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여인의 육체, 지식권력을 비웃다, <권태>
2005-06-29
글 : 남재일 (문화평론가)
<권태>가 보여주는 남성 욕망에 대한 계보학적 진실

“소년의 얼굴을 하고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이런 습성을 가진 사람을 보면 우리는 예술가나 과학자를 연상한다. 하지만 스파이크 리의 영화 <정글 피버>에 나오는 한 흑인 목사는 ‘악마’의 정의를 그렇게 내린다. 내가 들은 것 중 가장 창의적인 정의였다. 나는 처음에 이 목사가 왜 내가 어릴 때 바람직한 미래의 과학자 상으로 교육받던 캐릭터를 악마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이 정의가 깊은 신앙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실험을 거듭했던 그 옛날의 갈릴레오는 “지구는 돈다”며 반체제적 발언을 하지 않았던가. 역설적이지만 “간통하지 말라”는 계율을 어긴 ‘잡범’은 회개를 통해 종교의 정당성을 재생산해주는 귀순용사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호기심에 가득 찬 소년은 언제 체제를 위협할지 모르는 ‘사실’을 발명해 미래의 반체제 사범으로 둔갑할지 모른다. 그러니 호기심에 찬 소년을 악마로 규정한 그 목사의 눈은 사려 깊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호기심에 찬 과학자, 철학자, 예술가들이 신을 모독했던가!

소년의 얼굴을 하고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분주하게 떠들고 다닌 악마 중 단연 압권은 니체다. 갈릴레오는 아무 생각없이 실험하다보니 당시 교회의 정설이던 천동설을 부정하게 된 과실치사범이지만, 니체는 신을 죽이기로 작심하고 달려든 사상적 확신범이다. 그는 서구세계의 지배적 가치체계인 기독교적 도덕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기독교적 도덕이 형성되는 과정을 연어처럼 거슬러올라갔다. <선악을 넘어서> <도덕의 계보> 등 니체의 저서 대부분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이들 책에서 니체는 기독교적 도덕을 ‘원한적 감정에 사로잡힌 열등한 힘들의 생존 전략’으로 규정한다. 신의 말씀에 각주를 달아놓은 기독교적 가치체계를 약한 것들의 집단적 복수심이라고 심리 분석을 해놓았으니 얼마나 발칙한가.

니체가 기독교를 분석했던 방법론은 ‘계보학’으로 이름붙여졌다. 계보학(genealogy)은 원래 역사학의 보조수단으로 말 그대로 가계를 연구하는 것이지만, 비판철학의 방법론으로 응용돼서 주로 지배적인 가치체계를 비판하는 데 사용된다. 합리성에 기초한 근대적 지식권력을 해부한 푸코의 작업도 계보학적 방법의 한 사례이다. 지배적인 가치체계의 비판에 계보학이 동원되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 가치의 준거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즉 계보학은 지금 낫이라 믿고 풀을 베고 있는 도구가 칼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 즉 ‘선’으로 신비화된 도덕 혹은 가치를 경쟁하는 힘들의 권력관계로 환원해서 탈신비화시킴으로써 헤게모니 상태를 교란시킨다. 그러므로 뛰어난 계보학자는 곤충학자의 관찰력과 정치학자의 균형감각을 갖고 정치와 도덕이 접선하는 장소를 정확하게 덮쳐야 한다. 도덕이 정치적 권력관계에 동원되는 맥락을 보여줌으로써 좀더 나은 권력관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학문적 방법론 중에서 계보학은 가장 전복적이다. 그래서 계보학자의 삶은 하나같이 험난하다. 악마에 대한 신의 저주? 아니 ‘임금님 똥구멍 역시 구리다’라고 진실을 말하는 이단에 대한 체제의 응징 때문이겠지!

영화감독 중에도 더러 계보학자들이 있다. 이들이 주로 공략하는 지배적 가치체계는 사랑이다. 사랑은 인간의 관계를 조직하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이자 인간조건의 심연을 복개하는 강력한 판타지이다. 그런 만큼 지배 이데올로기는 입맛에 맞게 사회를 요리하면서 사랑을 단골 메뉴로 끌어온다. 박애, 가족애, 남녀간의 사랑은 대개 탈정치적 휴머니즘, 가족주의, 낭만적 사랑이라는 그릇 속에 담긴 채 영화라는 식탁에 오른다. ‘비판적 사회학자’는 이 그릇을 깨버리거나 다른 그릇으로 바꾸고 싶어한다. 적어도 그는 사랑의 존재를 믿는다. 사회적 조직 원리만 바꾸면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성차별을 철폐하면 남녀간의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계보학자는 사랑의 존재 자체에 회의적이다. 그에게 사랑은 그릇에 담긴 내용이 아니라 그릇의 그림자이며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은 사회적 권력관계라는 텅 빈 그릇뿐이었다. 남녀간의 사랑은 성적 교환을 둘러싼 권력관계가 만들어내는 무지개 일 뿐이다. 그에게 성차별의 철폐와 같은 사회적 권력관계의 해체는 진정한 사랑의 토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기존의 관념이 무용해짐을 의미한다.

<권태>, 사회학적 메타포와 남녀관계의 야릇한 함수

한국 감독 중에 계보학적 자세를 취하는 유일한 감독은 홍상수다. 그는 곤충학자의 시선으로 사랑을 관찰한다. 남녀관계에 투사된 모든 유형의 가치는 일단 이 시선에 의해 전복된다. 그 다음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그는 사회학적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에는 어떠한 사회학적 메타포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아니키적 성향은 계보학자들의 습성이다. 당위를 사실로 환원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기 때문에 정치적 관점의 설정으로 사실이 기술되는 깊이가 제한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다. 어차피 계보학자의 정치성은 적나라한 힘의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가치체계를 낯설게 만드는 혼돈의 생산에 있다. 홍상수의 영화가 불편하고, ‘희망이 없다’는 푸념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그가 쉽사리 희망을 삽입하지는 않을 것 같다. 계보학자에게는 당위로의 진입을 의미하는 희망이라는 말 자체가 자가당착인데다, 미래의 전망은 사방으로 열려 있는 계보학적 사실 위에서 그 다음 사람이 열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태>의 세드릭 칸 감독이 아마 ‘그 다음 사람’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가 남녀관계를 짜나가는 방식은 묘하다. 남녀관계의 가장 기저를 성적 교환으로 보는 계보학적 시선은 분명하지만 왠지 그 사실이 불편하지 않다. 그는 이 적나라한 사실에 관객에게 익숙한 심리게임의 내의를 입히고 정형화된 정치적 메타포의 치마를 걸치게 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조금 적나라하며 적당히 복잡하고 은근히 정치적이다. 교환되는 것은 육체이고 어긋나는 것은 꿈 혹은 욕망이며 전복되는 것은 남녀의 권력관계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말 많은 이성과 침묵하는 육체의 권력관계를 전도시키고야 만다.

먼저 조금 적나라한 사실. 영화는 17살의 소녀가 세 남자와 맺는 관계에 대한 얘기다. 첫 번째 남자는 화가로 그녀를 누드모델로 기용했다가 관능의 늪 속에 익사한다. 사방을 누드로 도배해도 그림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화실에서 틈만 나면 섹스하다 탈진해서 사망한 게다. 그 나이에 17살이라니 왜 아니겠나? 이자의 내면에 대해 영화는 말이 없다. 다만 죽음을 예상했다니 자살 혹은 전사라고 봐야 한다. 두 번째 선수, 주인공인 40대 철학교수로 “입보다 성기가 표정이 더 풍부한” 그녀의 무지에 화를 낸다. 이왕이면 얼굴도 표정이 풍부하면 오죽 좋을까? 그 와중에 그녀가 양다리를 걸친다. 이 젊은 남자에 대해 영화는 말이 없고 그녀의 입을 통해 “잤다”와 “좋다”만 확인된다. 그 두 느낌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다. 이 남자의 출현으로 그는 정말 화가 난다. 그 무지한 머리가 이런 짓을 할 줄이야! 그는 화가 날수록 표정 풍부한 그 성기로 더 함몰된다. 급기야 그는 일보 후퇴해서 그녀를 구슬리고 결혼 신청까지 구사하면서 그를 독점하려 하지만 퇴짜 맞는다. 이 남자들이 전해주는 적나라한 사실은 욕망은 언제나 거시기에 영점 잡혀 있다는 것, 이성의 지적 수다는 그 사실을 끝까지 가릴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그 다음 적당히 복잡한 심리적 메타포. 화가는 사물을 규정하는 근대의 법칙인 원근법으로 세상을 재현하는 시선의 권력자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수학적 시선으로 재현해도 ‘보기’ 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2% 부족한 촉각의 틈새를 그는 ‘만지기’로 메운다. 그러나 무심한 성기는 자신의 살로 이식되지 않는다. 40대의 철학교수, 그는 인간을 성충동의 효과로 본 프로이트에 대해 불쾌감을 갖는 데카르트의 후손이다. 근대 지식권력의 체계를 기초공사한 인부답게 욕망을 통제해야 비로소 안심하는 그는 성기의 풍부한 표정에 지독한 거세공포를 느낀다. 그녀의 성기를 소유와 지배를 통해 고정시키고자 하는 그는 신경증적 불안을 끝없는 수다로 봉합하려 든다. 이 남자들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부정해야 할 대상에 끝없이 도착되는 가부장적 권력 혹은 편집증적 근대 지식권력의 표상이다. 권력은 그 자체가 욕망의 궁극적 탄착점은 아니기 때문에 부단한 확인을 갈망하며, 증식은 상실의 불안을 잊기 위한 수단이 된다. 그리하여 욕망과 권력의 이성 사이에 팬 깊은 협곡 속에 여성의 성기는 욕망의 대상이자 부정의 대상으로 배치된다. 내 안에 없는 것, 내가 갖고 싶은 것, 그러나 내가 갖고 싶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하여 얻는 은밀한 정치성. 이 영화에서 메타포의 형식으로 제시되는 것은 남성의 욕망과 심리이다. 여주인공은 거저 무구한 육체로만 던져진다. 그녀는 “섹스로 자신을 표현할 뿐” 말이 없고 말을 잘 듣지도 않는다. 그녀가 남자에게 건네는 말은 기껏 “여자는 받는 걸 좋아해요”뿐이다. 옷을 벗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다. 때밀이 작업하듯 벗어던진다. 그러니 시선과 언어에 지배될 리 없고, 그럴수록 남자들은 더욱 안달한다. 나는 이 여성이 살아 있는 인물 같지가 않다. 이 여자는 두 남자의 내면의 결핍을 모사한 욕망의 붕어빵 같다. “표정이 풍부한 성기”를 응시하는 시선은 사실 깊이를 알 수 없는 남성 내면의 균열의 틈새를 응시하고 있다. 그러니 이 영화는 방금 지하실에서 자위하고 올라온 소년의 불안한 내면에 대한 지적 수다이다. 이 영화의 제목 ‘권태’는 남자들의 겉도는 수다와 상투적 욕망에 대해 그녀의 무구한 육체가 느끼는 감정이다. 그건 곧 나이 들어도 변하지 않는 뻔한 욕망과 위선적 권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남성의 자아가 느끼는 자기혐오의 감정이다. 여성에 의지해서 써내려간 남성의 권력과 욕망에 대한 계보학, 나는 이 영화를 그렇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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