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찐 게 낫다고? 너무하지 않나?”
김선아는 씩씩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제주도 촬영현장에서 만난 그의 눈에는 졸음이 가득했고, 얼굴엔 과로의 증표인 뾰루지의 흔적이 있었지만, 카메라 앞에만 서면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코믹 연기와 애드리브로 스탭들을 웃기곤 했다. 김윤철 PD는 자신의 웃음소리 때문에 NG가 나기도 여러 번이어서, 큐사인만 주고 나가달라는 김선아의 애교스런 투정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도회적이고 섹시한 이미지로 어필했던 남성 화장품 CF 이후 김선아는 급격한 커브길을 돌아왔다. <몽정기>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위대한 유산> <S다이어리>에서 소심하고 로맨틱한 대한민국 ‘평균’ 여성을 체현해온 김선아는 4년 만의 TV 출연작인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그간 선보였던 ‘삼순이스러운’ 연기의 최대치를 보여주고 있다. 미모를 망가뜨리는 모험과 비슷한 연기의 반복이라는 오해를 불사한 김선아의 시도, 그 이유와 의미가 궁금해졌다.
-이제 4회 방영했을 뿐인데 시청률이 30%가 넘었고, 인터넷 다시 보기 서비스 이용도 5만건씩 폭주한다고 들었다. 이 정도의 인기를 예상은 했는지, 아님 기대라도 했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기대, 정말 안 했다. 현빈씨랑 감독님이랑 같이 시청률 맞히기 내기를 하면서, 나는 15% 정도를 얘기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하는 TV드라마니까, 25% 정도 나오면 차~암 좋겠다, 그런 희망은 있었다. 영화의 관객 동원 수가 드라마의 시청률과 비슷한 것이긴 해도, 영화 한편에 이렇게 빨리 전 국민이 들썩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금의 시청률이나 반응이 얼떨떨하다. 첫회 나가고 주변 사람들 인사 때문에 전화가 불통될 정도였다. 김윤철 PD를 믿었고, 현장 분위기가 좋아서 느낌이 좋았는데, 내 선택이 옳았구나 하는 확신이 든다. 우리끼린 의식하지 말고, 하던 대로 하자고 마음을 다잡고 있다. 기대가 커져서 많이 부담스럽다. 4회에 시청률 30%가 넘은 프로가 처음이라고 알고 있고, 방영되는 대로 실시간으로 뉴스가 올라올 정도니까. 이러면 안 되는데, 숙소에 들어가서 밤에 잠도 안 자고, (마우스 클릭하는 시늉) 인터넷하고 그런다.
-여전히 씩씩한 모습이긴 하지만, 얼굴은 많이 안돼 보인다.
=내가 지금 데뷔 8년차인데, 그동안 거의 쉬지를 못했다. 영화를 하지 않더라도, 드라마, 쇼, 라디오, 이런 활동들을 하느라고, 한달 이상을 쉬어본 적이 없다. <위대한 유산> 때는 살을 너무 심하게 빼서 몸에 무리가 왔는데, 이번엔 살을 너무 찌워서 문제가 생겼다. 부종에다, 위장 장애까지. 담당 의사 선생님이 그러신다. 이제 역할 좀 ‘노멀’한 걸로 하라고.
-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작품 때문에 6∼7kg를 일부러 찌운 것으로 알고 있다. 체중 늘리는 건 본인의 아이디어였나.
=영화라면 화면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아마 10kg 정도 찌웠을 거다. 대본 받아보고, 안 그래도 살 좀 찌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독님과 작가님이 ‘살 좀더 쪘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거다. 체격이 있는 편이라 약간만 쪄도 확 늘어 보이는데…. 그래서 두세달 동안 일부러 많이 먹고 살을 더 찌웠다. 요즘 방송 보고 엄마가 많이 속상해하신다. 내 딸만 불어터지게 나온다고. 그래서 한달만 더 참으시라 그랬다. 내 일이니까 어쩔 수가 없다고. 제작발표회 무렵엔 다들 살이 너무 찐 거 아니냐고 난리더니, 이젠 찐 게 나으니까 살빼지 말라고들 한다. 너무하지 않나? (웃음)
-퉁퉁하게 살이 오른 몸매나 마스카라 범벅이 되어 우는 얼굴이나 뒤뚱대는 걸음걸이처럼 역할에 맞는 설정이 필요했다고 해도, 여배우로서 그 모두를 수용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예뻐 보이길 포기하는 용단에 이르렀는지 궁금하다.
=<위대한 유산>을 하면서부터, 나 자신의 타이틀을 ‘여배우’가 아니라 ‘배우’로 가져가기로 했다. 살 심하게 뺐다가 찌웠다가 하는 건, 역할에 맞게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다. 리얼리티를 떨어뜨리면서까지 예쁘게 보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위대한 유산> 할 때 임창정씨한테 배웠는데, 배우는 ‘진짜’만 해야 한다는 거다. 나는 임창정씨가 머리를 안 감고 다니기에, 게으른 사람인가보다,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역할에 충실하느라 그런 거였다. 이번에 실연당하고 화장실에서 우는 장면에서, 나는 마스카라가 그렇게 번진 줄도 몰랐다. 오케이 사인이 나고 스탭들이 울어서, 그제야 거울을 보고 알았다. 여태까진 TV에 그러고 나오는 여배우가 없었으니까, 신기해들 하는 거다. 나는 TV가 됐든 영화가 됐든 상황에 맞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곱게 화장한 채로 자고 있고, 그런 건 아니지 않나. 사소한 설정이지만, 삼순이가 외모 가꾸는 여자는 아니라는 생각에서, 파마도 미리 해서 부슬부슬하게 묵히고, (머리를 들이밀어 보여주며) 머리가 많이 자랐는데 염색도 다시 안 했다.
-작품을 언제나 느낌으로 고른다고 했고, 이번 작품도 연극영화과 편입 첫 학기를 포기할 만큼 필이 꽂혔다고 했다. 이 작품, 이 역할을 ‘내가 해야 한다’고 확신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원래 <잠복근무> 뒤에 스케줄이 없었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편입학을 했는데, 첫 학기부터 딱 걸려버렸다. (힘들다는 표정) 리포트도 짬짬이 써서 보내고 그런다. 난 예전부터 ‘여자 얘기’를 많이 해보고 싶었다. <S다이어리>도 그래서 한 거고, 이번 드라마도 또 다른 <S다이어리>라고 생각하면서 한다. <S다이어리>의 지니는 소심하게 글로만 표현하는 여자이고, 실제로 그런 유형의 여자들이 무척 많은데, 그들이 생각만 하던 것들을 삼순이는 시원시원하게 내뱉어준다. 실제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겪고, 그런 경험과 감상을 솔직하게 드러내니까. 20대 후반에서 30대, 40대의 여성들까지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끼고 공감하는 것 같더라. 남자들에겐, 어디서 살찐 여배우 하나가 툭 튀어나와 돌아다니니까, 신기하고 재밌게 느껴지는 것 같고.
-<몽정기>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위대한 유산> <S다이어리>에서부터 ‘삼순이스러운’ 역할들을 도맡아 해왔다. 뭐 하나 내세울 것 없지만 사랑에는 한없이 약한 노처녀 캐릭터들을 변주해온 셈인데, 왜 자신에게 그런 역할들이 몰린다고 생각하나.
=왜 자꾸 반복하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는데, 난 TV에서 이런 역할을 해본 적이 없다. 그간의 역할들도 로맨틱코미디 안에서 변화를 주어왔고, 전에 안 했던 것들을 골라 해서 공부가 많이 됐다. 사실 부담이 가는 건 다음 작품부터다. 어떤 장르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할지 모르겠다. 코믹 연기를 시작한 게 2년 정도인데, 그 임팩트가 그렇게 컸나보다. 준비가 안 됐는데, 갈 자리가 없는데, 자꾸 바꾸라고 재촉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항상 느낌으로 작품을 골랐기 때문에 느낌이 없다면 섣불리 다른 장르로 가진 않을 거다. 연애하는 것과 비슷하다. 막상 만나는 사람은 이상형과 거리가 먼 경우가 많고, 또 남자를 만나다보면, 다 비슷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아주 다른 타입을 만나면, 적응하기 힘들어지지 않겠나. 내가 갖고 있는 게 있어야 보여줄 수도 있는 거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 생활하는 것처럼, 연기도 경력도, 흘러가는 대로 가고 있다.
-또래 여배우들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 적이 있다.
=<S다이어리>가 시초였는데, 여자가 원톱인 영화를 기획하는 건 거의 모험이었다. 흥행이 잘되면 좋은 거지만, 그보다 우리끼리 재밌고 보람있는 작업, 여자가 설 수 있는 작품이 많이 기획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 잘돼서, 동료 여배우들에게 좀더 다양한 기회가 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나 자신도 삼순이도 노처녀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몰아가는 건, 사회가 아닌가 싶다. 현장에서 어느 순간 내가 언니 누나가 된 걸 보면, 나이를 먹어가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연기하는 느낌은 더 좋아지는 것 같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것도 많고, 감정 몰입도 달라진다.
-TV드라마에서 시도할 수 있는 ‘삼순이스러운’ 연기의 최대치를 보여주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려는지 궁금하다.
=잘못 되면 독박 쓰는 거다. 김선아 코믹 연기 식상하다 그러겠지. 칭찬에도 비난에도 좌우되지 않으려 한다. 한순간 와~∼ 했다가, 에이∼ 했다가 하는데, 거기 일일이 흔들리면 안 되니까. 최근 2∼3년 사이에 연기 잘한다는 얘길 듣고 있는데, 좀 당황스럽다. 처음엔 외국에서 살다 와서, 국어책 더 읽고 오라는 둥 발음 지적을 많이 받았다. 이 악물고 연기수업 시작한 건데, 요즘 반응에 대해선 한우물만 파 온 결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드라마 인기가 올라가니까, 이제 뭘 해도 용서가 된다. 욕을 해도 용서가 된다. 처음엔 TV에서 욕이 나온다고, 문제를 삼더니, 시청률 30% 넘으니까 그 얘기가 쑥 들어갔다. 간사한 세상이다. (웃음) 아마 작품이 잘 나오지 않았으면, 김선아 너무 뚱뚱하다, 자기 관리 안 한다, 말들이 많았을 텐데, 이젠 노력이 대단하다고들 한다. 그런 얘기에 휘둘리지 않고, 중간을 유지하면서 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