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신인감독 3인의 현장 [2] - 김판수 감독의 <러브하우스>
2005-07-05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오계옥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부기 나이트>를 만났을 때?

이 감독의 현장을 주목하는 이유 셋!

하나! 인터넷 포르노방송

해외에서 한국으로 쏘아올리는 인터넷 포르노방송의 현장을 LA에서 재현한다. 끔찍하게 가학적인 포르노 <디즈니랜드>를 찍어 ‘화제’에 오르기도 했던 한국인 포르노 제작자들의 내부로 들어가보려는 시도다.

둘! 웨스턴 누아르

로케이션 인력의 절반을 넘는 할리우드 현지 스탭들은 <러브하우스>의 영문 스크립을 보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떠올랐다고 한다. 동양인 유학생으로서 셰익스피어의 본고장 영국에서 영국 배우들을 데리고 셰익스피어 극의 전통을 재해석한 단편 사극 <바람의 속삭임>을 만들었던 김판수 감독은 LA에서 다시 한번 당돌한 모험을 시작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부기 나이트>를 만났을 때 같은 웨스턴 누아르를 만들고 있다.”

셋! 젊은 해외파 집결

김판수 감독은 런던영화학교 재학 시절 만든 단편 <잘 자라 우리 아기>가 영국 최우수 단편영화로 선정된 바 있고, 권재현 프로듀서는 뉴욕대 영화과 출신이며, 김영노 촬영감독은 AFI에서 촬영 전공 뒤 <극장전>의 조명감독으로 데뷔했다. 의상 담당 그레이스 임은 <킬 빌> 1, 2편과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의 프로덕션 어시스턴트로 일했으며, 한유정 미술감독은 선댄스의 화제작 <베터 럭 투모로우>에서 작업한 바 있다.

잭 니콜슨의 <차이나타운>이나 <LA 컨피덴셜> 같은 누아르를 뉴욕에서 찍는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차라리, 회색빛 킬러의 이미지를 LA와 대비시켰던 <콜래트럴>은 가능할지 모른다. <콜래트럴>은 어둠으로 시작해 동터오는 여명으로 끝난다. 거기엔 LA 특유의 눈부신 햇살이 없다. 음습한 살인만이 존재한다. 그건 LA의 반쪽 얼굴이다. <차이나타운>과 <LA 컨피덴셜>은 습하지 않아 몸을 부서뜨릴 것 같은 밝은 햇빛 속의 어두움을 응시하는 누아르다. 그렇게 LA여야만 가능한 영화들이 있다. 태평양을 건너와 찍고 있는 <러브하우스>도 이 도시가 아니면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표정을 가진 영화다. 부유하는 화려함(포르노방송)과 정형화한 어둠(마피아)이 극단적인 대비를 보이다가 인간적인 결말을 맞는 ‘웨스턴 누아르’.

100억원대 저택에서 펼쳐지는 서부극

자족적인 평화를 누리던 마을이 갑자기 출몰한 악당으로 핍박과 위기를 겪기 시작한다. 서부극의 서론이자 본론이다. 인터넷으로 포르노를 생방송하는 포르노마을 ‘러브하우스’가 그런 평화로운 동네다. LA의 한인타운에서 자동차로 1시간 가까이 달려간 라티고 캐넌의 정상은 말리부 해안을 마주보고 있다. 그 정상에 버티고 선,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가의 별장이었던 100억원대 저택이 ‘러브하우스’로 간택됐다. 촬영용으로 공개된 적이 없었던 터라 저택 안에서는 물 이외의 음식을 일체 금하고 화장실 사용도 불허라는 등의 까다로운 조건을 달고 어렵게 구한 집이다. 30년대 지어진 고풍스런 저택의 수영장과 거실이 만화 캐릭터처럼 통통 뛰는 한국인 포르노자키(PJ)들의 스튜디오가 됐다. 진짜 갱스터를 꿈꾸는 떠버리 봉지맨(김용훈, MTV VJ이자 래퍼 수파사이즈로 알려진 인물로 사물놀이패 김덕수의 아들답게 촬영장을 거침없이 자기 놀이터로 만들곤 한다), 맏언니 앨리스(이선진), 고삐리(김별) 등 8명의 남녀 PJ와 포르노 감독이 근근이 운영하던 러브하우스에 이방인 2명이 서울에서 찾아든다. 서부극에서 전설적인 과거를 지닌 낯선 총잡이가 피로를 잔뜩 머금은 채 마을에 들어서면서 불길한 전조가 시작되곤 한다. 그리고 총잡이는 육감 넘치는 (술집) 여인네와 모종의 눈빛을 주고받는다. 일두(박상욱)와 나비(안규련)가 그런 인물이다. 일두는 한때 조직의 2인자로 군림했지만 5년 전 모종의 사건을 치른 뒤 의욕을 잃고 추락하다 급기야 포르노방송국을 키워보라는 수치스런 명령을 받고 LA로 귀양왔다. 나비 역시 보스의 애첩으로 화려한 나날을 보냈지만 버림받아 PJ로 송출당한 비운의 여인. 이들이 포르노마을에 정착하면서 애증이 증폭되고 충돌하지만 이를 앙다문 나비가 스타 PJ로 떠오르면서 인터넷 접속은 폭주하기 시작한다.

6월16일, 밤을 꼬박 새우며 찍을 장면 중 하나가 이렇게 한국의 유저들이 열광하며 달러를 억대로 쌓아주자 이를 자축하는 파티였다. 취재진은 운이 좋았다. 이날은 엉덩이 들썩이는 촐싹거림과 화려함이 특성인 파티장면과 정반대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누아르 장면을 연이어 찍는 날이었다. 허망한 화려함과 폭력적인 어두움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러브하우스>의 특징을 한번에 맛볼 기회다. 저녁 8시께 시작된 촬영은 포르노마을에 악당이 등장하는 장면이 먼저였다. LA에서도 되풀이된 일두의 실수를 응징하고 러브하우스를 접수하러 조직에서 파견된 백강일(조동혁) 일당이 외출했다 돌아오던 나비와 일두를 불꺼진 거실에서 맞이하는 신. 희미한 빛과 짙은 어둠이 한컷 안에서 교차되는 게 누아르의 특징이라고는 해도 모니터를 건네보니 ‘살벌하게’ 어둡다. “음~, 너무 어두운 거 아닌가요?” 속삭이며 물었더니 당연한 거 아니냐는 답이 돌아온다. “밝고 경쾌한 분위기에서 누아르로 반전되는 중요한 장면인데 그래야죠.” 풀숏의 구도를 보니 영화교과서에 나오는 고전적인 딥 포커스의 미장센이다. 악당+중간보스+일두와 나비+악당+PJ들의 순으로 인물들을 겹겹이 포개놓고 카메라가 맨끝에서 한번에 잡는다. “인물이 많이 나오는 신에서는 레이어를 많이 쌓으려고 하고 있다. 다른 유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는 건데 이걸 한번에 보는 게 큰 재미다.”

용감하지만 무식하지 않은 현장

<러브하우스>의 현장은 겁없는 데뷔전의 냄새를 곳곳에서 물씬 풍긴다. 영화 속 대사는 한국어인데 이를 둘러싼 스탭들의 대화가 온통 영어뿐이라서가 아니다. 감독은 배우의 모니터 리뷰를 금지했고(덩달아 프로듀서까지), 촬영감독은 조명과 카메라워크를 동시에 설계하고 지시할 뿐 정작 카메라 손잡이는 현지 ‘오퍼레이터’ 스탭에게 맡기고 있었다. 또 영화의 90%를 LA 로케이션에서 찍는데 배우는 과감하게 모두 신인급으로 채웠다(“세트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잘 몰라 포커스 아웃되곤 하던 배우들이 차츰 진짜 영화배우가 돼가는 걸 보는 게 재밌다”고 감독은 씩 웃으며 말했다). 100억원대의 저택을 빌리고, 끊임없이 스테디캠을 쓰며, 백강일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을 꾸미는 데만 1억원이 넘는 가구들을 빌려다쓰고, <캐리비안의 해적2>의 현장에 공급하는 맛깔스런 밥차를 똑같이 대놓고 먹는데도 제작비는 불과 20억원이다. 충무로 현장과 다른 방식이라도 좀더 효율적이라고 판단되면 밀어붙여 관철시키고 쓸 장비는 다 쓰면서도 비용은 놀라울 만큼 줄여내는 건 분명 용감한 재주다. 물론 그 절정은 인터넷 포르노방송이란 소재를 끌어다 웨스턴 누아르를 찍고 있다는 ‘공언’에 있다.

“12시30분까지 10분 남았습니다.” 갑자기 연출부가 반복해 외친다. 어떤 일이든지 6시간마다 식사 시간을 마련해줘야 하는 게 이곳의 노동법. 현지 스탭들이 주차장에 차를 댄 시간이 오후 6시30분이니 12시30분이면 모든 작업을 중단해야 한다. 그 사이 스테디캠으로 일두의 일그러진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잡는 것으로 1부 리그가 끝났다.

2부 리그는 2분이 넘는 긴 장면을 스테디캠으로 ‘원신 원컷’으로 촬영해야 하는 파티신. 테라스에서 거실로, 그리고 수영장으로 이어지는 긴 동선과 모든 인물이 죄다 등장하는 어려운 컷이다. 한밤에 벌어지는 수영장 파티 디자인만 해도 만만치 않은지라 리허설에 들어가기까지 2시간가량 소요된다. 새벽 4시께 리허설을 마무리하며 스테디캠의 무게를 넉넉하게 이겨낼 덩치 좋은 현지 카메라맨이 땀 흘리며 나직이 한마디 한다. “베리 컴플리케이티드!”(무지 복잡하군) 감독은 불과 세 번째 테이크에 오케이를 낸다. “상황만 주고 애드리브로 찍는 롱테이크인데 운이 좋네요.” 또 씩 웃는다.

이 대저택에는 소녀 귀신이 출몰한다고 했다. 소녀를 봤다는 스탭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한국 스탭이 묵는 한인타운의 한인호텔에는 할아버지 귀신이 출몰하는데 유독 특정 배우만 쫓아다닌다고 한다. 이 호텔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따라왔다. <러브하우스>의 주인공들처럼 제각각의 사연을 안고 이국 땅으로 건너와 살아가기란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차별화주의! 화제와 특종의 종합매거진”이라 쓰여진 한국어 무가지의 맨 뒷면에 반라의 여자 사진이 낀 전면광고가 실려 있다. “구함: 여자 PJ 00명(고소득 보장).” 사이트끼리 PJ 트레이드도 벌어지곤 한다. 영화는 현실을 모조하지만 현실은 좀더 빨리, 좀더 끔찍하게 앞서가곤 한다. <러브하우스>는 그 사이에 용감하게 끼어든 ‘저예산’ 장르영화다.

“포르노 만드는 사람들의 갈등이 흥미롭다”

김판수 감독 인터뷰

-인터넷 포르노방송이란 소재를 어떻게 생각하게 됐나.

=기사를 보고. 한국 이야기인데 한국에서 벌어지지 않고 바깥에서 하는 소규모 사람들의 일이 어떻게든 한국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곳에 모여사는 사람들 이야기만 찍어도 한국에 대해 말할 수 있겠다 싶었다.

-웨스턴 누아르를 표방했는데.

=사실 웨스턴과 누아르는 장르적으로 같다. 웨스턴의 인물들이 누아르적 인물들이고, 선악의 대결 구조이다. 서부극의 기조를 옮겨놓고 거기에 한국식의 누아르적 요소를 섞었다.

-원래 장르영화를 좋아했나.

=혐오했다. 그런데 내가 많이 봤더라. (웃음)

-이런 장르에 인터넷 포르노를 어떻게 엮었는지.

=포르노가 많이 알려진 세계이지만 잘 모르는 세계이기 때문에 포르노를 만드는 사람들의 세계를 어떤 마을로 설정했다. 포르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건 관심이 없고, 그걸 만드는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과 만나 벌이는 갈등에 관심이 있는 거다.

-포르노를 만드는 사람들보다 보는 사람들에 대해 더 비판적인 것 같다.

=사실이다. 포르노 자체에 대해선 옳다, 나쁘다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화면에 등장해서 성행위를 보여주고, 보는 사람은 그걸 이용해서 자위행위를 하고 끝난다. 방송시간이 끝나고 나면 그들의 인생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건 좀 위험한 게 아닐까 싶었다.

-주인공과 가장 안 어울릴 것 같은 아이스크림이 조력자로 등장하고, 가장 어두운 장면과 가장 발랄한 장면이 극과 극처럼 나뉘어 있기도 하는데 불균형에 대한 부담은 없나.

=부담이 왜 없겠나. 난 오히려 너무 안전하게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좀더 과감해야 하는 게 아닐까, 너무 얌전하게 가는 게 아닐까, 안 어울리는 걸 더 붙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포르노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산다는 데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기보다 어떤 웅덩이에 갇혀 사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그게 들어야 한다. 특히 엔딩에서. 하고 싶었던 포인트 중 하나가, 러브하우스가 처음에는 나도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가 화려하고 젊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 감옥 같은 곳이 돼야 한다. 일부러 처음에 더 화려한 느낌을 주려고 했다.

-저예산으로 해외에서 데뷔작을 찍는다는 것에 대해.

=100억원짜리든 20억원짜리든 감독이 누릴 수 있는 건 똑같은 것 같다. 예산이라는 건 어차피 숫자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굉장히 좋은 여건에서 찍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있기 때문에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행운이 많이 따랐다.

-데뷔작으로 생각했던 아이템이었나.

=그런 사람 아무도 없을걸. 런던에서 공부 끝나고 들어올 때는 독립영화를 하고 싶었다. 3년 동안 준비했는데 안 되더라. 영세민 가족 이야기로, 사회드라마 같은 거였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으니까 영화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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