화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정의의 신이었던 아수라에게 두 얼굴이 생긴 것처럼, 악에 대한 지나친 미움과 열정은 새로운 악을 낳는 것이다. 코믹판에서도 브루스 웨인이 부상한 틈에 대신 배트맨의 역할을 했던 이가 지나친 정의의 구현으로 물의를 빚은 적도 있었다.
<씬 시티>의 프랭크 밀러와 <워치맨>의 앨런 무어가 주도했던 80년대 미국의 코믹스 혁명의 영향으로 팀 버튼의 <배트맨>이 나온 이후, <엑스맨> <스파이더 맨> <헐크>가 보여준 것처럼 고뇌하는 슈퍼히어로는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프랭크 밀러가 창조한 배트맨은 그런 정의를 믿지 않는다. 새로운 배트맨은 거리의 악당이 아니라, 위선적인 정부와 맞서 싸워야 했다. 세상의 모든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거리의 악당들을 잡아넣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그리고 슈퍼히어로는 현실 속으로 들어와, 악당만이 아니라 일상의 무게와도 싸워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메멘토>의 크리스토퍼 놀란이 새롭게 그려낸 배트맨은 어떤 형상일까? 크리스토퍼 놀란은 우직스러울 정도로 정통적인 배트맨을 그려낸다. 팀 버튼의 포스트모던한 초현실주의 공간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현실세계의 진화형으로 모습을 바꾼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스탭한테 <블레이드 러너>를 보여주었다는 일설처럼, <배트맨 비긴즈>는 현란한 코믹스의 풍경이 아니라 SF영화처럼 굳건한 리얼리티를 구현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특유의 액션 누아르 스타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기발한 누아르영화 <메멘토>로 일약 스타 감독이 되었다. 시간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틀어 전혀 새로운 영상체험을 가능하게 했던 <메멘토>. 하지만 다시 한번 <메멘토>를 되짚어보자. <메멘토>의 무엇이 그리 혁신적이었던가. 각 장면들을 들여다보면 <메멘토>는 대단히 정통적인 스타일의 누아르였다.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의 트릭이 기발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잔재주를 피우지 않았다. 다만 기발한 편집의 묘미로, <메멘토>는 전혀 색다른 영화로 탄생한 것이다. <인썸니아>를 보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스타일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죄의식에 사로잡힌 영웅이었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가슴 한구석에 회의와 불안의 핏자국을 남긴 비극적인 영웅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일관된 스타일은 <배트맨 비긴즈>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배트맨 비긴즈>는 현대적인 슈퍼히어로의 캐릭터를 고수하면서, 전통적인 액션 스타일로 돌아간다. 늘씬한 배트카가 묵중한 ‘탱크’처럼 바뀐 것처럼, <배트맨 비긴즈>는 정면돌파를 택한다. 악당들과 싸우기 위해서 약간의 쇼는 필요하지만, 배트맨이 싸우는 방식은 무협영화의 무사들과 다르지 않다. 오로지 자신의 육체를 이용하여 악당들과 맞서 싸운다.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배트맨: 이어 원>을 만들었다면 지극히 현란한 배트맨이 탄생했겠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는 전통적인 누아르의 스타일을 따라간다. 고전적인 누아르의 풍경이 고스란히 만화 속으로 옮겨진 듯한 스타일. 배트맨이라는 슈퍼히어로가 등장하지만, 그가 가면을 뒤집어쓰건 말건 모든 것은 사실적인 터치로 섬세하게 다듬어져 있다. 그리고 강력하다. 조엘 슈마허가 선보였던 휘황찬란한 불꽃놀이가 아니라, 도시의 갱들이 본격적으로 벌이는 전쟁처럼 묵직하다. 그것은 배트맨의 기원과도 맞닿아 있는 설정이다. 배트맨은 어두운 회색의 거리를 장악한 범죄자들과의 전쟁을 감행한 영웅인 것이다.
배트맨의 시작을 추적한, 잘 만든 오락영화
전통적인 영웅의 풍모와는 다르지만 분열적이었던 팀 버튼의 마이클 키튼, 섹시하고 유머러스한 007에게 가면을 뒤집어씌운 조엘 슈마허의 조지 클루니에 이어 크리스토퍼 놀란이 택한 크리스천 베일은 냉담한 듯하면서도 강인한 배트맨 캐릭터를 보여준다. 배트맨은 비현실적인 악당들과 싸우는 영웅이 아니라, 현대의 사악한 지능범들과 맞서 싸우는 에이전트에 더욱 가까운 캐릭터다. 언제든지 백만장자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지만, 결코 ‘다크 나이트’를 포기할 수 없는 진정한 영웅. 배트맨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우리와 똑같은 보통 사람의 이상형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쓰면서도 폭력에 취하지 않고, 막대한 돈과 명예에도 중독되지 않는 이상주의자. 이상주의자의 수단이 폭력이라는 것이 아이러니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배트맨의 두개의 얼굴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충실하게 보여주는, 뛰어난 오락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