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티븐 킹, 그의 소설, 그의 영화들 [3]
2000-03-14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스티븐 킹이 꼽은 자신의 영화 베스트 10

작가와 평론가와 관객이 만장일치로 박수를 치는 영화란 드물다. 작가로서 스티븐 킹 자신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에 소개한 베스트 영화 10편 목록은 일반의 예상과 달리 <샤이닝>이나 <캐리> 같은 작품이 빠져 있다. 다음은 스티븐 킹이 꼽은 자신의 원작 영화 베스트 10이며 순서는 시대순.

크리스틴

자동차는 괴물이다. 유약하고 겁많던 10대 소년이 ‘크리스틴’이라 불리는 빨강색 자동차를 갖더니 부모에게 대들고 학교에서 가장 예쁜 여자와 데이트를 한다. 자동차와 섹스를 하는 <크래쉬>에는 못 미치지만 <크리스틴>에 등장하는 자동차 역시 사춘기 소년의 리비도를 통제불능 상태로 몰고간다. 크리스틴은 숭배의 대상에서 기꺼이 강간당하는 여성까지 다양한 이미지를 제공하며, 소년의 여자친구를 질투하고 소년을 조롱하던 건달들에게 잔인하게 복수한다. “이제 로큰롤은 싫어”라는 마지막 대사가 뜻하듯, <크리스틴>은 기성 세대와 반항하는 10대 사이에 패인 깊은 골을 보여준다.

쿠조

착하기 이를데없는 순한 눈을 가진 세인트 버나드종의 개가 악마로 돌변한다. 토끼를 좇다 박쥐에 물린 뒤 광견병에 걸린 개 쿠조가 주인도 몰라보고 달려드는데, 가장 집요한 공격을 받는 사람은 바람피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다. 여자는 어린 아들과 함께 자동차 안에 갇힌다. 차 밖으로 한발만 내딛어도 쿠조의 사나운 이빨을 피할 수 없기 때문. 그리고 꼬박 이틀간 미친 개에게 시달리는 가혹한 처벌을 받고서, 비로소 여자는 구원받는다. <쿠조>는 아직 촬영감독이던 시절 얀 드봉이 찍은 영화. 빠른 속도로 전진하는 가해자 시점과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피해자 시점이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스탠 바이 미

<돌로레스 클레이본>에도 나오지만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다. 그가 죽자 어머니가 술에 빠져들고 아이들은 매를 맞는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이 할 일은 어른들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모험. 네 소년은 사고로 죽은 아이의 시신을 찾아 철길을 따라 길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훌쩍 자란다. 로브 라이너의 최고작이라 평가받는 <스탠 바이 미>는 스티븐 킹의 소설 가운데도 손꼽히는 작품. 스티븐 킹은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리버 피닉스가 마약으로 아까운 목숨을 버린 사실에 화가 난다고 말했다.

공포의 묘지

스티븐 킹이 원작은 물론 시나리오 각색까지 직접 맡은 영화 중 하나. 교외의 쾌적한 집으로 이사한 크리드 부부는 교통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는다. 절망에 빠진 부모는 죽은 자를 되살려낸다는 인디언 전설이 깃든 동물묘지에 아들을 묻는데, 아기는 천진한 얼굴의 살인마로 되살아난다. “내가 썼고, 비평가들은 싫어했다. <공포의 묘지>의 관심사는 하나, 바로 관객을 겁먹게 하는 것”이라는 스티븐 킹의 자평처럼, 원작에 못 미치는 졸작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사랑하는 이를 되살릴 수만 있다면’하는 심리적 장치와 B급 공포 영화의 매력이 살아 있다.

돌로레스 클레이본

스티븐 킹은 이 영화에서 테일러 핵포드가 과거와 현재를 표현한 조명과 색채를 좋아했다. 테일러 핵포드는 현재는 아주 차가운 느낌이 드는 회색톤으로, 과거는 밝고 화사한 이미지로 채색했다. 스티븐 킹의 세계에서 가족은 늘 괴물이 들어 있는 비밀스런 공간인데, <캐리>에선 어머니가 그랬고 <돌로레스 클레이본>에선 아버지가 그런 존재다. 하지만 초경을 맞은 사춘기 소녀 캐리와 달리 클레이본의 딸은 나이도 들고 사회적 지위도 확고하다. 끔찍한 과거의 상처를 잊고 지내던 그녀는 살인혐의를 받은 어머니를 변호함으로써 신경증에서 벗어나게 된다.

미래의 묵시록

화학무기를 개발중이던 군부대에서 치명적인 전염성 세균이 외부로 유출된다. 정부 당국과 군부대는 악성감기가 유행이라며 속이려 들지만, 병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지고 거리엔 시체들이 나뒹군다.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똑같은 꿈을 꾸고 마침내 한 자리에 모여 악마와 맞선다. 14세기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은 흑사병에서 영감을 얻은 <미래의 묵시록>은 TV 미니시리즈로도 제작됐고 4부작 비디오로 출시됐다. 현대판 흑사병 이야기답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소는 도박과 유혹의 도시 라스베이거스. 옥수수밭이 있는 허름한 농가에 모인, 선택된 자들은, 타락한 도시인 소돔을 향해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부르며 진격한다.

미저리

인기 절정인 로맨스 소설가가 광적인 팬에게 잡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는 이 이야기는, 연극무대에서 발견한 배우 케시 베이츠가 아니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프린세스 브라이드>로 로브 라이너와 인연을 맺은 <내일을 향해 쏴라>의 시나리오 작가 윌리엄 골드먼은 시나리오를 쓸 때 이미 케시 베이츠를 염두에 뒀다. 한 공간에서 이뤄지는 숨막히는 폐쇄공포를 만드는 데는 배리 소넨필드의 촬영도 한몫했다. 케시 베이츠에게 오스카를 안겨준 이 작품은 80년대 말 <위험한 정사>부터 90년 초 <위험한 독신녀>로 이어지는, 무서운 백인 여성 이야기 가운데 하나. 뚱뚱하고 나이든 미혼여성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감을 정신병적 집착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쇼생크 탈출

‘복선’이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영화를 보면 된다. 마치 주인공 앤디가 땅굴을 파서 나온 흙을 바지 속에 감췄다 운동장에 흘리듯, <쇼생크 탈출>은 사건의 단서를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조금씩 흘려보낸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두터운 감옥의 벽을 관통하듯 작은 조각들이 온전한 반전의 모양새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스티븐 킹 원작 가운데 아카데미에서 가장 환대받은 영화인데, 호러나 판타지적 요소없이 자유를 향한 갈망과 인간성의 승리를 보여주는 희망적인 영화라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을 듯.

그린 마일

1930년대 대공황 시대를 배경으로 편견과 이기심의 희생양이 된 흑인 사형수를 그린 이 영화는 <쇼생크 탈출>보다 훨씬 큰 야심을 드러낸 작품이다. 불의와 억압에 맞선 한 인간의 집념을 넘어서는 것은 세상의 죄를 대속하고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 거구의 흑인 사형수는 그런 일을 하기에 알맞은 선택인 셈이다. 올해 아카데미에선 <쇼생크 탈출>에 못 미치는 4개 부문 후보에 그쳤지만 스티븐 킹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자신이 책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거의 고스란히 담은 드문 영화라고 말했다.

세기의 폭풍

TV 미니시리즈로 제작된 작품으로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메인주의 작은 마을에 기이한 폭풍이 찾아온다. 거센 바람과 눈으로 마을 전체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변하고 생존자들은 피신처를 찾아 헤맨다. 물론 폭풍은 그저 신기한 자연현상이 아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가 나타나 생존자들의 이기심을 부추기고 인간성이 무너지는 꼴을 보며 즐기는 것이다. 스티븐 킹이 대본을 쓴 작품으로, 베스트 10편 안에 꼽힌 것과는 달리 평자들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