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티븐 킹, 그의 소설, 그의 영화들 [1]
2000-03-14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그들 이웃에는 공포가 산다

<크리스틴>이란 영화가 있다. 스티븐 킹 원작 영화 중에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작품이다. 한 고교생이 자신의 차에 지나친 애정을 가지게 되고, 차 역시 그 애정에 보답한다. 뻔한 이야기인데도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주 ‘리얼’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고교생에게 ‘차’란 바로 그 자신이다. 차가 있으면 드라이브도 할 수 있고, 자동차 극장에 가서 진한 키스나 그 이상도 할 수 있다. 자동차는, 멋진 여자아이를 꼬시기 위한 첫걸음이다. 미국 고교생의 신분은, ‘자동차’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리스틴>에는 그런 미국 고교생의 일상이 잘 드러나 있다. 차에 대한 지나친 애정.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그런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차가 애정을 호소해온다면? 이건 <크래쉬>가 아니다. 인간이 차에게 욕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변신’해서 왕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분출하는 이야기다. 그 다음 순서는? 금기를 넘었기 때문에 파멸이 온다. 스티븐 킹의 소설은 ‘블록버스터’이기 때문에 당연히, 안전한 결말로 돌아간다. 그래도 그 상상력만은 끔찍하다. 내 주변에서 당장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이야기니까. 스티븐 킹의 소설이 미국에서 엄청나게 팔리는 이유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티븐 킹의 소설이나 영화는, 한국에서 크게 인기가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대형서점에 가서 스티븐 킹의 작품을 찾아봐라. 10편이 넘지 않는다. 스티븐 킹은 40여편의 소설을 발표했고, 국내에도 거의 다 출판됐다. 그러나 신작이 나와도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경우는 없다. 한정된 독자만이 소비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스탠 바이 미>나 <쇼생크 탈출> 같이 공포물이 아닌 스티븐 킹 원작 영화는 꽤 좋아하지만, ‘스티븐 킹’이라는 이름 자체에 매혹을 느끼는 사람들은 소수의 마니아뿐이다. 물론 그것은 스티븐 킹의 책임은 아니다. 그의 소설이 지나치게 ‘미국적’이긴 하지만, 이미 ‘미국화’ 또는 ‘할리우드화’된 한국사회에서 완전히 낯선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의 독서지형이 지나치게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어본다면, 시간때우기로 그만한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스티븐 킹 마니아는 아니다. 신작이 나와도 꼬박꼬박 찾아 읽지는 않는다. <그린 마일>도 원고청탁을 받고서, 할인매장에서 샀다. 6권짜리 연작인데 처음에는 그저 그렇게 읽다가, 3권으로 접어들면서는 책에서 눈길을 돌리기 어려웠다. 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원래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란 그런 거다. 약간은 신기하고, 약간은 뻔하고 그러면서도 절대로 중도에 멈출 수 없는.

스티븐 킹의 소설들은 전형적인 유형의 대중 소설이다. <캐리> <파이어스타터>의 초능력 소녀, <타미낙커즈>의 외계인, <살렘스 롯>의 흡혈귀, <미저리>의 사이코 여인 등 현실과 비현실의 영역을 넘나들며 ‘공포’를 선사한다. 스티븐 킹의 공포는 소재 자체가 기상천외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적인 죄의식과 유년의 공포를 모티브로, 평온한 일상의 그늘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오싹하게 표현하는 것이 스티븐 킹의 특기다. 미국인들의 ‘마음의 고향’인, 평화로운 소도시에서 출발하는 작품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다크 타워> 등 몇 작품을 빼고 스티븐 킹의 작품은 일반적으로 평이하게 흘러간다. 스티븐 킹의 일생도 소설처럼 평범하게 흘러왔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영상이 부담스러운 청바지 아저씨

47년 포틀랜드에서 출생한 스티븐 킹은,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차남이었다. 그런데 스티븐 킹이 걸음마를 하던 때, 아버지 도널드 에드윈 킹은 담배를 사러간다며 집을 나섰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 루스 필즈버리 킹은 장남인 데이비드, 차남 스티븐과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친척들의 도움으로 58년 더램이란 곳에 정착한다.

정착과 함께 스티븐 킹의 글쓰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첫 걸음은 데이비드와 함께 만든 마을 신문 <데이브스 랙>이다. 스티븐 킹은 휴 로프팅의 <닥터 두리틀>, 리처드 매터슨의 <아이 앰 레전드> 같은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62년 리스본고등학교에 입학한 스티븐 킹은 크리스 첼시란 친구와 함께 <피플, 플레이스 앤 싱스 볼륨1>이라는 제목의 단편집을 만든다. 18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스티븐 킹이 쓴 작품의 제목은 <길의 끝에 있는 호텔> <차원 이동> <이방인> <저주받은 탐험> <안개의 이면> 등이었다. 간간이 자비로 책을 발간하던 스티븐 킹은 1965년 <코믹스 리뷰>란 잡지에 <나는 10대 무덤 강탈자>라는 제목의 단편을 투고했다. 6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티븐 킹은 무난하게 메인대학에 들어간다. 킹은 자신의 고교 시절을 돌이켜 “나의 고교 시절은 아주 평범했다. 나는 1등도, 바닥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기괴한 글을 즐겨 썼다는 것 말고는, 별다르게 눈에 띄지 않는 생활이었다.

대학에 가서도 스티븐 킹의 습작은 계속된다. 여름에는 고등학교를 점령하고 주방위군과 대치하는 아이들을 그린 <게팅 잇 온>을 썼고, 마침내 첫 장편인 <롱 워크>도 완성한다. 그러나 이 원고는 출판사에서 거절당하고 원고를 돌려받는다. 70년 대학을 졸업한 스티븐 킹은 영어교사자격증을 받는다. 이쯤 스티븐 킹은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차일드 롤랜드 투 더 다크 타워 케임>에서 착상하여 대하소설인 <다크 타워>를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스티븐 킹에게는 당장 수입이 필요했고 대작을 쓸 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교사가 되기 전까지 스티븐 킹은 <캐벌리어> 같은 남성용 잡지에 단편을 투고하고, 시간당 1달러 25센트를 받는 날품팔이 노동을 한다. 71년 스티븐 킹은 타비타 제인 스프러스와 결혼하고, 교사일도 시작하게 된다.

이쯤 스티븐 킹은 캐리타 화이트라는 이름의 사춘기 소녀에 관한 단편을 구상했다. 그러나 초반부를 겨우 끝낸 스티븐 킹은 이 초고를 휴지통에 버린다. 그 원고를 부인이 보지 못했다면, 스티븐 킹의 인생은 ‘킹’이 아니라 ‘폰’(체스에서의 졸)이 되었을 것이다. 부인은 스티븐 킹을 부추겨, 이야기를 완성하게 한다. 결국 <캐리>는 73년에 완성되고 74년 출판된다. 스티븐 킹은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에 나선다. 그뒤 스티븐 킹은 ‘호러의 제왕’이라는 찬사를 듣게 되고, 전세계 35개국에서 33개 언어로 번역되어 3억부 이상이 팔렸다. 전체 부수로 따지면 성경보다 많은 유일한 작가라고 한다.사실 스티븐 킹의 이력을 듣고 있으면 지루하다. ‘호러의 제왕’답지 않게 스티븐 킹의 이력은 너무 평범하다. 아버지의 실종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 것인가, 정도를 제외하면 무심하게 흘러가는 홈드라마 같다. 스티븐 킹의 요즘 생활도 그렇다. 가정적이고, 프라이버시를 소중하게 여긴다. 여전히 메인주에 살고 있는 스티븐 킹은 거대한 저택 안의 생활을 거의 공개하지 않는다. 덥수룩한 갈색 머리, 철테 안경, 스웨터에 청바지 차림인 스티븐 킹은 길에서 봐도 제대로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평범하다. 사인조차 아낀다. ‘명성에 대한 숭배’가 싫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도 본격문학 콤플렉스가 있다?

<다크 하프>라는 작품이 있다. 소설가인 주인공은 필명으로 대중 소설을 쓴다. 처음에는 생활방편으로 시작한 것이지만, 인기 작가가 되자 자신도 주체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이제 대중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런데 그 가공의 작가가 실체를 갖고, 자신을 없애려는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스티븐 킹 자신도 리처드 바크먼이라는 필명으로 <레이지> <롱 워크> <로드워크> <러닝 맨> <씨너> <레귤레이터>라는 소설을 발표했던 것이다. 자신의 명성을 부담스러워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필명으로 여전히 ‘대중 소설’을 썼다. 스티븐 킹에게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공포소설의 형태에 불어넣은 작품들이 꽤 있다. <다크 하프>, 그리고 최근작인 <자루 속의 뼈>.

스티븐 킹 역시 ‘대중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정통문학’에 대한 그리움 또는 자격지심 같은 것들이 있다. “누구도 나의 책을 마틴 에이미스(유명한 평론가)에게 리뷰해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그런 태도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판매는 잠시이지만, 평이나 의견은 오래 지속한다. 최근에는 일부 평론가들에게 칭찬을 받고 있지만, 주류는 아니다.” <돌로레스 클레이본>이나 <제랄드의 게임> 등은 전형적인 스티븐 킹 유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평으로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인을 죽인 혐의로 수사받는 여인과 그녀의 딸 사이의 애증을 그린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영화로도 화제를 모았고, <제랄드의 게임>은 28시간 동안 침대 머리맡에 묶여 있는 여인의 공포를 그린 소설이다. “글을 쓸 때 나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싶다. 그러나 그건 적당한 수준이다. 왜냐하면 당신도 그것이 상상의 공포라고 믿기 때문이다. 흡혈귀, 초자연적인 모든 것들.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안전하다. 그러나 <제랄드의 게임>이나 <돌로레스 클레이본>은 다르다. 독자를 안전지대 바깥에 있다고 느끼게 했고, 그것이 더욱 공포를 준 것이다. 그것들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뉴욕 타임스>는 근작인 <자루 속의 뼈> 리뷰에서 “스티븐 킹은 최근 공포 작가에서 진짜 작가가 되려고 한다… 근작들은 뛰어나다. <제랄드의 게임> 같은 책은 심리적으로 잘 짜여 있고, 초자연적인 공포가 아니라 성심리를 파고들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자루 속의 뼈>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보통의 공포소설보다 읽기에 훨씬 좋다. 그러나 말미에는 문학작품이 되려고 하는지, 베스트셀러 공포소설이 되려 하는지가 불명확하다. 그 어느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프랭크 다라본트처럼, 스티븐 킹의 일반적인 소설에 더욱 큰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스티븐 킹의 오싹한 공포소설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 스티븐 킹도 그런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 “내가 영역을 확장한다거나, 공포소설을 떠난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단지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을 시도해보고 있을 뿐이다. 당신도 나만큼 돈을 많이 벌었다면 누구나 그런 해보고 싶은 일이다. 동시에 나는 사람들의 보호막 안에 파고들어 공포를 주고 싶다. 나는 끊임없이 그런 일을 하고 싶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악마 멤노크> 등의 공포소설 작가인 앤 라이스는 ‘고딕풍의 정교하고 나른한 공포’를 선사한다. 그러나 스티븐 킹의 주인공들은 파워북을 사용하고, ‘슬립워커스’처럼 이웃에 살고 있다. <나이트 플라이어>의 흡혈귀처럼 피를 마시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미국 전역을 헤매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스티븐 킹의 소설들은 ‘어반 레전드’(도시의 전설)의 형태를 띠고 있다. ‘어반 레전드’는 <캠퍼스 레전드>에서 보여주듯 현대사회의 고전 속에 떠도는 ‘믿거나 말거나’를 말한다. 믿기 어렵지만 파고들어가 보니 실제의 사건이 과장된 것이라거나, 아예 미궁으로 남은 초자연적인 현상이거나 등이 합리적인 도시의 이면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어반 레전드’는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신문 사회면에 항상 존재하는 ‘경험’과 ‘악몽’이다. 스티븐 킹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잇>에는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잇>은 소도시에 사는 일곱명의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서커스에서 친근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광대가 가공할 힘을 지닌 괴물로 등장한다. 아이들은 힘을 합쳐 괴물을 물리치지만 27년 뒤 다시 돌아온다.

<샤이닝>은 위대한 실패작?

성인이 된 주인공이 다시 유년의 악몽과 부닥치는 것, 순수하고 강한 믿음과 팀워크에 의해서 악을 물리친다는 것, 평화로운 소도시의 이면에 얼마나 짙은 어둠이 깔려 있는지 등등은 스티븐 킹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반복되는 주제다. 사실 스티븐 킹은 대단히 ‘안정적인’ 작가다. 스티븐 킹은 절대로 자신의 주관이나 감정의 격랑으로 빨려 들지 않는다. 면밀하게 일상과 초자연적인 상황을 엮어내면서 ‘상상’ 가능한 악몽을 선사한다. <잇>에서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제3의 눈이 등장한다. 아이들은 그들이 본 것을 믿는다. 어른들처럼, 믿기 힘든 무엇을 굳이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단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싸워 없애려 한다. 그런데 성장과 함께, 그들은 그 싸움을 잊어버렸고, 어린 시절의 상상이라고 믿어버린다. <잇>에서 스티븐 킹이 말하는 것은 아이들의 관점으로 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함”이라는 것이다. <잇>만이 아니라 스티븐 킹의 대부분 공포소설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함이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공포를 통해, 우리가 진실을 이해하고 그것들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믿기 어렵다고? 그렇다면 <스탠 바이 미>나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을 보면 된다. 이 작품들은 공포소설이 아니지만, 스티븐 킹의 다른 작품들과 겹쳐보았을 때 구성이나 인물이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냥 어법이 틀린 것뿐이다. 가장 먼저 출발했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대작 <다크 타워>는 한 남자가 진실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미스테리오스하고, 서스펜스가 가득하고, 로맨틱하고, 끔찍하고, 우습고, 가슴이 멎을 듯한 두려움’이 함께 들어 있다. “로맨스 소설과 공포소설을 함께 읽는” 기분이 든다고 하는데, <다크 타워>의 주제 역시 ‘성장’이다. 악에게 빼앗긴 것을 찾기 위하여 주인공이 벌이는 모험은 그리스·로마신화의 영웅들이 벌이는 모험과 다르지 않고, 성경의 세계와도 일맥상통하다. 스티븐 킹은 대중 소설의 공식이나 표현방식에는 거의 통달해 있고 능수 능란하게 독자를 상상과 현실의 접경지역으로 인도한다.

스티븐 킹의 작품은 영화로 만들기에 딱 좋은 이야기들이다. 신기한 소재에, 긴장감 넘치는 구성, 극적인 결말 등등. 그런데 영화화된 스티븐 킹의 작품에는 의외로 수작이 많지 않다. 영화광이기도 한 스티븐 킹이 만족하는 작품은 <그린 마일> <스탠 바이 미> <쇼생크 탈출> <미저리> <캐리> 정도다.

<샤이닝>은 스티븐 킹 스스로 ‘위대한 실패작’이라고 부른다. 물론 스티븐 킹이 원하는 것은 예술품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다. “비평가들은 ‘쿨’한 것을 좋아하지만, 나는 뜨겁거나 톡쏘는 맛을 좋아한다.” 비교적 단순했던 초기작들은 영화로 옮기기에 적당하지만, 이야기의 폭이 넓어지고 문장에 힘을 기울인 요즘의 장편을 한편의 영화에 담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미래의 묵시록>처럼 아예 TV 미니시리즈로 만들거나 단편을 영화화한 <공포의 묘지> <나이트 플라이어>가 더욱 산뜻하다.

공포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아무리 뛰어난 공포소설이라도 영상으로 그대로 옮겨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스티븐 킹도 알고 있는 일이고, 그래서 영화화된 작품들에 대해 크게 불평하지는 않는다. 스티븐 킹은 직접 <맥시멈 오버드라이브>란 영화를 감독했는데, 거의 완벽하게 실패했다. 소재는 기발하고 좋았지만, 전혀 긴장감이 없는 영화였다. 요즘 스티븐 킹은 자신의 ‘공포’를 영상으로 전달하기 위해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이 제멋대로 바꿔놓았다고 생각하는 <샤이닝>을 미니시리즈로 다시 제작했고, <슬립워커스> <데스퍼레이션> TV 시리즈 <미래의 묵시록> 등도 썼다.

99년 스티븐 킹은, 진짜 공포를 맞이했다. 산책중 차에 치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맨 것이다. 그러나 회복기에 접어든 스티븐 킹이 휠체어에서 일어나 처음으로 한 일은 영화보기였다. 지난해 최고의 스릴러물이었던 레니 할린의 <딥 블루 씨>. ‘공포의 제왕’다운 선택이었다. 살아 있음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데는, 역시 공포물만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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