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가 아닌 일상의 판타지
<싱글즈>의 노혜영 작가는 “나난(장진영)은 내 모습에 가깝지만 동미(엄정화)는 우리가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들을 해내는 캐릭터”라고 말하면서도 영화가 개봉하고 난 뒤의 에피소드를 덧붙였다. “일을 하고 싶어서 고민하던 후배가 <싱글즈>를 보고 창업을 결심했다고 전화를 했다. 스물아홉이니까 결혼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에게 떠밀렸던 친구도 결혼을 미루기로 했다고 하더라. 괜히 민폐만 끼친 게 아닌지 모르겠다.” (웃음) 누구나 동미처럼 창업을 하고 미혼모가 되는 길을 감당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동미는 어느 정도 판타지다. 그러나 그 판타지는 백마 탄 왕자님이나 완벽한 솔메이트를 기다리는 동화가 아니다. 하고 싶고, 누군가는 할 수도 있는, 일상의 판타지인 것이다.
대부분의 드라마와 영화는 <싱글즈>와는 달리 작위적이긴 하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이신영(명세빈)은 치과 의사와 항문외과 의사, 병원장 아들을 두루 섭렵하는데, 그 정도 종합병원 아들이라면 준재벌은 되지 않을까 싶다. 방앗간집 셋째딸 삼순은, 파리 유학과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인 직장을 고려하더라도, 경제적인 차이가 엄청나서 통성명하기도 힘들 것 같은 남자들만 만난다. 헤어진 남자친구 앞에서 넘어졌더니 그보다 580배쯤 멋진 남자가 위로하더라… 는 기적은, 진짜 기적이다(<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신기하고 신기하다. 그러나 그런 작위를 덮는 것은 캐릭터 자체, 연애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다. 시청자는 삼순과 미자와 신영과 대화할 수 있다. 이 남자가 마지막 사랑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나이 먹으니까 소주를 못 마시겠다는 한탄을 나눌 수 있다. 인생이 복잡하다 해도 대략 일과 사랑(혹은 가족)쯤으로 그 핵심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신데렐라다운 설정은 그 가운데 복권 당첨을 기대하는 소박한 환상쯤이 아닐까. 그리고 누구나 경험했듯 사랑이란 복권당첨처럼 느닷없고 기대 이상이다.
스물여덟 초입, 여동생이 결혼했다. 음… 그럴 수도 있지 뭐, 잘됐다, 이젠 혼자 살 수 있잖아… 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다가 일년 만에 머리를 하러갔다. 그것도 파마를 했다. 편집장에게 동생이 먼저 결혼한다고 말했더니 마감 중인데도 머리 하라고 반차까지 내주었다. 커리어 우먼처럼 입고(커리어 우먼은 아니지만 남들이 착각하길 바라면서) 들어간 결혼식장. 얼굴도 모르는 아줌마들이 어떻게 알아봤는지 몰려들어, 미리 의논이라도 했는지, “동생이 먼저 결혼해서 어쩌니”라는 똑같은 대사만 되풀이하기에 도망나왔다. 그날 고향 친구와 마주앉아 지독하게 맛이 없는 스파게티를 먹고 나서 어리게 보이는 옷들을 샀다. 지금까지 한번도 못 입었다.
삼순을 비롯한 노처녀들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 <섹스 & 시티> <앨리의 사랑만들기>의 그림자를 밟고 있다. 일은 잘하지만 남자 앞에선 허둥대고 매일 아침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이 남자 저 남자를 품평하는 일상은 그들을 보고서야 싱글들의 방구석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올드미스…>의 김석윤 PD는 미자와 현우와 정민의 삼각관계를 설명하면서 “현우를 마크 다아시(콜린 퍼스)에게, 정민을 대니얼 클리버(휴 그랜트)에게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고도 했다. 그러나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법이고, 다른 무엇도 될 수 있는 법이다. 우리의 현실이 스민 대한민국 노처녀들은 같은 또래에게 동지이고 어린 여인들에게 선배다.
올드 미스가 아니라 ‘싱글’
꼬장꼬장한 노처녀를 보고 자란 1980년대 소녀들은 노처녀만은 결코 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을 것이다. 어쩌면 20년 전엔 그 모습이 진짜였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문제가 있기에 아직 결혼을…?”이라는 질문을 되풀이해 듣다보면, 웬만큼 의지가 강하지 않고서야, 스스로도 하자있는 인간이라고 믿게 될 수 있다. 그러나 2000년대의 소녀들은 다르다. <올드미스…> 게시판에는 “90년대에도 사람이 태어났나? 그 대사 너무 웃겼어요. 제가 90년대생인데, 저도 나중에 언니들처럼 되고 싶어요”라는 글이 올라 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올드 미스가 아니라 싱글을 보았을 것이다. 라디오 방송국 성우 미자, 인테리어 디자이너 윤아, 빙송사 엔지니어 지영. 미자를 빼고는 집에서도 독립한 이들은 이십대가 꿈꾸는 아기자기한 아파트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 그것은 하이틴 로맨스가 북돋운 판타지에 비해 훨씬 내용있고 가능성 있는 판타지다.
세 번째 시즌 ‘콘트라 섹슈얼’까지 내놓은 <싱글즈 인 서울>은 이십대의 롤모델로서 삼십대를 보여주는 직접적인 케이스다. <싱글즈 인 서울>은 매 시즌 주제를 정해 어느 정도 성공한 싱글들의 나날을 스케치하는 프로그램. 온스타일의 김제현 팀장은 피드백이 가장 왕성한 이 시리즈 게시판에 주로 이십대 초반 대학생들이 호감을 표하고 있다고 말했다. 출연진인 인터넷 쇼핑몰 사장과 스틸라 브랜드 매니저, 광고대행사 AE, YTN 뉴스앵커 등은 화사해 보이지만 피곤하기도 한 일상을 보여주고, 살면서 체득한 생활의 지혜를 전수한다. 내가 대학에 다니며 되고 싶었던 여성의 모습이 그 프로그램엔 현실로 존재한다. 독한 여자가 아니라 그저 진짜 사람으로.
계단이 몹시 가파른 용산CGV 극장 앞에서 세살 많은 선배를 만났다. 팔랑거리는 스커트 아래 하이힐을 신고 있던 그녀는 계단에서 철퍼덕 넘어졌고, 두세번 연달아 떨어졌고, 내가 보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활짝 웃으며 “안녕”이라고 인사했다. “…안 아파요?” 매우 자주 평지에서 넘어지거나 문틈에 손가락이 끼이거나 하는 일이 벌어지는 나로서는 걱정되지 않을수 없었다. 상비약이 없는 내 집엔 언제나 대일밴드가 있다.
대중문화는 아직까지 노처녀를 코미디로밖에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올드미스 …>는 시트콤이고, 삼순은 매우 삼순이스럽고,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의 효진(신은경)은 치마 아래로 두루마리 화장지를 달고 다닌다. 그 나이에 “다시 태어나면 나무가 되고 싶어”라며 <가을동화>를 찍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빈구석이 많은 노처녀가 주는 웃음이란 깐깐한 노처녀가 주는 경계의 반작용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사람은 본시 실수투성이다. 노처녀를 대상으로 삼은 영화와 드라마가 굳이 현실을 치장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공이 된 먼지와 더불어 방안에서 굴러다니다가도 청소 좀 해보자는 생각이 드는, 씩씩한 노처녀의 드라마. 삼순과 다른 노처녀들은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적절한 견인력으로 우리를 자극하고 있다.
“컨셉은 여자 셋, 여자 셋이다”
<올드미스 다이어리> 김석윤 PD 인터뷰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제목은 고풍스럽지만 30대 독신여성들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어떻게 이 시트콤을 기획했는가.
=처음엔 <싱글즈>라는 제목을 쓰고 싶었다. 이미 영화가 나왔기 때문에 아예 촌스럽게 가보자고 결정했지만 30대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기획은 두 가지 축이 중심이었다. 할머니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여성성, 할머니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30대 여성. 개인적으로 여자 이야기에 끌리기도 했고, 홈시트콤과 남성시트콤의 틈새를 파고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누나 두명이 모두 싱글이어서 싱글여성을 자주 보았던데다 시트콤 작가들도 대부분 여성이다. 여자들끼리 은밀하게 털어놓는 수다를 펼치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다. 굳이 컨셉을 따지자면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여자 셋, 여자 셋’이다.
-100회를 훌쩍 넘겼는데 소재를 찾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는지.
=일곱달이 넘게 대본회의를 해오면서 전화 안 해본 데가 없고 욕도 많이 먹었다. (웃음) 야들야들한 살에 입술을 대보고 싶다,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부분이니까. 처음엔 30대 싱글여성 작가들이 자신들의 경험이나 감정을 많이 담았고, 그걸 주제 삼아서 주변 취재를 많이 했다. 이런 상황에선 어떤 말을 할까, 어떤 감정을 갖게 될까. 이 시트콤을 하면서 내가 여자 친구와 싸웠을 때 그녀는 집에서 이런 행동을 하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최미자(예지원)는 평범한 듯하면서도 독특하다.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했는가.
=오윤아나 김지영은 다소 전형적이다. 김지영은 여자들이 지금 비슷할지라도 버리고 싶어하는 캐릭터이고, 오윤아는 그녀처럼 되고 싶지만 가능성이 희박한 캐릭터다. 미자는 가장 평범하지만 폭을 넓게 주었기 때문에 극과 극을 달린다. 여자들이 미자처럼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미자와 윤아, 지영이 모두 모이면 요즘 30대 여성의 모습이 되지 않나 싶다.
-미자가 자신과 두 친구의 감정을 내레이션으로 설명하는 형식이 <섹스 & 시티>와 비슷하다.
=그런 말을 많이 들었지만 단순한 발상인 것 같다.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디테일이 중요한 프로이다. 세트나 대사뿐만 아니라 감정표현도 중요하지만 25∼26분 내에선 감정을 처리하기가 힘들다. 내레이션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감정을 직접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현우와 미자가 연애를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주제를 찾아야 할 텐데.
=8주 정도 앞서서 스토리의 아우트라인을 그려왔지만 요즘은 한주 단위로 하고 있다. 고민이 많다. 미자가 김정민과 지현우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할지도 미리 정하지 못했었는데 앞으로 미자와 현우가 어떻게 될지도 잘 모르겠다. 제목이 <올드미스 다이어리>니까 미자가 결혼하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고, 시청자 중엔 빨리 미자 누나의 신혼생활을 보고 싶단 사람도 있고. (웃음) 그 선택에선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많이 참고한 편이다. 앞으로는 미자와 현우, 정민, 윤아의 사각관계가 시작된다. 윤아가 어느 정도 감정을 드러낸 상태이고, 정민은 미자를 향한 마음을 누르고 있지만 폭발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으로 그들 사랑의 행로를 정리하고 싶다.
-여자들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오프닝 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았을 듯하다.
=여성민우회와 충돌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결혼이 아니라 사랑을 말하고 싶었다. 미자와 친구들의 사랑, 최부록(임현식)의 중년의 사랑, 황혼에 찾아온 할머니들의 사랑. 웨딩드레스는 한국에선 사랑의 귀결을 상징하다시피하기 때문에 사용한 것뿐이다. 그래서 회의하다가 우리끼리 동거가, 사랑해서 같이 사는 동거가, 일반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했다. 오프닝 말고도 여성을 비하한다고 여러 번 비판받았다. 그때 나는 사람 마음이란 오락가락하는 거고 변화하는 것인데 시트콤의 에피소드 하나는 그 단면을 보여주는 거라고 말했다. 일일시트콤 아닌가. 보다보면 당신들이 공감하는 에피소드도 있을 거라고 했고 지금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30대 여성들의 대화인데도 성적인 주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TV 프로그램이어서 받는 제약 때문인가.
=그래서이기도 하고 방영시간 탓도 있다. 우리는 홈시트콤 성격도 있는 몇 가지 스토리라인을 끌고 간다. <세친구>처럼 밤늦게 했다면 달랐을 텐데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가족들이 시청하는 시간에 방영하기 때문이다. 장동직이 키스를 잘하는가에 관한 에피소드도, 연인 사이에서 키스는 기본인데, 섹스를 우회해서 이야기해본 거였다. 섹스 말고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괜찮지만, 섹스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면 좀더 리얼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