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홍상수 영화에 아주 가까이 있다
그런 다음 상원과 영실은 미도 여관에서 아침밥을 먹는다. 그 둘은 죽기 전에 서로 다른 행동을 한다. 상원은 LG25 편의점에 가서 공책과 펜을 산 다음 (숏17) 여관에 돌아와 무언가를 쓴다. 영실이 “뭐하는 건데?”라고 묻자 상원은 “어, 죽기 전에 모든 걸 다 쓸려구”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썼는지는 끝내 알 수 없다. 영실은 상원과 수면제를 사기 위해 약국을 돌아다니다가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다. 상원이 “커피 마시려구?”라고 묻자 “아니, 그냥 넣어놓는 거야, 나중에 누가 보면 공짜라고 좋아하겠다”라고 대답한다. 그들이 떠나자마자 기다린 것처럼 할아버지가 나타나 거기서 커피를 뽑아간다. 하지만 영실은 그 사실을 모른다. 두 행위의 차이는 상원이 쓴 유서의 내용을 그 자신은 알지만 우리가 모르는데, 영실이 한 자선의 결과를 그녀는 모르지만 우리가 안다. 영화를 보는 우리를 홍상수는 밀고 당긴다. 그런 다음 상원은 영실을 종로에 내버려둔 채 갑자기 혼자 택시를 타고 그 자리에서 떠나는데 집에 가지 않고 서울역 앞에서 내린다. 영실은 택시를 타고 상원을 쫓아온다. 그리고 나서 상원은 지하철에서 전동차를 기다린다. 거기까지 영실은 따라온다. 그 둘은 함께 계단을 오른다. 숏23 종로 거리에서 숏27 지하철 계단까지의 대목이 이상한 것은 만일 내레이션 없이 보면 마치 상원이 영실에게 자살하자고 말한 다음 혼자 도망쳐서 집에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영실이 오자 다시 함께 자살하러 가는 것 같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상원은 “전동차에 치어 죽으려고 기다렸다. 계단을 오르면서 그냥 같이 죽자라고 영실에게 말했다”라고 (내레이션으로)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거리. 혹은 행동과 생각 사이의 불일치. 여기서 더 이상한 순간. 택시를 혼자 타고 가는 상원은 자기에게 말한다. “영실에게 공정해지고 싶었다” 공정해지고 싶다고? 무엇을? 무엇에 대해서? 함께 죽을 수 있는 결심에 대해서? 아니면 죽지 않을 수 있는 기회에 대해서?
둘은 대우빌딩 앞을 울면서 지나간 다음 남산으로 올라가는 건널목에서 남산 타워를 쳐다본다. 상원이 “저기도 한번도 안 가봤는데”라고 하자 영실은 “다음에 가”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카메라는 물끄러미 남산 타워를 본다. <극장전>에서 두 번째 보는(그리고 영화 속의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보는) 남산 타워. 상원은 골목 구멍가게에서 “말보르 레드 하나 주세요”라고 하자 가게 아줌마는 “양담배는 안 팔아요”라고 (이상하게) 대답한다. 상원은 대신 88라이트를 산 다음 골목길을 올라가면서도 “말보르 레드 펴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린다. 말보르 레드를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환기시킨)다. 여기서 숏8, 종로 거리에서 영실을 만나 걸어가는 상원의 내레이션을 함께 떠올릴 것(“괜히 담배가 피우고 싶어서 담배 한갑을 샀다”). 그러니까 상원이 영실을 만나 호프집을 지나서 미도 여관에 가기까지가 여기서 느슨하게 반복되고 있다. 둘은 호프를 마시는 대신 “소주랑 오징어”를 산 다음 여관으로 향한다. 이상한 것은 상원이 담배 피우는 장면은 여기서 영화 속의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없다. 그런 다음 둘은 대흥장 방에서 수면제를 나누어 먹는다. 이 대목은 <극장전>에서 한 장소에서 가장 복잡하게 편집되어 있다. 시간 단위로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수면제를 먹은 다음 먼저 깬 영실이 화장실로 달려가는 장면은 그 좁은 방안에서 줌아웃한 다음 팬으로 따라간다. 사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줌에 대해서 멋있게 설명한 모든 글을 무력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영실은 여관 창문 앞에서 바깥을 쳐다보면서 말한다. “눈이 온다, 눈 와.” 창문 바깥에는 눈이 내린다. 그리고 음악이 흐른다. 자살을 앞둔 커플을 위해서 하늘은 눈을 내려준다(그리고 물론 이 눈은 영화를 위해서 뿌린 것이다).
이 믿을 수 없는 촌스러움, 어처구니없는 숭고함. 하늘이 죽으려는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만 우리는 그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다고 가정된 대타자의 그 우스꽝스러운 과장. 영실은 먼저 일어나서 상원의 휴대폰으로 그의 집에 이 사실을 알린 다음 혼자 대흥장을 떠난다. 나는 이 숏39가 참 이상하게 보인다. 우선 영실이 정말 죽을 생각이었다면 먼저 일어난 다음 여전히 누워 있는 상원을 보고 왜 수면제를 더 먹지 않은 것일까?(말하자면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쥴리엣>이 아니다) 그런 다음 왜 상원을 깨우지 않고 혼자 떠나는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 영실은 상원의 첩이기 때문에 혼자 떠난다. 그녀는 상원의 집에 알릴 의무는 있지만 상원과 함께 병원에 갈 자격이 없다. 첩의 자리에 있고자 한 것은 그녀 자신의 자발적 의지이다. 눈 내리는 아침 대흥장 여관 앞에서 영실은 신발 끈을 고쳐 매고 혼자서 길을 떠난다. 이 숏39는 영화 안의 영화에서 상원이 없는 유일한 숏이다. 혹은 영실의 숏이다(그런데 영화 안의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최영실만의 숏은 없다). 그런 다음 영실은 화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처연한 음악. 영화 안의 영화에서 영실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사실 여기까지는 <극장전>을 보면서 우습긴 하지만 (최영실의 말을 빌리면) “영화를 잘못 보았다는 생각에” 돌아보게 되지는 않는다.
가족구조에 대한 너무 열린 해석
그런데 숏40부터 (동수의 말을 빌리면) 생각을 해야 한다. 영실은 상원의 휴대폰으로 여자와 통화를 했는데 한 남자가 이 여관에 들어선다. 이 남자는 우리가 영화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다. 이 남자는 방안의 상원을 깨워서 이관희 내과로 데려간다. 병실에 누운 상원에게 이 남자가 “힘들지, 아퍼?”라고 하자 상원은 “괜찮아요, 아저씨. 그럼 인제 내가 아버지라고 불러야 돼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이 남자는 당황하면서 “뭐라고? 참, 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라면서 담배를 피우러 나간다. 가장 상투적인 가설. 아저씨를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냐고 물어볼 수 있는 상대는 계부뿐이다. 그러니까 상원이 괴로운 것은 자신의 어머니가 재혼을 했기 때문에 새아버지에게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숏2, 형은 어머니와 따로 살면서 상원에게 “일요일 날 엄마 집에서 보자”고 말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은 따로 있는 것일까? 상원은 “빨리 돌아가야 덜 혼날 것 같아” 링거를 꽂은 채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집에서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는다. 상원이 영실을 기다리기 위해 숏6에서 본 연극 <어머니>에서 이틀을 굶고도 어머니는 염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 밥을 구걸하러 다니는 헌신적인 사랑을 보인다. 상원의 집에서 어머니는 보자마자 상원에게 “너 어디서 밖에서 죽는다고 지랄이니! 니가 뭐 한다고 자살이야, 왜 자살 소동을 벌리고 난리야! 나가 죽어, 죽지 왜 들어왔어, 이 웃기는 놈의 새끼!”라면서 야단을 친다. 영화 속의 영화에서 어머니의 그림자는 내내 상원을 쫓아다닌다.
일요일에 엄마 집에서 보자고 형과 약속한 다음(숏2), 영실을 기다리면서 연극 <어머니>를 보고(숏6), 그런 다음 자살 소동 끝에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는다(숏46). 그 자리에 상원과 어머니, (아저씨인데 아버지라고 해야 하나요, 라고 상원이 물어본) 남자, 상원과 악기점에서 헤어진 형, 그리고 한 여자가 소파 왼쪽 구석에 앉아 있다. 아마도 이 여자는 영실의 전화를 받은 여자일 텐데 상원과의 가족관계는 알 수 없다. 어머니가 상원에게 “니가 (자살하려고 한) 뭔 이유가 있어, 말해봐”라고 하자 상원은 “저요, 평소부터 좀 어머니랑 의사소통이 힘들었어요… (중략) 항상 어머니가 저를 제대로 이해 못하신다고 생각을 하고 19년 동안 살았습니다” 이 대답은 숏16, 미도 여관에서 영실의 질문에 대한 잘못된 대답에 대한 대답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야단칠 때 남자는 상원을 위해서 “지딴엔 어려웠나보죠, 누나가 좀 어려운 게 있어요”라고 말한다. 이 순간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다. 상원이 아저씨이지만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냐고 물어본 남자가 상원의 어머니를 누나라고 부른다. 이 호칭은 두 가지로 읽힌다. 하나는 정말 누나인 경우이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어머니의 남동생이자 상원의 외삼촌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상원은 정말 이상하게 외삼촌을 부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원의 어머니와 친하게 알고 지내는 동생이며, 상원은 이 (연하의) 남자가 어머니에게 관심이 있어서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고 싶어한다고 평소에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이상하다. 그 말을 듣자마자 어머니는 이 남자에게 “니가 뭘 아니, 뭘 안다고 떠들어?”라고 야단친다. 상원의 쪽에서는 아는 아저씨로 읽히고, 상원의 어머니쪽에서는 친동생으로 들린다.
한 가지 더. 상원의 자살은 그냥 소동으로 끝났다. 그런데 일요일에나 보자고 말한 상원의 형도 그 자리에 불려왔다. 형이 왜 상원이 야단맞는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물론 이 자리에 상원의 아버지는 없다. 정말 이 남자는 아버지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일까? 그런데 상원은 그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가 아파트 옥상에 오른다. 영화 속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상원은 “엄마, 엄마”라고 하늘을 향해서 통곡하듯이 외친다. 이 부름은 이상하다. 차라리 우습더라도 아버지를 부르거나, 혹은 영실을 불렀다면 이상하게 생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야단맞고 올라와 “엄마”를 부를 때 그 호칭은 동일하게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괴로움의 대상과 구원을 요청하는 대상이 일치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이 부름은 계모에게 야단맞고 옥상에 올라와 친모를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부름에 대한 상대 숏이 (우습지만 의미심장하게도) 저물어가는 하늘에 뜬 해인 것은 마치 상원의 어머니가 세상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한번. 형과 동생이 만난 다음, 형은 동생에게 “일요일 날 엄마 집에서 보자”고 말한다. 2년 만에 만난 여자친구는 상원에게 첩 노릇을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런 다음 자살 소동을 벌이고 나타난 남자에게 상원은 아저씨라고 불러야 할지,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지 결정을 못한다.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야단맞은 다음 상원은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서럽게 어머니를 부른다. 나는 이보다 더 이상한 집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 속의 영화는 여기서 난처하게 끝난다(그러나 이 이상한 가족의 모습이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영화 속 영화라는 것이 자명한 것은 숏49에서 배경으로 흐른 음악이 숏50, 종로 시네코아에서 영화 상영이 끝난 다음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 문이 열리자 영화 안의 영화의 영실을 연기한 최영실이 나온 다음 동수가 나온다. 뒤따라 나오기 때문인지 동수는 최영실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다(그러나 상원은 그저 스쳐 지나가다가 광신 안경점에서 영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동수는 영화가 끝난 다음 나와서 극장 복도에서 휴대폰을 받는다. 동수가 휴대폰을 받은 다음 영화관을 나서려 할 때 포스터가 붙어 있다. 그걸 카메라는 동수가 프레임 아웃된 다음에도 크게 보여준다. 그 포스터에는 영화 속 영화의 상원의 얼굴이 보이고, 그 아래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이형수 감독의 영화적 풍경화전”이라고 써 있다.
동수를 통해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
그 포스터를 보면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았고 세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알게 된 것은 이제까지 본 것이 (홍상수가 아니라) 이형수의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나는 그 사실을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그 다음 그 영화의 감독이 이형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그 포스터를 보면서 상원이 이형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다음 떠오른 질문. 영화 <극장전>은 홍상수가 만든 영화 안에 이형수가 만든 영화가 들어가 있는 영화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홍상수가 만든 영화) 두편을 붙여놓은 것이 아니라 (홍상수가 만든) 한편의 영화 안에 (이형수가 만든) 영화를 본 다음 나온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라고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이 영화는 영화의 절반까지 진행한 다음 다시 시작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 안의 영화, 그러니까 우리가 본 것이 이형수의 영화가 아니라 동수가 본 이형수의 영화라면 어떻게 되겠는가?(혹은 최영실이 본 이형수의 영화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후자의 질문에 대해서 나는 마지막에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다른 표현. 숏49까지 영화를 본 것은 우리가 아니라 동수이며, 우리가 본 것은 동수(가 본 영화)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이형수의 영화 전편이 아니라 이형수의 영화를 보고 있는 동수의 주관적인 경험을 따라가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이것을 영화의 주제음악이었던 사운드(숏49, 영화 안의 영화의 마지막 장면)가 그 다음 숏에서(숏50,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사람들) 바로 화면 안의 그 소리의 근원을 알 수 있는 영화관 안에서 상영되었던 영화의 객관적 사운드로 옮겨갈 때 그 질문이 떠올랐다.
동수가 동창회 부회장과 휴대폰으로 이야기한 내용에 따르면 지금 이형수의 회고전에서 단편 세편과 장편 하나를 상영 중이다. 우리가 본 것은 그 네편의 영화 중 한편일 것이다. 동수는 왜 이 영화를 선택해서 본 것일까? 단지 시간이 맞는 영화는 이 영화 한편뿐이어서?(동수가 영화 안의 영화, 그러니까 우리가 동수를 통해서 본 영화가 동수의 이야기라는 걸 최영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한참 뒤, 숏74 횟집에서이다) 그렇다면 보지 않은 나머지 세편의 영화는 어떤 영화일까? 그런데 이형수가 만든 영화에서 나는 풍경화라고 할 만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구태여 풍경화라면 두번의 남산 타워와 미도 여관 창문 너머로 보이던 북악산이 (줌아웃으로 멀어져 가는 순간만이)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동수는 이형수의 영화를 보는 내내 풍경화의 숏을 눈여겨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풍경화의 숏을 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동수는 풍경화의 숏을 보지 않은 것일까? 그의 동창들이 말하는 이형수의 영화에서 풍경화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홍상수는 그냥 그 포스터를 본 다음 개의치 않고 동수를 따라간다. 동수는 계단을 따라 걸어내려가는데 그 앞에 최영실이 걸어내려가고 있다. 그런 다음 극장 후문으로 빠져나오는데 동수가 뒤따라 나온다. 그걸 카메라는 줌인한다. 이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 장면이 인상적인 것은 줌 때문이 아니라 그 구도 때문이다. 이 구도는 만든 것이다. 이것이 만들었다는 뜻은 <극장전>에서 대부분의 구도가 무심하게 그 존재를 느낄 수 없는 자리, 상상선 안의 가장 안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데 비해(종종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의 놀라움, 아! 저 자리가 비어 있구나, 라는 발견) 오직 이 구도만 그 바깥으로 나와서 계속 걸어오면 인물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자리에 가 있다. 극장 바깥으로 걸어나오는 이 장면이 <극장전>에서 이 구도의 첫 번째 순간이다.
하지만 동수는 최영실과 다른 방향으로 나온 다음 커피숍에서 그의 동창을 만난다. 그 동창과 만난 자리에서 동수는 말보르 레드를 피우고 있다. 동창이 “이거 영화 보고 산 거냐?”라고 묻자 동수는 “원래 가끔 펴”라고 대답한다(물론 이형수의 영화에서 숏30, 대흥장에 가기 전에 골목길 가게에서 상원이 말보르 레드를 사려고 했던 사실이 떠오를 것이다. 상원은 사지 못했는데 동수는 말보르 레드를 피우고 있다). 그 동창의 아내, 그리고 그 아들과 딸과 함께 중국집에 가서 점심을 먹는다. 동창과 만난 대목에서 내가 본 장면은 점심을 먹은 다음 동창의 차를 타고 멀리 북악산을 배경으로 지나갈 때이다. 사실 이 장면에서는 배경음악이 나와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불현듯 똑같이 이상했던 장면, (이형수의 영화에서) 미도 여관에서 일어난 다음 상원과 영실이 밥을 먹을 때 창문 너머로 북악산이 줌아웃으로 보였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에도 배경음악이 나와야 할 이유가 없는데 음악이 나온다. 배경음악은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형수의 영화에서 8번이 나오고, 홍상수의 영화에서 6번이 나온다(그러므로 정확하게 대구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형수의 영화에서 음악이 나오는 장면은 그 장면을 동수가 인상적으로 보았다는 말로 다시 써도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동창의 차를 타고 북악산을 지나갈 때 동수는 이형수의 영화에 대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무리하지 않다고 내가 생각한 것은 낙원상가 앞에서, 동창의 차에서 동수가 내린 다음 거리에서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최영실이 사인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 뒤를 따라갈 때이다.
거기서 영실이 앞에 서고 동수가 뒤에 따라가는데, (시네코아 후문에서 나오는 장면의 구도의 두 번째 반복), 그때 동수는 MP3를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그때 요한 스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이 뜬금없이 나온다(그런 다음 이 음악은 다시 나오지 않는다). 허문영은 이것을 “동수는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 영화 속으로 다시 들어온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이 장면은 이형수의 영화가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산 타워가 보이는 낙원상가의 장면은 이형수의 영화 첫 장면(에서 상원의 형이 걸어가는 장면)과 느슨하게 겹친다. 동수는 최영실을 뒤따라가고, 최영실은 (이형수의 영화에서 상원과 영실이 마주친) 광신안경점에 들린다. 그 안경점에서 나올 때 동수는 최영실에게 처음 인사한다. 상원과 영실이 만난 것처럼 동수와 최영실도 안경점 바깥에서 이야기한다. 동수가 “저 혹시 연락처 미리 알아놀 수 있을까요?”라고 묻자 최영실은 처음 보는 이 남자가 미심쩍었는지 “글쎄요, 오늘 처음 뵙는데, 저기 나중에 저녁에 만나게 되면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아요”라고 대답한다. 이제 동수는 최영실을 다시 만나려면 꼼짝없이 저녁 6시에 있을 동창회에 가야 한다(상원은 영실이 끝나는 저녁 7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말하자면 여기까지는 이형수의 영화가 그대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동수가 악수를 청하자 최영실은 “네, 알겠어요, 영화네요, 그죠?”라고 말한다. 물론 동수는 연극을 보러 가지는 않는다. 그 대신 남산 타워에 간다.
한 가지 기억을 환기할 장면. 동창의 차에서 내리고 난 다음 (그러니까 최영실을 보기 전) 동수는 남산 타워를 본다. 그걸 보면서 “저건 아무 데서나 보네”라고 말한다. 그 말은 동수 역을 맡은 김상경이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에서 경주의 호텔에서 호수를 내려다보다가 거기 떠 있는 오리배를 보고 한 대사를 정확하게 반복한 것이다. 그런데 남산 타워는 오리배가 아니다. 오리배를 춘천에서 본 다음 경주에서 다시 보면 “저건 아무 데서나 보네”라고 할 수 있지만 남산 타워는 원래 그 자리에 있는 것이고, 동수가 자리를 옮겨가면서 남산 타워를 보는 것이다. 남산 타워의 장면은 <극장전>에서 세 번째 나온 것이며, 이형수의 영화에 두번 나왔지만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이번에 나온 다음 다시 나오지는 않는다. 그 대신 이번에는 동수가 그 남산 타워가 있는 남산에 올라간다. 상원은 남산 타워에 끝내 올라가지 못했다(숏29, 남산 올라가는 건널목에서 상원이 남산 타워를 보면서 “저기도 한번도 안 가봤는데”라고 말한 장면). 그런데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최영실과 헤어진 다음 동수는 남산이 바로 코앞인 종로에서 남산 타워에 가는 케이블카 입구까지 택시를 타고 올라올 때이다. 마치 남산에 걸어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하여튼 이 영화에서 아무도 걸어서 남산 타워까지는 가지 못한다. 그런데 이형수의 영화에서 상원이 영실에게서 도망치려 했을 때 택시를 탔고, 그걸 영실이 택시를 타고 뒤쫓아와 결국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택시는 이 영화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일종의 매듭이다. 택시에서 내린 다음 동수는 걸어올라온다. 걸어올라가면서 동수는 휴대폰에서 울리는 도원경의 <다시 사랑한다면> 따라 부른다. 그 노래는 이형수의 영화에서 영실이 상원에게 첩이 되겠다고 말한 다음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이다. 그 노래에 대해 상원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노래를 동수가 다시 부른다. 동수의 노래는 영실의 노래를 따라 부른 것일까, 아니면 영실의 노래에 대한 대답일까? 이상한 것은 동수가 부르는 대목은 영실이 부른 대목과 (후렴구를 제외하면)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벼운 추억만 서로의 가슴에 만들기로 해요, 이젠 알아요, 너무 깊은 사랑은 그런 슬픈 사랑을 가져온다는 걸 그대여, 빌게요.”
그런데 오후 6시에 동창회에 나타난 최영실은 도원경의 <다시 사랑한다면>의 (동수가 부른) 그 대목을 조금 앞부터(“많은 약속 않기로 해요, 다시 이별이 와도 서로 큰 아픔 없이 돌아설 수 있을 만큼 버려도 되는 가벼운 약속만…(중략)”) 다시 부른다. 그런 다음 최영실은 그 자리를 떠난다. 떠나는 그녀를 동수가 뒤따라 나와 인사를 한다. 이 장면의 구도는 시네코아에서 걸어나온 장면의 구도의 세 번째 반복이다. 동수는 최영실을 불러 세운 다음 그 노래를 시킨 사람이 자기라고 말한다(“저 아까 노래 시켰잖아요”). 최영실은 동수에게 지금 이형수 감독이 입원한 경희대병원을 갈 거라고 말한다. 따라가겠다고 말하자 최영실은 혼자 가겠다고 말한 다음 그래도 괜찮으니 따라가겠다고 말하자 “왜 그러세요, 참 이상한 사람이야, 참”이라고 말한 다음 동수가 “여배우 하는 거 힘들죠, 제가 그럼 이상형이라 걸 말해볼까요”라고 말하는데 그 말을 듣지 않고 택시를 타고 떠난다. 그런데 최영실이 듣지 않고 떠난 것 같은 이 말은 뒤에 대답된다. 하지만 잠시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