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섬
자신이 연출했던 TV시리즈 <차이나 스미스>의 캐릭터를 약간 변형해 만든 누아르영화. 11일 동안 촬영한 초저예산영화지만 팽팽한 구성이 돋보인다. 사립탐정 마이크 캘러헌은 옛 연인 프레네시로부터 남편 줄리언을 범죄 집단에서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줄리언은 세계적인 물리학자를 납치하는 범죄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 레즈비언을 암시하는 장면은 알드리치다운 면모. 영화 초반부, 프레네시는 나이트클럽에서 남성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프레네시가 사람들 앞에서 여성에게 키스하는 장면은 프로듀서가 적극 만류했다고 한다.
아파치
알드리치의 출세작. 최후의 아파치 전사 마사이에 관한 이야기다. 전설적인 족장 제로니모가 백인들한테 항복한 뒤 플로리다로 이송되던 마사이는 열차 안에서 탈출한 다음 체로키 인디언이 백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옥수수 씨앗을 받아 살던 곳으로 돌아오지만, 아파치족의 기개있는 삶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인디언을 완전한 주체로 세웠다는 점에서 인디언을 불쌍한 존재로 그리거나, 인디언과 백인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다른 수정주의 서부극과 다른 면을 보인다. <울자나의 습격>과 대구를 이루는 작품이기도 하다.
베라 크루즈
선과 악의 경계는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 차이는 얼마만큼인가. 남북전쟁 직후 돈벌이를 찾아 멕시코 내전 현장에 뛰어든 두 남자를 통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남군 장교 벤 트레인과 무법자 조 에린은 백작부인을 베라 크루즈까지 호위해달라는 괴뢰 황제 막시밀리안의 청을 수락한다. 백작부인이 유럽에서 용병을 데려오기 위해 금화를 싣고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백작부인과 모의해 황금을 빼돌리기로 한다. 자신의 이해에 따라 끝없이 편가르기를 계속하는 인간 군상을 알드리치 특유의 냉소를 담아 그린 대작이다.
키스 미 데들리
이 필름 누아르의 걸작을 놓고 “여기 내일의 범죄영화가 있다”고 말한 것은 클로드 샤브롤만이 아니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와 <포지티프> 등 프랑스 평단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직접적 영향력을 준 이 영화의 매력은 몰아치는 스피드와 강렬한 캐릭터에 있다. 미키 스필레인의 동명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강렬한 조명과 극단의 카메라 앵글 또한 인상적이다. 도로에서 누군가에게 쫓기는 크리스티나를 태운 탐정 마이크 해머는 낯선 존재들에게 납치됐다가 가까스로 살아난다. 비밀의 상자를 둘러싼 추적이 시작된 것이다.
빅 나이프
할리우드 스타 찰리 캐슬은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영화사는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재계약을 요구하고, 아내는 재계약을 하면 떠나겠다고 나선다. 찰리가 계약을 거부하고 영화계를 떠나려 하자 영화사는 그의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한다. 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극단적인 길밖에 없다. 할리우드와 스튜디오 시스템을 전면으로 비판하는 이 영화는 일반적인 드라마의 외양을 띠지만, 극단적인 조명과 현란한 앵글 등 양식적인 시각화를 통해 필름 누아르적 성격을 짙게 드러낸다. 베니스영화제 은곰상 수상작.
어택
“만약 우리 소대원 중 한명이라도 죽으면 당신은 살아서 못 돌아갈 거다.” 코스타 소위가 맞서야 하는 상대는 적군이 아니라 아군의 상관이다. 1944년 벨기에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의 전선은 미군 사이에 그어진다. 무능하고 비겁한 쿠니 대위는 자기 부하들을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그뒤에는 쿠니의 아버지로부터 도움을 얻어 정계에 입문하려는 발렛 중령의 힘이 존재한다. 코스타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홀로 돌파해야 한다. 전쟁이 무의미할 뿐 아니라, 참여하고 있는 모든 이를 파괴한다는 반전 메시지를 강렬하게 드러내는 작품.
지옥까지 10초
2차대전이 종전된 뒤 베를린에서 폭탄을 해체하는 대원들의 삶을 그린 영화. 비르츠와 괴르트너는 전우이자 연적이기도 하다. 둘을 포함한 대원들은 각자의 월급을 모아서 마지막에 살아남는 사람이 갖기로 약속한다. 잇단 사고로 대원들은 희생되고 마지막까지 남은 비르츠는 괴르트너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로렌스 바흐만의 소설 <불사조>를 각색한 이 영화는 전쟁이 남긴 상흔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에서 장 폴 벨몽도가 흘낏 보고 지나치는 영화 포스터로도 유명하다.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알드리치의 중기 걸작. 베이비 제인은 어린 날 보드빌 쇼의 스타였지만 이내 몰락한다. 대신 자매인 블랜치는 대스타로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블랜치가 의문의 자동차 사고로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뒤 둘은 한집에서 살게 된다. 휠체어에 탄 채 2층에 거주하는 블랜치, 그의 잔시중을 들며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베이비 제인의 관계는 때로 우스꽝스럽지만, 때론 으스스하다. 호러, 스릴러, 코미디, 누아르 요소가 어지럽게 뒤섞인 독특한 영화. 왕년의 스타 베티 데이비스와 조앤 크로퍼드가 촬영기간 내내 으르렁거렸다는 일화 또한 유명하다.
더티 더즌
개봉 당시 미국에서 흥행기록을 갈아치웠으며 한국에서도 <특공대작전>이란 제목으로 개봉돼 대성공을 거뒀던 영화. 군 감옥에서 사형 대기 중인 죄수 12명을 끄집어내 독일군의 한복판을 공격한다는, <실미도>를 연상케 하는 내용이다. 훈련 과정부터 다양한 캐릭터가 부딪히지만 라이즈먼 소령의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뭉친 이들은 마초의 강력한 응집력을 발휘한다. 알드리치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상업적인 작품에 속하지만, 아웃사이더들에게 무게를 실어주고 주류사회를 신랄하게 공격한다는 점에서는 일관성이 엿보인다.
조지 수녀의 살해
TV 장수 드라마에서 쾌활한 성격의 조지 수녀 역을 맡고 있는 준. 하지만 실제 삶은 딴판이다. 성질이 불같고 질투심이 강한 그는 젊은 연인 앨리스에게도 난폭한 태도를 보인다. 그의 성미를 감당하지 못하는 제작진은 조지 수녀를 극중에서 죽여 퇴출시키려 하고, 앨리스 또한 방송사 간부 크로프트에게 끌리는 눈치다. 레즈비언을 변태적 성격으로 묘사했다고 동성애자들에게는 비판을 받았지만, 당시로선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동성애라는 소재를 평범한 삶 안에 끌어들였다는 미덕을 갖고 있다. 개봉 당시 X등급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그리솜 갱단
제임스 해들리 체이스의 하드보일드 소설 <미스 블랜디시>를 각색한 범죄영화. 그저 목걸이가 탐나서 대부호의 딸인 바바라 블랜디시를 납치한 동네 건달들은 이 사실을 알게 된 가족 갱단인 그리솜 조직에 섬멸된다. 갱단의 리더인 어머니 글래디스는 돈만 받고 바바라를 죽이려 하지만, 바바라에게 첫눈에 반한 막내 슬림은 이를 적극 저지한다. 뒷골목의 어둠보다는 들판의 상쾌함을 강조하고, 하드보일드한 측면보다는 멜로드라마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더티 더즌> 이후 알드리치의 변화를 엿보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미합중국 최후의 날
수년 만에 숨막히는 남성들의 세계로 돌아온 알드리치의 정치영화. 살인 혐의로 군 감옥에 있던 전 공군장군 로렌스 델은 죄수들과 함께 탈옥한 뒤 대륙간 탄도탄 9기가 있는 핵 미사일 기지를 점거한다. 대통령을 상대로 한 그의 요구는 1천만달러와 에어포스 원으로 탈출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또 그는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미국의 비밀문서를 대중에 공개하지 않으면 9개의 미사일을 소련에 발사하겠다고 협박한다. 베트남 전쟁을 거친 화법으로 정면으로 비판한다는 점과 긴박감을 돋우는 분할화면 기법이 인상적이다.
캘리포니아 돌스
알드리치의 마지막 작품. 2인조 여자 레슬링팀 ‘캘리포니아 돌스’의 아이리스와 몰리는 매니저 해리와 함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시시한 경기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프로무대 진출. 어느 날 세계 챔피언과 비공식 경기를 벌이게 된 이들은 인생을 역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이 승부의 세계 이면에 추악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은 감지하지 못한다. 데뷔작 <빅 리거>와 최근 리메이크된 <터치 다운> 등에서처럼 알드리치의 스포츠영화에 대한 관심과 재능을 보여주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