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만들어야 했다”
도쿄 롯폰기에서 열린 <배트맨 비긴즈> 배우·제작진 기자회견
여름 장마를 방불케 하는 굵은 빗줄기가 내리치던 5월30일의 도쿄. 롯폰기의 그랜드 하얏트 호텔은 <배트맨 비긴즈>의 배우와 제작진을 만나려는 300명 가까운 취재진으로 들썩였다. 일본에서 할리우드영화의 대대적인 프리미어와 기자회견이 열리는 것은 아시아에서 가장 막강한 영화시장이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앞선 결정이겠지만, 일본 문화에 경도된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입김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적인 문화인 코믹북을 영화화한 <배트맨 비긴즈>의 월드 프리미어가 어째서 일본에서 열린 것인지 의아할 법한데, 굳이 이유를 찾자면 이런 거다. 배트맨의 기원을 찾아가는 <배트맨 비긴즈>에는 브루스 웨인이 마법사이자 무사인 라스 알굴(와타나베 겐)이 이끄는 자객단에서 ‘인간 병기’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 설정이 있는데, 할리우드로 진출한 일본 배우 와타나베 겐의 활약, 그리고 영화에 반영된 일본 문화의 요소들이 이들 배트맨 군단을 가장 먼저 일본으로 이끌었던 모양이다. 특급 스타가 출연하지 않는데다 역할의 비중을 고려해 가장 마지막으로(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게스트로) 소개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명 속에서 잊혀져가던 <배트맨> 시리즈의 부활을 책임진 만큼 내내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머시니스트>로 가죽만 남았던 몸에 금세 육중한 근육을 붙였다는 크리스천 베일은 영화에서보다 야윈 모습으로 나타나,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 거듭나기 위해 거친 고행을 짐작게 했다. 모건 프리먼은 농담을 섞은 유쾌한 답변으로 어색하고 경직된 기자회견장에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고, 언론에 호의적이지 않다고 알려진 리암 니슨도 (악당과 조력자라는 영화 속 캐릭터 대치 그대로) 프리먼과 소소하게 부딪치는 등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다. 최근 톰 크루즈의 연인으로 알려지면서 급부상하고 있는 케이티 홈즈는 아직 스포트라이트가 불편한 듯 수줍은 미소로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원래 모두들 <배트맨>의 팬이었나.
=찰스 로벤(제작자) | 어릴 때 코믹북을 좋아했고, 그 판타지 세계에 빠져 살았다. 내 어린 시절의 일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영화화되고, 크리스토퍼 놀란이 가세하면서, 무척 흥분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나더라.
=케이티 홈즈 | 코믹북은 잘 알지 못했고, TV시리즈를 보고 알았다. 모두가 사랑하는 영웅 배트맨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어서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와타나베 겐 | 배트맨은 내게도 영웅이었다. 일본에 없는 독특한 영웅의 이야기라 더욱 흥미진진했다.
=리암 니슨 | 소년 시절에 아일랜드에서도 <배트맨>은 인기였다. 하지만 내게 배트맨은 조금 무서운 존재였다. 초자연적인 능력이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런 활약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소름끼쳤던 것 같다. 내 소년 시절의 영웅은 슈퍼맨이었다.
=모건 프리먼 | 나는 다르다. 아주 어렸을 때는 배트맨이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슈퍼히어로인 줄 알았다. 나이가 들면서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난 그가 초인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에 좋았다. 그는 특수한 능력을 지니지도 않았고, 마법의 반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늘 자기 자신을 연마하고 노력할 뿐이다. 그렇게 악당들에 맞서 싸우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크리스천 베일 | 솔직히 코믹북의 팬은 아니었고, TV시리즈를 통해 배트맨을 알았다. 내겐 그가 셰익스피어처럼 고뇌에 찬 슈퍼히어로 같아서 흥미로웠다.
=크리스토퍼 놀란 | 다섯살 때인가, 처음 TV에서 <배트맨>을 보았던 걸로 기억한다. 배트맨은 슈퍼맨이나 제임스 본드처럼 어린 시절 내가 좋아한 영웅들 중 하나였다. 배트맨은 초인적인 능력이 없는, 평범하지만 다소 복잡한 인간이다. 분노나 복수심 같은 부정적인 충동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는 모습, 악에 맞서 싸우는 인간 영웅이라는 점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배트맨>의 프랜차이즈를 다시 시작하면서, 캐릭터 등의 요소들을 재창조하는 부담이 컸을 것 같다.
=크리스토퍼 놀란 | 팀 버튼의 <배트맨>은 시각적 상상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내가 코믹북이나 TV를 통해 알아온 배트맨의 모습은 아니었다. 이번 작품은 내가 알고 있고 또 보고 싶은 배트맨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전작들과는 아주 다른, 별개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전에 우리가 보지 못했던 배트맨의 캐릭터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작품의 어떤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출연하게 됐나.
=와타나베 겐 | 대개 영웅과 정의를 동일시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그뿐 아니라 어두우면서도 신사적인 느낌이 강했다. 어둡고 사악한, 부정적인 캐릭터의 분위기와 내면이 각본에 잘 나타나 있었다.
-연기할 때 이전 배트맨과 어떤 차별을 두었나. 당신이 해석하고 창조한 새로운 버전의 배트맨은 어떤 인물인가.
=크리스천 베일 | 전작에 출연한 배우들과 비교하고 그들을 넘어서야겠다고 생각했다면, 결코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작들을 다시 보거나 연기를 참조하지 않았다. 어차피 우린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만들어야 했다. 내가 참고한 것이 있다면, <배트맨: 영년> 같은 그래픽 노블이었다. 그 작품들 속에서도 배트맨이 되는 동기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과 정의 수호의 열망이 결합되면서, 배트맨으로 거듭나게 됐다고 판단했다. 영웅적인 면보다는 인간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배트맨 슈트를 입고 액션 연기를 하느라 고생이 심했을 것 같다.
=크리스천 베일 | 짐작하겠지만 온몸이 땀투성이가 된다. 그나마 멋과 기능을 고려해서 가볍게 만든 슈트를 입었기 때문에 몸놀림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모건의 역할인 폭스가 모든 아이템을 실용적으로 개발해주는 설정이 있어서 그렇게 고생스럽지는 않았지만, 7개월을 촬영하다보니 두통이 생겼고, 이걸 견뎌야 진짜 배트맨이 된다는 각오로 임했다. 그래도 역대 배트맨에 비해 덜 고생스러웠던 걸로 알고 있기 때문에 뭐라 불평을 할 수가 없다.
=리암 니슨 | 그 말을 듣고 보니 생각난다. 나와 크리스천이 전철 결투신을 찍을 때다. 처음에 배트맨 슈트를 입은 크리스천은 진짜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촬영이 진행되면서 장갑 틈 사이로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걸 보았다. 그런 악조건을 견디다니, 존경스러운 친구다. (웃음)
-유일한 여성 출연진으로서, 역할의 어떤 점에 끌렸는지 들려주었으면 한다.
=케이트 홈즈 | 내가 연기한 레이첼은 강하면서도 이상주의적인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배우로서 강한 여성을 연기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그녀와 브루스 웨인의 관계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브루스를 좋아하면서도 엄격하게 굴고, 배트맨이 된 그에게 도움을 받고 구원되기도 한다. 그런 입체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게 재밌었다.
-이번 역할을 선택한 이유와 역할에 대한 생각들이 궁금하다.
=리암 니슨 | 여태까지 단 한번도 악당 역할을 제안받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두번 생각하지 않고 수락했다. 나는 듀커드가 근본은 선량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처음엔 세상의 모든 악과 부패에 맞서 싸운다는 선의를 갖고 있었지만,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선데다 독불장군이 되어버린 게 문제였다.
=모건 프리먼 | 나는 메이저 블록버스터에 섭외된 적이 없었다. <배트맨> <스파이더 맨>, 이런 시리즈들에서 불러주질 않더라. 전에 내가 존경하는 배우 알렉 기네스가 <스타워즈>에 오비완 케노비로 출연했다가 큰돈을 벌었다는 얘길 듣고 부러워했는데, 이렇게 기회가 와서 덥석 잡았다. (웃음)
=크리스천 베일 | 나는 브루스 웨인이 끊임없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억만장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갑작스럽게 부모를 잃은 상처와 그늘에서 그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자기 본연의 모습과 사생활을 희생하고 완전히 다른 자아를 만들어내면서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고뇌하고 노력하지 않나. 그런 그의 강하고 깊은 열망이 감동스러웠다.
-무능한 정부를 대신해 거대 자본이 이끄는 고담시의 풍경을 어떤 상징으로 읽을 수 있을까.
=크리스토퍼 놀란 | 브루스 웨인에게 초인적인 능력이 딱 하나 있긴 하다. 어마어마한 재력이다. 그 재력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 여지가 많지만, 브루스는 그 많은 돈을 사업을 하거나 즐기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슈퍼 파워로 활용하는 쪽을 택한다. 자신이 지닌 엄청난 재력에 대한 책임감을 이런 식으로 발현한다는 게 흥미롭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