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경찰영화가 몰려온다 [3]
2005-06-21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글 : 이종도

4. 촌(村)

전근대적 영웅과 근대적 영웅이 짝패를 이루는 버디무비 장르. 그러나 관객의 눈길은 전근대적 영웅에게 쏠리게 마련이다.

대표작 | <살인의 추억> <목포는 항구다> <마지막 늑대>
제작 중 | <야수>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살인의 추억>
<야수>

한국형 경찰영화는 전근대적 영웅의 기념관이라 할 만하다.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박중훈은 전혀 쿨하지 않은 전근대적 정서의 소유자다. 고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고 점쟁이의 말에 혹하며, 용의자에게 거침없이 분노를 폭발하며, 욕설을 늘 입에 달고 사는 그들에게서 관객은 오히려 애정을 느낀다. 그들의 비과학적인 수사태도는 작게 여겨지고 그들의 열정과 헌신은 크게 다가온다. 그들의 짝패는 통화 기록을 제시하거나(<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장동건), 라디오 신청곡 엽서의 시간대를 캐면서(<살인의 추억>의 김상경) 근거를 추적하지만 오히려 돋보이는 것은 직관과 열정으로 밀어붙이는 전근대적 형사들이다. 슬리퍼나 질질 끌고 다니는 무능한 형사지만 직관으로 아줌마 치마를 들춰 콘돔 속의 마약을 색출하는 <사생결단>의 도진광 경장은 그들의 자리를 잇는 후배형사라 할 만하다. <공공의 적>은 느슨하게 강철중과 김정학을 짝지우고,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박중훈과 장동건을 같은 조로 짠다. <살인의 추억>은 거짓말 안 하는 문서만 믿던 근대적 형사 김상경과 직관을 믿는 전근대적 형사 송강호를 대비시킨다. 이 대비는 상징으로만 그치지는 않는데, 말끔한 서울형사 조재현은 조폭의 근거지인 목포로 실제 내려가 어깨들을 위해 봉사하고, 과도한 업무에 지친 서울형사 양동근은 강원도 오지로 들어간뒤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영섭의 말대로 관객은 형사짝패 가운데서도 근대적 형사보다는 전근대적 형사에 더 많은 애착을 보이게 된다. 전근대적 형사를 통해 과거로 회귀하며 퇴행의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공공의 적2>에서 강철중의 매력이 반으로 줄어든 것은 학력과 지위가 높아지고 대신 관객의 정서를 건드릴 지점은 줄어든 데 있다.

이런 근대와 전근대의 대비는 흥미롭게도 범인에게도 해당된다. <공공의 적>의 펀드매니저 이성재, 또는 깡패에서 거물 벤처기업가로 발돋움한 <야수>의 보스 손병호처럼 범인은 신자유주의적인 시대의 산물이다. 지금 한국 경찰영화는 전근대적인 경찰로 하여금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의 질서에 기생하는 범인을 쫓게 하고 있다. IMF 이후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높은 실업률로 인한 한국사회의 정서적 박탈감을 형사영화는 이렇게 상상적으로 해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5. 이(異)

이종장르와의 친화력이 돋보이는 장르. 누아르, 미스터리와도 결합하며, 여성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대표작 | <잠복근무> <텔미썸딩> <썸> <튜브> <거울 속으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제작중 | <미스터 소크라테스>
시나리오 작업 중 | <6월의 일기> <교환살인> <강력반장 신선녀>


<잠복근무>

조폭영화와 경찰영화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명제는 적어도 신은경의 사례 앞에서는 틀리지 않는 얘기다. 여성조폭으로 조폭영화의 아이콘이 되었던 신은경이 이번에는 강력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성역할을 뒤바꾼 시도는 <잠복근무>가 조금 더 앞선다. 플레어스커트를 휘날리며, 세일러복 옷깃을 흩날리며 범인을 향해 다리를 쭉 뻗어 차는 김선아는 경찰영화가 매우 탄력적이고 융통성 있는 장르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로맨스, 코미디, 액션이 성역할의 전도와 함께 이루어졌다.

신입형사 에릭과 짝을 이룬 <6월의 일기>의 신은경은 여자 강철중이라 할 캐릭터. 지하철에 빈자리가 나면 목숨을 걸고 뛰어가고, 지하철 성추행범은 잡아서 성추행범이 한 대로 똑같이 복수를 해주는 남성적인 형사다. 에릭은 거꾸로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며 칼퇴근을 하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형사 캐릭터. 남녀의 역할을 뒤바꾸고 여기에 버디무비를 결합시켰다. 시나리오 작업 중인 <강력반장 신선녀>도 여성 강력반장 캐릭터를 내세우고 있다.

<미스터 소크라테스>

성장영화, 또는 미스터리와의 결합도 가능한 조합이다. <미스터 소크라테스>는 가족도 내팽개치고 친구도 팔아치우는 김래원이 조직에 의해 강력계 형사로 커간다는 줄거리다. <교환살인>은 히치콕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연상시키는 미스터리 스릴러로 자신이 희생자가 되는 게임에 걸려든 형사의 이야기다. 그는 어두운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는 연쇄살인범을 쫓아가는 한석규와(<텔미썸딩>), 빌딩 소유권을 둘러싼 연쇄살인범을 뒤쫓는 유지태(<거울 속으로>)의 동료일 것이다. 장윤현 감독이 지적한 대로, 후기 산업사회의 정신적 황폐와 제어할 수 없는 위험 요소, 정신질환 범죄의 증가, 범죄형태의 다양화가 형사영화의 장르를 다양하게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튜브>는 이런 고도 위험 사회가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망까지도 망가뜨릴 수 있음을, 그리고 위험사회의 위협에 제일 먼저 몸을 던져 막아내야 할 이가 바로 경찰임을 보여주었다.

경찰영화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성장가능성을 시험하며 범주를 확장했다. 경찰의 얼굴은 조금씩 더 구체적인 주름살과 상처로 리얼리티를 얻어왔으며,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들과 실패한 작품들 모두 한국형 경찰 영화 장르의 정착 여부를 타진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2005년 후반기와 2006년 앞서거니 뒤서거니 쏟아질 10개 작품은 한국형 경찰 영화가 장르영화로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지 아니면 정점을 지나 이제 바닥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가늠해줄 것으로 보인다. 엇비슷한 캐릭터와 안전운행으로 간다면 경찰 영화는 의외로 빨리 조로하며 조폭영화의 흥망을 답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형사영화의 관습들

강력반장은 기주봉 아니면 강신일?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주인공이 잠복하고 있으면 반드시 범인이 나타난다.

잠복근무는 무조건 하는 거다. 범인이 자기 집이 아니라 애인 집으로 갈 수도 있고, 오늘 밤이 아니라 내일 밤에 갈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주인공과 그 파트너가 잠복하고 있으면 범인은 나타난다. 조연이 주연에게 “범인이 나타났다!”면서 지원을 요청하는 형사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범인은 양동근 앞에서 달리다가 정진영 앞에서 붙잡히게 마련이다(<와일드 카드>). 혹은 길고 긴 기차 안에서도 하필 장동건이 숨어 있는 차량에서 격투를 벌이고야 만다(<인정사정 볼 것 없다>).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든지 하는 젊은 엘리트 형사라면 일단 실력을 의심해야 한다.

<목포는 항구다>의 이수철 형사(조재현)는 영리하고 야심있고 열정도 있지만 싸움을 못한다. 몸으로 때워야 하는 검거 현장에서 범인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머리 좋은 형사는 대부분 제구실을 못한다. <투캅스>에서 강직하고 능력있는 강 형사(박중훈)는 정석대로 심문하려 하지만 부패한 조 형사(안성기)의 자해전술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말 잘하기로는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지구를 지켜라!>의 김형사(이주현) 또한 병구에게 꽁꽁 묶이는 신세. 그들보단 몸으로 고생하는 박두만(<살인의 추억>의 송강호)이나 강철중(<공공의 적>의 설경구)이 한칼 하는 경우가 많다.

<와일드 카드>

▶대한민국 형사는 무조건 달린다.

우 형사(<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박중훈)는 형사란 무릇 운동화 끈을 단단하게 묶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방 형사(<와일드 카드>의 양동근)는 달리다보면 잡을 날이 있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언제나 달린다. 돈 많고 땅 넓은 미국 형사들이 자동차를 수십대씩 전복하면서 추격전을 벌인 다음 뒷감당을 걱정하고 있을 때, 골목길투성이 한국 형사들은 쌕쌕거리면서 이어지는 격투에 대비해야 한다. 얼마 전 랜드로버를 몰고 다니는 강성주(<썸>의 고수)가 대한민국 형사의 신세기를 예고하기는 했지만, <썸>의 배경은 매우 가까운 미래였다.

▶대한민국 강력반장은 대부분 착하다.

할리우드영화의 클리셰를 모아둔 사이트 무비클리셰닷컴은 ‘police’ 항목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상사는 언제나 스타형사를 괴롭히고, 자르겠다고 협박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강력반장은 무뚝뚝해도 착하다. 서랍 안에 볼펜 한 자루밖에 없는 강철중을 감싸주고 누명 쓴 강성주를 기다려준다. 외로운 형사들이 돌아가 쉴 수 있는 단 한명의 품이 있다면 그건 강력반장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대한민국 강력반장은 기주봉 아니면 강신일이다.

형사가 나오는 한국영화를 찾고 싶은데, 막막하다 싶으면, 기주봉이 출연한 영화를 검색하면 된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강력반장, <와일드 카드>의 김 반장, <지구를 지켜라!>의 이 반장, <튜브>의 중부서장…. <공공의 적>에 마약을 빼돌렸다가 자살한 형사로 출연한 적도 있지만 드라마까지 더해서 주로 반장과 서장 등을 섭렵했다. 뒤늦게 등장한 라이벌은 <공공의 적>의 엄 반장으로 경찰경력을 시작한 강신일. <썸>에 오 반장으로 출연했고 <그린 로즈>에는 일반형사로 출연했다.

▶대한민국 경찰은 국밥과 자장면만 먹고산다. 그래서 용의자도 국밥과 자장면만 먹어야 한다.

국밥과 자장면은 형사영화와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메뉴. 할리우드 경찰들이 왜 도넛만 먹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한민국 형사들은 재빨리 먹을 수 있는 일품요리를 선호해서 그렇지 않은가 싶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의 여경진 순경(전지현)은 잠복 도중 시리얼이 들어 있는 요구르트를 먹었다가 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대한민국 강력반 형사들은 주먹으로 먹고사는 놈들보다 주먹을 더 잘 쓴다.

아시안게임 사격 은메달리스트 출신이어서 특채로 형사가 된 강철중. 그는 서류가 잘못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주먹을 애호하고, 오직 주먹만으로 건달 대여섯명을 혼자 상대한다. 복싱이나 유도나 이종격투기가 아니라 사격선수 출신인데도. 그 밖에 다른 강력반 형사들도 범인한테 얻어터지다가 힘이 다해 범인을 놓치는 경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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