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 액션영화? 아니 영화액션!
정체불명의 빨래들이 가득한 옥상 위에서 추격전을 벌이던 형사와 용의자가 육탄전에 접어들고, 서로의 팔을 잡고 힘겨루기를 하는 이들의 모습이 일순 달밤에 탱고를 즐기는 연인의 모습과 겹치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인정사정…>의 모든 액션 시퀀스 중 어느 것 하나 예상가능한 것은 없었다. 고속촬영과 저속촬영은 물론이고, 다양한 색감과 기법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이 파악한 영화적인 액션을 스크린에 옮겼던 이명세 감독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강동원에게 무용을 배우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강동원과 하지원이 중요한 대결장면에서 진짜 탱고를 췄다는 소문이 들린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까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들이 대결장면에서 탱고에 버금갈 만큼 화려하고 야릇한 동작을 선보이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명세 감독이 이번 영화에서 강조하는 것은 “액션영화가 아닌, 영화액션”. 사실적인 것도 아니고, 그럴듯해보이거나, 단순히 멋져보이는 액션도 아닌 영화액션이라니, 무술감독에게는 다소 당혹스런 요구 아니었을까. 그러나 <인정사정…> 때 한차례 이명세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전문식 무술감독은 “감독님이 원하는 건 연기자의 감정을 액션에 담는 것이다. 함께 작업을 하다보면 액션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주먹이 강타하는 순간보다, 언제 주먹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을 중시”하는 무술감독과 감독은 현장에서 동시에 목소리가 울려퍼져도 배우나 스탭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을 정도의 호흡을 자랑했다.
칼을 뽑아들기도 어려울 만큼 좁은 골목에서 한 무리의 포교들과 정체불명의 사내들이 한곳에 엉켜 육박전을 벌이는 순간을 촬영하기 전. 배우들의 동선과 타이밍, 액션의 합을 맞추는 이 순간에 무술감독과 감독은 번갈아가면서 쉴새없이 뭔가를 지시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우들의 움직임은 점점 자연스러운 리듬을 찾아나간다. 둘의 액션연출이 서로 엇갈릴 때는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무술감독은, “배우의 동작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했던 분이기 때문에 웬만한 무술감독보다도 액션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물론 만일의 경우 의견이 갈린다면, 감독의 뜻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듯 콘티에 제시된 액션을 인지한 연기자들과 느슨한 리허설을 진행한 뒤 리허설과 테스트, 테이크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깊이와 세기(細氣)를 더해가는 방식은 언뜻 이명세 감독과 어울리지 않는 듯 여겨진다. 자신의 영화 속 운동과 리듬을 철저하게 계산해왔던 이명세 감독이라면, 그리고 영화적인 액션에 방점을 찍고 있는 그라면, 사전에 구상한 미장센과 몽타주를 엄격하게 현장에 적용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황기석 촬영감독은 “이명세 감독님이 비주얼에 대한 생각이 누구보다 독특한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보다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감독님이 미리 확정지은 어떤 그림을 촬영을 통해 그대로 카메라에 담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감독님 머릿속의 그림과 실제로 촬영이 가능한 그림 사이에는 일정한 갭이 존재하는데, 감독님께서 일단 안을 던져놓으면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스탭들 각자가 찾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명세 감독의 액션을 말함에 있어 고속 혹은 저속촬영을 빼놓을 수 없다. 주어진 시간을 무한대로 늘리거나 압축할 수 있는 이 촬영기법은, 이명세 감독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운동의 리듬을 결정하는 데 큰 몫을 하기 때문이다. <형사>의 프로모션용 클립은 프레임을 좌우로 양분하는 슬픈눈과 남순의 풀숏으로 시작한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개인 수련을 하듯 번갈아가면서 액션을 선보인다. 흡사 현대무용을 연상시키는 이들의 모습은 고속으로 촬영되어 보는 이가 움직임과 리듬에 집중하게 만든다. 초당 48프레임에서 120프레임까지 다양한 고속촬영을 시도하고 있는 현장답게, 황기석 촬영감독은 매컷을 찍을 때마다 초당 프레임 수를 체크하곤 했다.
상상력 - 이명세식 리얼리즘
잠복근무 중인 두 형사가 따끈따끈한 설렁탕 한 그릇을 떠올린다. 여기에 파를 듬뿍 얹고 고춧가루를 술술 뿌려서, 급기야 밥 한 공기를 말아버리는 일련의 과정은 두 인물 사이에 실제 이미지로 보여진다. 주인공의 생각을 모조리 그림이나 글로 표현하는 만화에나 어울릴 법한 장치다. 이명세 감독은 예로부터 이런 식의 시도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 어떤 황당한 상상도, 일단 그가 구축한 완결된 영화적인 공간에 들어서면, 말이 된다. 각각의 설정과 요소가 이루는 조화가 문제일 뿐, 그의 영화 속에서 리얼리티 자체는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막연하게 조선시대 언제쯤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형사>의 야외세트, 그중에서도 2천평 규모의 장터세트는 일단 보는 눈이 즐겁다. 꽃집, 천가게는 물론이고, 커다란 부채와 색초, 연등, 화려한 베개, 해녀볼 등 도무지 시대와 지리적 배경을 짐작할 수 없는 소품들이 즐비하다. 심지어 약재상에 널린 약재의 색마저 빨갛고 파란 총천연색을 자랑할 정도. 이는 이명세 감독이 이형주, 조근현 미술감독에게 “고증에 얽매이지 않고 최대한 다양한 색감을 한 화면에 담을 수 있도록 소품을 준비해줄 것”을 주문한 결과다. <형사>를 만드는 내내 “사극의 새로운 비주얼”을 강조했던 감독은 고증이나 개연성보다는 조형성을 중시했다. 장터와 약전골목세트와 이어진 계단세트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멀리서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위로 보이는 <취화선> 세트로 들어설 수 있을 듯 보이지만, 사실 계단 뒤편은 아무것도 없다. <인정사정…>의 그 유명한 40계단 장면을 연상시키는 그 계단은 마치 이명세 감독의 낙인처럼 여겨진다. 서울 어느 뒷골목의 계단과 비슷한 느낌의 돌계단이 그 시대에 정말 있었을까 싶지만, 어차피 그런 시시콜콜한 질문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고보면 <형사>의 현장에는, “그 시대에 정말 이랬을까” 싶은 것이 한두개가 아니다. 수염을 붙이지 않거나, 상투를 틀지 않은 엑스트라들도 종종 눈에 띄고, 희고 밋밋한 한복을 입은 등장인물은 눈씻고 봐도 없다. 너덜너덜 올이 풀린 슬픈눈의 긴 옷자락, 속고쟁이에서 출발하여 형형색색의 옷감을 모자이크한 남순의 바지 등은 한복을 응용한 현대적인 의상에 가깝다.
“<인정사정…> 전까지 이명세 감독의 영화는 모두 작은 세트에서 만들어졌다. ‘인공세트의 미학’ 같은 것이 있었다. 골목 하나, 집 한채가 그의 영화 속 세계의 전부였다. 그리고 <인정사정…>은 그걸 밖으로 연장시켜 기존의 공간을 세트처럼 만들었다. <형사>는 이 두 가지의 결합처럼 보인다. 인공세트의 정교함과 로케이션의 스케일을 모두 이루려는 야심이 엿보인다.” 지난 5월28일 밤. 응원차 현장을 방문한 김홍준 감독은 장터를 포함하여 총 3500평 정도에 달하는 <형사>의 야외세트를 둘러본 뒤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트의 설계를 살펴보면 이명세 감독이 이를 어떻게 자신의 영화에 끌어들일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해가 지는 방향을 고려한 듯 보이는 장터세트는 해질 무렵 완벽한 석양을 재연한다. 모니터를 통해 보게 되면 누군가 완벽하게 조명이라고 한 듯 여길 정도다. 약전골목과 시장을 가르는 건물(한쪽은 약재상, 반대편은 시장가게로 설계되어 공간을 폭넓게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지어 있다. 건물 사이사이의 틈을 통해 슬픈눈과 남순,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추격을 매번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정교함과 스케일을 동시에 구현한 세트라 할지라도 매번 화면을 장악하는 건 아니다. 이명세 감독은 어느 순간, 화면에서 보여지던 공간을 영화적으로 확장 혹은 생략하면서 인물에 집중하곤 했다. 만화에서 대부분의 경우 배경을 생략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형사> 프로모션용 클립 역시, 공간을 파악할 수 없는 암흑의 공간에서 두 인물만이 오롯이 부각된 장면이 눈에 띈다. 황기석 감독은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길에서 두 남녀가 대결을 시작하면 가상공간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을, “40m에 달하는 벽을 따라 조명기 서른개를 배치하여 긴 골목을 나타냈고, 완전히 암흑 속에서 이들이 대결하는 장면은 ‘블랙세트’라고 부르는 곳에서 10kW짜리 조명기 달랑 한개만 켜놓고 찍었다”고 회고한다.
움직임 - 그의 영화는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
촬영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 황기석 촬영감독은 영화 스스로가 지닌 자생능력을 이야기한다. “완성도 있는 영화라면 촬영이 어느정도 진행되면, 그 자체의 리듬이 생긴다. 처음에 생각했던 시나리오와 콘티에서 수정이 필요한 건 그 때문이다. 감독님도 우리도 그러한 영화의 현실을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그가 설명하는 영화의 전체적인 비주얼 컨셉은, “영화 한편이 한컷으로 이루어진 듯 여겨지는 영화”. 컷은 잘게 나뉘지만, 독특하고 다양한 방식의 컷넘김을 통해, 커팅보다는 연결에 방점을 찍겠다는 말이다. 프레임의 좌우를 가로지르며 다음 장면이 등장하는 와이프가 <형사>에 빈번히 사용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와이프에 그치지 않을 모양이다. 화면 앞을 가로지르는 인물, 건물의 기둥, 화면 가득 뿌옇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등장인물을 삼켜버리는 아련한 눈보라 등 화면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식의 응용이 많기 때문이다. 어떤 높이에 카메라가 위치하더라도 화면 전체를 깨끗하게 와이프시킬 수 있는 훤칠한 키의 스탭은, 아예 현장에서 와이프 전문 배우로 불리고 있었다. 신과 신의 연결에 있어 카메라의 움직임, 와이프의 속도 등은 언제나 꼼꼼히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명세 감독 역시 일련의 상황이 종료되는 컷에서는 동선과 타이밍 계산에 신경을 쓰는 눈치.
결국 <형사>, 그리고 이명세 감독의 영화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운동, 혹은 움직임이 아닐까. 그의 영화 화면 안에선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대사가 그리 많지 않은 인물들은 눈빛과 몸으로 많은 감정을 전달하고, 카메라는 화면의 좌우를 다양한 속도로 가로지르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쫓는다.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혹은 뭔가가 벌어지기 직전의 적막함 속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적막한 골목길 하나를 잡아도 지붕 위에 쌓인 눈이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식이다.
지난 5월29일 새벽. 이날 야간촬영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장면은 슬픈눈의 단독숏이다. 눈 내리는 하늘(카메라)을 바라보던 그가 눈물을 글썽이더니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야 한다. “동원아, 니 느낌상 눈물이 고였다 싶으면 고개를 돌리는 거야. 너 준비되면 바로 슛 들어갈게.” 감독의 지시가 끝나자 모든 스탭들이 일순 조용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슬픈눈이라는 캐릭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듯 보이는 배우 강동원이, 거짓말처럼 눈물을 그렁거리며 준비를 마친다. 강풍기를 통해 흩날리는 눈이 자꾸만 배우의 눈에 들어가고, 강풍기 그림자가 프레임 안에 들어오면서 몇번의 NG가 나긴 했지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촬영은 마무리된다. 과연 슬픈눈은 눈 내리는 하늘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혹은 관객의 마음은 그런 그를 보면서 어떻게 움직일까. 영화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해결될 수 없는 질문이 목구멍에 걸린다. 그리고 문득 관객의 마음을 잡아 흔들어야 할 이 장면에선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아마도 이 장면은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의 움직임이 강조되어야 하는 몇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 정적마저 <형사>가 그려낼 커다란 운동 속에서 하나의 리듬을 만들 것이라는 점. 차츰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형사>를 뒤로하는 기자에게, PD는 촬영이 진짜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알린다. 크고 작은 움직임들이 하나의 궤적을 그리면서 그렇게 <형사>는 완성되고 있었다.
암살자와 여형사와 강력반장
감독, 배우, 무술감독의 설명으로 조형해본 <형사>의 세 캐릭터
차갑지만 수줍음 많은 남자_슬픈 눈(강동원)
이름과 출생과 성장배경이 알려지지 않은 암살자. 자신을 키워준 병조판서(송영창)의 오른팔로 말없이 임무를 수행한다. 차가운 살인자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날이 한쪽에만 있는 칼을 주무기로 사용한다. 펜싱을 연상시키는 검술을 사용하면서 눈깜짝할 새에 적을 처단하는 것이 특징. 안성기에 의하면, “말수도 적고 말투가 느린 것이, 눈빛으로만 자신을 표현하는 슬픈 눈에 제격”이라고. 강동원은 슬픈 눈의 캐릭터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장면으로 남순과 슬픈 눈이 함께 술을 먹는 순간을 꼽는다. 냉혹한 암살자가 아닌, 수줍음 많은 슬픈 눈 본연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기자들에게 공개한 프로모션용 클립에서 선보인, ‘칼을 피해 허리 뒤로 꺾기’ 기술이 세간에 화제가 됐다. 와이어 없이 이를 직접 연기한 강동원은, “허리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는 말로 소감을 대신했다.
여성버전 우 형사_남순(하지원)
“말도 안 되는 애예요. (웃음) 저랑은 너무 달라요.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애죠.” 사극 출연은 두 번째이나, 여전히 누더기 남장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하지원이 깔깔거리며 설명한 그대로 남순은 천방지축 캐릭터의 전형. 안 포교 밑에서 범인을 잡는 여형사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 이명세 감독은 남순을 두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우 형사의 여자버전”이라 설명하기도 했다. 주무기로 사용하는 쌍비단도는 한때 시라소니가 주로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전설적인 칼. 작은 칼 두개가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어디로 날아가 꽂히던 재빨리 뽑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여자지만 남성스런 성격을 지닌 남순의 캐릭터를 설명해주며, 슬픈 눈과의 대결장면에서 탱고 동작이 응용됐다는 것이 무술감독의 귀띔이다.
누군지 모르지만, 유머는 아는 사람_안 포교(안성기)
지금으로 따지면 경찰서의 강력반장 정도의 위치이며, 언제나 제멋대로인 남순을 다독이고, 다그치고, 보살피는 게 주된 일이다. “때론 심각하고 때론 웃기면서 사투리와 표준말을 번갈아 사용하는, 알 수 없는 캐릭터이지만, 근본적으로 유머를 아는 사람. 마지막 장면에선 병판과의 멋진 대결을 선보이기도 한다”고 안 포교를 설명한 안성기는, “남순과 단둘이 있으면서 부녀 같고 동료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순간”이 안 포교의 캐릭터를 가장 잘 드러내준다고 말한다. 무기에서도 인간미가 느껴지는데, 누군가를 해하는 것이 아니라 제압하려 할 때 사용하는 봉이 그의 주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