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듯, 눈 내리듯, 이명세의 영화가 온다
2004년 11월 마지막 날 이명세 감독이 오랜 공백을 깨고 드디어(!) <형사 Duelist>의 촬영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씨네21>은 그 촬영현장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지켜보려 애를 썼지만,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아 까다로운 액션을 연출하느라 여념이 없는 감독의 작업 현장에 초대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 Duelist>가 5월27일 오후. 모든 매체를 대상으로 하는 촬영현장공개 일정을 알려왔다. 공개시간은 단 2시간. 애타게 기다렸던 이명세 감독의 현장을 그렇게 스치듯 관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씨네21>은 주저하는 제작진을 설득하여 현장공개를 전후로 조금 더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 결과 5월27일부터 29일까지, 조용하고 차분하게 마지막 촬영에 여념이 없는 촬영현장을 방문했고, 공식현장공개 일정 중에 프로모션용 클립을 감상했다. <형사 Duelist>가 관객을 만나는 것은 오는 9월 추석. 3개월 뒤 모습을 드러낼 영화의 완성본을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이명세 감독의 여섯 번째 작품이다. 데뷔 이래 2·3년의 시간을 두고 꾸준히 작업을 이어왔지만 한번도 액션영화를 만든 적은 없었던 그의 첫 액션영화는, 관객과 평단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데뷔작 <개그맨>부터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첫사랑> <지독한 사랑> 등 꾸준히 그의 영화를 지켜봤던 오랜 팬들은 이명세의 화려한 부활을 진심으로 기뻐했고, 그의 전작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관객도 전혀 새로운 정서로 액션에 접근한 이 영화의 스타일에 환호했다. 그리고 5년 뒤.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들어지고 있는 그의 신작, 혹은 그의 두 번째 액션영화 <형사 Duelist>(이하 <형사>)에서 <인정사정…>의 흔적을 찾는다.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자객과 여형사의 대결을 다루는 <형사>의 구도는, 살인범과 형사의 추적을 표현하기 위해 전력투구한 <인정사정…>의 그것과 그대로 겹친다. 또한 <형사>의 크랭크인을 앞두고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명세 감독은 “액션의 새로운 방법”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인정사정…>에서 한차례 그 목표를 달성한 바 있지 않던가.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기만의 필터로 여과하여 카메라에 담는 그의 작업현장이 못내 궁금했던 기자 역시, 시나리오도 읽지 못하고 방문한 촬영현장에서 다시금 <인정사정…>을 떠올렸다. 이명세 감독이 <형사>를 통해 표현하려고 한 것이 무엇이고, 이를 위해 어떤 것들을 프레임으로 끌어들였는지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자연스럽게 <인정사정…>과 <형사>가 어떻게 다르고 또 같은지를 이해하려는 시도로 연결됐다. 그리고 이는 다시, 어떤 경로를 통해 또 한편의 ‘이명세표 영화’가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결론으로 귀결된다.
대결 - 죽이거나, 사랑하거나
현재 <형사>는 결투(대결)자들이라는 의미의 영어제목 ‘duelist’와 한글제목을 나란히 표기하고 있다. 촬영을 시작하기 전 이명세 감독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추적편’이었다면, 이번 영화는 ‘대결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인정사정…>의 추격이 수컷냄새 물씬 풍기는 두 남자의 것이었다면, <형사>의 대결은 비밀스런 자객과 열혈 여형사 사이에서 벌어진다. 단순히 추격 이후의 대결로, 카메라의 렌즈가 옮겨간 것은 아닌 듯 보인다. 그리고 눈에 띄는 것은 ‘생애 단 한번의 대결, 그리고 단 한번의 사랑’이라는 <형사>의 메인카피. 모든 것을 대결에 빗대는 듯한 이 문구는, 단 한번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숙명의 대결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사랑을 다룰 것임을 암시한다.
지난 5월27일 점심 무렵, 남양주종합촬영소 야외세트장에 자리한 <형사>의 촬영현장을 찾은 기자가 가장 처음 맞닥뜨린 촬영은 쫓고 쫓기는 관계인 슬픈눈(강동원)과 남순(하지원)이 시장바닥에서 마주치는 순간. 다스 베이더의 마스크를 연상시키는 탈(귀면탈)을 뒤집어쓴 슬픈눈과 치마를 질끈 동여맨 채 쌍비단도를 거머쥔 남순이 프레임 양쪽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들고 이내 반대쪽으로 엇갈린다. 등을 보이고 정지한 두 사람 사이에 끝모를 정적이 흐른다. 슬픈눈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귀면탈의 반쪽이 땅에 떨어지면서 슬픈눈은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다. 아무렇게나 틀어올려졌던 남순의 머리채가 긴장감으로 가득한 그의 얼굴에 드리운다. 무표정 뒤에 아련한 외로움을 감춘 암살자 슬픈눈과 용의자를 향해 왠지 모를 끌림을 느끼는 왈가닥 여형사는 그렇게 상대방에게 맨얼굴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남순의 뒤편에서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슬픈눈쪽으로 달려가고, 이들이 일으킨 흙먼지가 남순을 향해 희미한 시선을 던지는 슬픈눈의 모습을 지워버린다. 이것은 아마도 슬픈눈과 남순의 첫 번째 만남일 것이다. 남순은 물론 관객 역시 슬픈눈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이지만, 슬픈눈은 좀처럼 정면을 응시하지 않고, 치렁치렁한 가발은 자꾸만 그의 눈을 가린다.
이명세 감독은 난장판 속에서 이루어진 이들의 안타까운 마주침을 대략 10여개의 컷을 통해 표현했다.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가 작지만 치명적인 흠집만을 서로에게 남긴 채 멀어지는 이들의 이 팽팽한 대결은, 선남선녀의 가슴 떨리는 첫 만남과 너무도 흡사하다. 감독을 비롯한 스탭들은 이러한 맞닥뜨림 혹은 대결이 영화 속에서 예닐곱번에 걸쳐 반복·변주될 것이라고 말한다. 완성된 영화 속에 단락별 자막이 삽입될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슬픈눈과 남순의 주요 대결은 ‘혼돈 속의 대결’(duel in chaos), ‘달빛 속의 대결’(duel in the moonlight)처럼 각각의 컨셉을 드러내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고.
눈 - 감정의 결 사이로 눈이 내린다
<인정사정…> 속 우 형사와 장성민의 마지막 결투장면.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빗줄기가 끈질긴 추적에 방점을 찍는 이 클라이맥스는 영화 전체를 연상시키는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다. 그러나 원래 이명세 감독은 이 대결을 눈이 오는 배경에서 찍으려 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탓에 묵직한 비신으로 이를 대체했던 것이다. 그간 이명세 감독의 영화에서 눈이 등장하는 순간은 따뜻하고 아련하며, 동화스럽고 애틋한 순간이었음을 떠올릴 때, 비장한 대결의 순간에 비를 택한 것은 이제와선 매우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다면 영화 전체가 대결, 그것도 애잔한 대결로 이루어진 <형사>의 경우는 어떨까.
지난 5월28일. 늦은 오후. 드넓은 시장세트 한쪽에서 굵은 소금을 바닥에 까는 스탭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세트장 밖에는 이미 몇 십개의 소금부대가 쌓여 있다. 일단 바닥을 하얗게 채우고 나면 시장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궤짝 안이며, 좌판 위로, 눈이 쌓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세팅을 해야 한다. 카메라의 화각이 넓어지거나 앵글이 변할 때마다 특수효과 담당 스탭들이 모니터로 프레임을 확인한 뒤 비어 있는 구석들을 눈으로 메우는 것은 기본. <형사>에서 특수소품 제작을 맡고 있는 A.I.의 손철 실장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눈은 모두 다른 재질로 만들어진다고 설명한다. 바닥에 쌓여 있는 눈은 굵은 소금이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종이와 녹말을 섞어 만든 특수소품이며, 클로즈업을 할 경우 배우의 몸에 내려앉은 것처럼 보이는 눈은 종이 기저귀의 원료로 만든 폴리스노라는 이름의 특수소품이라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남순을 다독이며 짝을 이루는 안 포교(안성기)가 씩씩대며 어디론가 걸어가는 남순의 뒤를 따라 분주히 걸어가는 장면부터는 본격적으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이때 강풍기처럼 생긴 커다란 선풍기 속으로, 인공 눈을 집어넣어, 흩날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특수효과팀의 몫이다. 특수효과팀의 김만성씨는 “눈의 입자, 바람의 세기에 따라 싸락눈인지, 함박눈인지, 눈의 종류가 결정된다. 단순히 하늘에서 내리는 눈보다는 배우가 드나드는 문틈으로 들이치는 눈처럼 틈새로 파고드는 눈을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한다. 남순과 안 포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라지는 모니터를 체크하던 이명세 감독이 이번에는 소품담당 연출부를 향해 지시한다. “상철아, 카메라가 여기에 팬했을 때 눈이 후루룩∼. 알지?”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기자는, 막상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는다. 카메라 옆에서 대기하던 이상철씨가 작은 입자의 인공눈을 입김을 이용해 불자, 모니터 속 화면에는 이내 하얀 눈보라가 가볍게 재현된 것이다. 연신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인간 강풍기 역할을 수행하던 이상철씨, 카메라가 멈추자마자 기침을 해댄다. 카메라 옆에 서 있던 촬영부가 킥킥거리며 묻는다. “야, 눈을 불어야지, 왜 니가 들이마시고 있어?”
고작 10시간도 안 되는 야간촬영 동안 세트장 위로 눈발이 쉼없이 흩날린다. 영화의 주요 장면을 포함하는 프로모션용 클립에도 눈은 심심찮게 등장한다. 슬픈눈과 남순이 벌이는 대결 중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것처럼 보이는) 장면에선 검은 배경 위로 점점이 부유하는 하얀 눈이 애잔한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절체절명의 대결 순간, 비가 아닌 눈을 고집한 이명세 감독이 관객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는지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