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를 사랑한 남자, 장르를 파괴한 남자
장르의 컨벤션이라는 우상과 보수적인 가치를 파괴하길 서슴지 않았던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회고전이 6월18일부터 2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꽉 짜여진 장르영화의 틀로 영화를 익힌 뒤 훗날 이를 비틀고 전복했던 그는 미국 평단에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프랑스에서는 장르 전복, 자유로운 스타일, 풀어진 캐릭터 등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필름 누아르의 걸작 <키스 미 데들리>를 비롯해 <베라 크루즈> <어택> <지옥까지 10초>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조지 수녀의 살해> <그리솜 갱단> 등 그의 대표작 13편이 소개되는 이번 행사에서는 알드리치 감독의 열렬한 팬인 박찬욱, 오승욱 감독이 참여하는 심포지엄도 열릴 예정이다. 로버트 알드리치의 영화세계와 상영작 소개를 덧붙인다.
“로버트 알드리치의 예술적 기질에는 뭔가 있다. 그것은 알드리치로 하여금 그의 영화 속에 수없이 존재하는 명백한 속물성을 넘어서게 한다.”(영화평론가 앤드루 새리스) 28년 동안 30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던 알드리치는 니콜라스 레이, 앤서니 만, 새뮤얼 풀러 등 동세대 감독들에 비해 유독 화사한 조명의 바깥에서 존재해왔다. 일반적으로 알드리치라는 이름에서 떠오르는 작품들은 <더티 더즌> <베라 크루즈> <터치 다운> 같은 흥행작이거나 <키스 미 데들리> <어택>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처럼 강렬하지만 뭔가 불균형한 느낌을 주는 문제작들로, 존 포드로 대표되는 고전 할리우드영화의 안정과 조화, 그리고 유려함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알드리치의 거친 내러티브와 스타일이 앞서는 캐릭터, 그리고 거침없는 폭력성은 그의 사진을 선뜻 거장의 제단에 올려놓을 수 없게 한다. 새리스의 말마따나 그의 영화는 ‘명백한 속물성’을 품고 있다. 알드리치의 영화는 숭고한 이념이나 예술적 정화, 또는 세계의 통합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영화 속 배경은 아비규환의 정글이며, 그 안에 거주하는 주인공들은 오로지 충동과 욕망에 이끌리는 듯 보인다.
알드리치, 정의를 전복하다
만약 로버트 알드리치에게 예술성이 있었다면, 그 내용은 반정립을 통한 것이다. 그는 장르영화라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를 뒤틀고 어그러뜨림으로써 자신의 영화세계를 ‘정립’했다. 이런 점은 그의 영화감독으로서의 경력과 관련이 깊다. 알드리치는 록펠러 가문에 속하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났다. 그의 외삼촌은 넬슨 록펠러 부통령이었고 외가 친척들은 체이스 은행 등을 주무르고 있었다. 버지니아대학을 졸업하고 1941년 외가 친척의 도움으로 RKO 스튜디오에 입사한 그는 시나리오 보조에서 세컨드 조감독으로, 다시 조감독으로 빠르게 자리를 옮기며 당시 손꼽히는 최고 실력의 조감독으로 인정받았다. 게다가 장 르누아르, 막스 오퓔스, 찰리 채플린, 조셉 로지, 로버트 로센, 루이스 마일스톤, 에이브러햄 폴론스키 등 당대 대가의 조감독으로 활약한 경력을 고려해보면, 알드리치는 장르영화의 ABC를 이미 그때 깨쳤을 것이다. 이런 장르영화에 대한 숙달과 함께 그가 함께한 감독들 중 훗날 매카시가 주도한 ‘빨갱이 사냥’에 희생당한 이가 유난히 많았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채플린, 로지, 폴론스키, 로센 등 진보적 사상을 가진 감독들과 작업하면서 영화를 깨쳤고, 스스로의 좌파적 기질이 결합되면서 “사물을 전복하는”(비평가 엘렌 실버) 세계관을 쌓아나갔다. 장르에 대한 이해력과 반골기질을 갖춘 그의 다음 스텝은 이 장르를 파괴하는 것 외엔 없었다.
1951년부터 TV드라마를 만들던 그는 53년 영화 데뷔작 <빅 리거>와 이듬해 <랜섬> 같은 초저예산 B급영화를 연출한 뒤 TV를 떠나 영화계로 터전을 옮겼다. 54년작 <아파치>는 알드리치라는 이름을 알린 첫 번째 영화였다. 백인과 동등한 삶을 갈구하는 인디언을 내세워 수정주의 서부극의 시각조차 수정하려 했던 알드리치는 같은 해 <베라 크루즈>(이 영화에 감명받은 세르지오 레오네는 알드리치의 <소돔과 고모라>에 세컨드 조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를 만든다. 그는 이 영화에서 두명의 대립하는 주인공을 내세우지만 그들 사이의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서부극에 또 다른 균열을 만들어냈다. 탐욕에 눈먼 자들의 긴장감 넘치는 여정은 명예와 규율, 대의명분이 가득한 <역마차>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다.
알드리치, 장르를 전복하다
알드리치의 샴페인은 데뷔한 지 3년차밖에 안 됐던 1955년 화려하게 터진다. 필름 누아르의 후기 걸작으로 꼽히는 <키스 미 데들리>가 발표된 것. 거칠고 과장된 흑백화면 속에 과도한 폭력을 속도감 있게 담아낸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충만한 스타일과 함께 탐정영화의 무대를 축축한 뒷골목에서 정치의 영역까지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평론가 보드와 쇼메톤은 이 영화가 “14년 전 누아르라는 장을 열었던 <말타의 매>의 절망적 반대편에 선 영화”이며 누아르 시대를 마감하는 “어둡고 환상적인 결말”이라고 칭했다. 핵무기에 대한 은유와 냉전에 대한 풍자, 성배 신화를 뒤튼 듯한 이야기 구조, 그리고 거침이 없는 마이크 해머라는 캐릭터 등이 진짜 인정받은 곳은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카이에 뒤 시네마>에 의해 “원자폭탄시대의 최초의 감독”이라 칭송된 알드리치의 영향은 샤브롤에서부터 고다르까지 미쳤다.
<아파치>와 <베라 크루즈> <키스 미 데들리>는 장르를 전복시켰을 뿐 아니라, 알드리치 영화의 원형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알드리치 영화에서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하다. <베라 크루즈>에서 벤 트레인은 선인 역할에 해당하지만 멕시코 반군지도자의 “오직 돈 때문에 목숨을 거는 거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게 제가 아는 가장 합당한 이유 같은데요.” 그의 영화에선 악인이 항상 처벌되는 것도, 선인이라고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을 겪지 않는 게 아니다. 또 알드리치 영화의 주인공들은 항상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이들은 잔인한 세상에서 생존하려 애쓰는 남자들이다. 알드리치의 영웅들은 어느 악당보다도 일관되게 악하며, 자기중심적이고 시니컬하다.”(실버) <키스 미 데들리>의 마이크 해머는 잔인하고 비열하며 충동적이고 냉소적이다. 그에게서 어떤 대의명분이나 거창한 목표는 찾을 수 없다. 사회적, 또는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알드리치 영화의 특성 또한 이때부터 이미 시작된다. <키스 미 데들리>는 핵폭탄을 연상케 하는 ‘판도라의 상자’를 통해 냉전시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작품이다. 폭력에 대한 집착(“내 생각에 영화 속 폭력이 삶에서 폭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삶 속의 폭력이 영화의 폭력을 만드는 것이다.”- 알드리치), 조명과 앵글의 극단적인 표현양식 등 알드리치 영화의 다른 핵심요소도 이 시기에 만들어진다.
알드리치는 서부극과 누아르뿐 아니라 전쟁영화, 멜로영화, 호러영화, 재난영화, 스포츠영화, 시대극, 심지어 동성애 멜로영화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했다. 하지만 이들 영화의 기본적인 플롯과 캐릭터의 성향에서는 앞선 영화 세편에서 드러난 일관성이 꾸준히 유지됐다. 후기로 가면서 멜로드라마 성향이 강해지긴 했지만, 2차대전 전장에서 내부의 적에 맞서는 군인들(<어택>), 2차대전 직후 베를린의 폭탄처리반(<지옥까지 10초>), 독일군 요새로 투입된 사형수들(<더티 더즌>)은 모두 악당에 가까우며, 극한 상황에서 홀로 버티기 위해 애써야 하는 존재다. 이들 영화는 전쟁의 비정함을 고발하거나 베트남전을 비판하거나 보수적인 지배자들을 조롱했다. 알드리치는 비슷한 모양새의 일련의 영화들조차 다른 색깔과 감성을 입히곤 했다. <울자나의 습격>은 <아파치>와 같은 시대가 배경이고 다시 버트 랭커스터를 내세우지만, 주인공을 백인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베트남전의 악몽이라는 요소까지 심어져 있다.
알드리치, 할리우드를 전복하다
그의 반정립, 또는 전복 본능은 할리우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났다. 스튜디오 아래서 제한된 자금과 스케줄 안에 영화를 구겨넣어야 했던 그는 이런 상황을 혐오했고, <키스 미 데들리> 이후 자신의 영화사인 ‘어소시에이츠 앤드 알드리치’를 재빠르게 창립한다. ‘… 알드리치’가 창립작으로 할리우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빅 나이프>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에 너무 절묘하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실패를 겪었고, 자금이 달릴 때마다 알드리치는 스튜디오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다. 이 와중에 MGM에서 만든 <더티 더즌>이 당시 최고 흥행 신기록을 세우는 등 대성공을 거두자 그는 68년 빈 스튜디오 건물을 매입해 ‘… 알드리치’를 스튜디오로 탈바꿈시킨다. 하지만 <조지 수녀의 살해> 등이 연이어 참패를 기록하면서 스튜디오는 72년 다시 매각된다. 그러나 알드리치의 스튜디오에 대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72년부터 79년까지 미국감독협회장을 연임하면서 스튜디오와 협상을 벌여 감독의 창의력에 대한 권리를 크게 향상시켰다. 매년 미국감독협회 시상식에서 감독협회나 회원에게 특별히 봉사한 감독에게 로버트 B. 알드리치상을 수여하는 것도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74년 흥행작 <터치 다운> 이후 5편이 잇따라 실패하면서 그는 81년 <캘리포니아 걸스>를 마지막으로 은퇴했고, 83년 신장질환으로 사망했다. 그는 감독협회장을 맡은 이후 비밀 블랙리스트에 오른 듯 스튜디오들의 방해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평생을 기존 질서를 교란하고 뒤집으려 했던 알드리치는 말년까지 스튜디오와 주류영화에 대해 날카로운 날을 세웠던 것이다.
박찬욱 감독이 말하는 로버트 알드리치
안주하지 않는 그가 좋다
로버트 알드리치는 새뮤얼 풀러, 잉마르 베리만과 함께 내가 꼽는 톱 3 감독 중 한명이다. 베리만과 알드리치가 함께 있는 게 이상하다고? 알드리치 영화에선 인물의 도덕적 갈등, 딜레마, 죄의식 같은 게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그 점은 베리만과 일맥상통한다. 알드리치의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때 <베라 크루즈>였다. 보통 서부극과 달라서 그랬는지 아주 강한 인상이 남아 있다. 고등학교 때 비디오로 <더티 더즌>을 봤고 <울자나의 습격>도 그때쯤 본 것 같다. 나중에 영화광이 된 뒤 <키스 미 데들리>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를 접했다. 어쨌듯 그냥 초등학교 때 <베라 크루즈>를 봤을 때부터 알드리치에게 끌렸던 것 같다.
지금 관점에서 본다면, 알드리치의 영화에는 연출의 잔재주가 없다. 아주 스트레이트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화려한 기교 같은 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생략이 많은 것 같다.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하지 않고, 핵심만 추려서 보여주는 방식인 것 같다. 또 하나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반골기질 때문이다. <어택>에서 그랬고, <키스 미 데들리>에서도 그랬고, 세련된 어떤 미의식 같은 것, 그러니까 장르의 세공이랄까, 이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게 나는 좋다. 정치적으로 급진적이라는 뜻보다도, 당시 장르영화가 보여준 장르에 안주하는 태도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게 인상적이다. 그냥 장르를 변화시켜보겠다든가 새로운 장르영화를 만들겠다든가 이런 태도와는 다른 것 같다. 장르에 안주하는 태도가 가진 정치적 보수성에 대해서 재수없다, X까라, 그런 식으로 나간 거다. 실험정신 또한 대단하다. 그 사람의 작품은 상업적으로 고려된 기획작품들인데, 영화를 꼼꼼히 보면 다른 감독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한다. <키스 미 데들리>에서 크레딧이 거꾸로 나온다든가,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에서 교통사고 장면이 나올 때 크레딧이 나오는데 그게 굉장히 이상한 기분을 준다.
나중엔 그가 록펠러 가문의 인사라는 사실을 알고 더 좋아하게 됐다. 보장된 미래를 다 버리고 감독의 길을 간 거니까. 마음만 먹으면 기업을 물려받거나 정계로 갈 수 있었는데, RKO의 사환으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삼성가의 아들이 장준환이나 임상수 같은 영화를 찍는 건데, 보통 사람은 아닌 것이다.
감독의 입장에서 알드리치의 영향은 없지 않다. 잔기교를 빼고 스트레이트하게 뭔가를 진행하고 싶은 것, 그리고 아주 자세한 설명을 피하는 점 등은 배우려고 항상 노력한다. 자세한 얘기는 6월21일 심포지엄 때 하자. 좀더 보고 공부해서.
*이 글은 박찬욱 감독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