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70년대 록음악이 넓은 광장 한복판에서 사람들을 향해 “∼하자!” “∼세상을 만들자!”며 힘껏 소리를 지르는 느낌이라면, 요즘 듣는 록은 화장실 문을 걸어잠근 채 혼자서 흐느끼는 느낌이랄까. 조용히, 나긋나긋하지만 음울함이 가득한 채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 자신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분위기의 변화는 비단 록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애니메이션에서도 이와 유사한 변화를 찾을 수 있는데, 이는 감독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들, 즉 독립애니메이션으로 구분되는 애니메이션들을 통해 그 변화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일상의 소소한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보이는 한 남자. 주변의 모든 것들이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듯, 환상에 빠진 채 괴로워하는 한 남자의 모습을 그린 안재훈, 한혜진 감독의 <히치콕의 어떤 하루>(1998) 역시 이런 추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음악이든 애니메이션이든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보다는 ‘나’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요즘 같은 때에는 사람들을 향해 외치던 예전의 작품들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방 안에 처박혀 자신만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나 게임과 현실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되레 자연스러운 일은 아닐지?
마침 7월4일부터 28일까지 중앙시네마에서 열리는 ‘애니광 구출! 상영작전’에서는 감독 겸 애니메이터 브제티슬라브 포야르(이하 포야르)의 작품전과 한국독립애니메이션 상영전을 함께 진행한다. 이번 상영전은 지난 1월부터 (주)라바메이저(rabamajor.com)와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kiafa.org)가 시작한 독립단편애니메이션 정기상영회의 다섯 번째 행사로, 포야르와 한국독립애니메이션 각각 일곱 작품이 하루씩 번갈아 상영된다.
이번 상영전의 메인이 되는 작가 브제티슬라브 포야르(1923∼)는 퍼펫(꼭두각시)애니메이션에 정통한 체코 출신의 애니메이터. 주변 강대국들의 압제에 시달리던 체코의 공황과 세계대전의 어지러운 틈바구니 속에서 성장한 그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고 있다. 19살 때부터 영화 관련 스탭으로 활동하던 그는 2차대전이 끝난 뒤, 체코 퍼펫애니메이션의 대가로 불리는 이지 트릉카(1912∼69)에게 애니메이션을 배우며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그는 퍼펫이라는 소재에 국한하지 않은 채 다양한 소재와 방식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며, 인간, 사회, 체제를 주제로 다양한 작품을 발표한다.
육면체와 구체를 등장시켜 이질감에 대한 두려움을 폭력적으로 드러내는 인간의 습성을 그린 <발라블록>(Balablok, 1972년)은 이런 그의 작품 세계를 대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육면체들만 사는 영역에 갑작스레 등장한 하나의 구체. 육면체들은 구체의 이질적인 모습에 놀라 당황하지만, 녀석이 혼자라는 사실을 알고 구체를 바닥에 튕기며 그를 갖고 논다. 구체를 튕기며 새어나오는 육면체들의 웃음소리와 바닥에 튕겨진 구체의 비참한 모습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며 보는 이를 자극한다. 이윽고 등장한 구체 일행. 그들은 자신의 동료를 괴롭히는 육면체들을 보고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에게 복수한다. 복수와 그에 이은 또 다른 복수는 구체와 육면체들간에 처절한 전투로 확대된다. 친근감이 느껴지는 원색과 간단한 선만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의 싸움에서 느껴지는 악의에 찬 비장함, 컷과 컷 사이를 배분하는 포야르 감독의 타이밍 감각이 매우 인상적이다.
오페라의 형식을 차용한 <E>(E, 1981년) 역시 이번 상영전에서 놓쳐서는 안 될 작품. 체코의 명물인 오페라 인형극 <돈 지오바니>를 연상시키는 <E>는 독재체제의 절대자를 상징하는 왕을 등장시키며, 그 모습을 비꼬고 있다. E를 에로 발음하는 국민들에게 베(B)라고 가르치는 한 나라의 국왕. 사람들이 ‘E’는 ‘에’라며 받아들이지 않자 국왕은 비밀 경찰을 동원해 사람들을 세뇌시킨다. 세뇌가 끝난 뒤, 자신의 지휘 아래 일제히 ‘베’라며 답하는 국민들을 보며 국왕은 만족스럽게 자리를 떠난다. 하지만 손바닥만으로 하늘이 가려질까? “베에에에에에에에에에…”라며 화음에 맞춰 길게 대답하는 국민들은 자연스레 “…에”를 찾아내고 있다.
포야르 감독은 애니메이션의 형식과 소재에 국한하지 않은 채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왔지만, 특히 인형을 소재로 사용한 퍼펫애니메이션에 정통한 애니메이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체코 출신의 퍼펫애니메이터라고는 하지만 그의 작품은 체코의 다른 퍼펫애니메이터들의 작품 성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마리오네트로 유명한 체코의 인형들이 보여주는 화려함이나, 그의 스승인 이지 트릉카의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딕풍의 탐미적인 분위기는 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다(되레 이런 분위기는 체코에서 수학한 일본의 퍼펫애니메이터들에게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퍼펫은 정제된 듯 깔끔한 색상과 표정이 특징인데, 자크 드루앵 감독(<씨네21> 505호)과 함께 제작한 <밤의 천사>(Nightangel, 1986년)나 <환각의 늪>(Narco Blues, 1997년) 등에서 잘 드러난다. 이번 상영회에서도 볼 수 있는 이 두 작품의 사실감 넘치는 묘사와 캐릭터들의 풍부한 표현력은 절로 감탄을 자아낼 만큼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다만 그의 최근작들은 과거 그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날카로운 풍자나 체제를 읽어내는 감독의 시각을 담아내고 있지는 않다. 어느새 80대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탓도 있겠지만, 유니세프 등과 함께하며 교육적 목적을 지닌 아동용 애니메이션을 주로 제작하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인 듯. 과거 그의 작품들이 보여준 날카로움 그리고 그의 최근 작품들에서 보이는 부드러운 색상과 자연스레 흐르는 듯한 타이밍 감각의 연출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번 상영전을 관람할 이유는 충분하다.
작품소개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인간 속에는 내면과 정신을 상징하는 알 수 없는 생명체가 들어 있다! 학습을 통해 인간들이 이룬 조직사회의 체계를 배우는 생명체들. 포야르 감독은 이들 생명체들의 학습과 활용을 통해 인간 조직 사회가 지닌 힘과 권력을 조롱하듯 비웃고 있다.
독특한 시각만큼 포야르 감독이 인간 내부를 표현 방식도 굉장히 눈에 띄는데, 이런 표현 방식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사회를 보는 그의 시각이나 표현 방식이 보여주는 노련미와는 달리 작품을 끌어가는 연출력은 퍽퍽하리만큼 거칠다. 베를린영화제 수상작.
<발라블록>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으로 육면체 집단과 구체 집단의 피터지는 싸움을 통해 이질감에 대한 두려움을 폭력적으로 드러내는 인간의 습성을 그린 작품. 사회를 보는 포야르의 시각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다. 원색과 간단한 선만으로 이루어진 캐릭터들의 싸움에서 비장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이야기를 전개하는 포야르 감독의 타이밍 감각과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복수를 잇는 또 다른 복수의 연속. 구체와 육면체가 서로를 찍어내리며 싸우게 되면, 결국 뭐가 남게 될까?
<E>
록그룹 퀸의 앨범 <A Night at the Opera>를 연상시키는 듯,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벼운 오페라 형식으로 진행된다. 포야르 감독은 작품 내에 독재체제를 상징하는 절대자 왕을 등장시켜, 이야기 전개를 통해 절대권력을 비웃고 있다. 작품을 보는 동안 곡의 흐름에 맞춰 장면을 분할하고 배분하는 포야르 감독의 연출력과 재치를 놓치지 말자. 머릿속에 박혀 있는 ‘E’를 ‘B’로 바뀌도록 세뇌시키는 장면이나, 의사가 시력(?)을 교정하는 장면은 작품이 지닌 주제의 무게를 떠나 잠시 웃음을 선사한다. 문자 ‘E’를 읽는 방법은 ‘에’일까, ‘베’일까 아니면 ‘베에에∼’일까?
<왜>
퍼펫애니메이션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온 포야르 감독의 색감이 돋보이는 작품. 왕의 얼굴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어린 천사들은 지구를 여행하며 다양한 국가의 어린이들을 보며, 그들이 지닌 꿈과 현실간의 괴리를 알게 된다. 부드러운 움직임 속에서도 고스란히 매력을 발하는 따뜻한 색감이 매력적이지만, 감독이 보이던 예의 날카로움과는 거리가 있다. 유니세프의 어린이 인권선언문을 주제로 만든 작품 중 하나이다.
<Angel>
구름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천사가 되고픈 주인공. 그러나 현실의 그는 배고프고 보잘것없는 방 안에 갇혀 지내는 신세다. 어떻게 하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천사가 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그가 찾아낸 방법은…. CG애니메이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자연스런 색감 처리와 동작의 움직임이 자연스런 작품으로, 2002년 히로시마애니메이션영화제 수상작이다.
<순수한 기쁨>
현재 장편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을 준비 중인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의 안재훈, 한혜진 감독의 작품. 그림 그리기와 영화를 좋아하며 소주로 다져진 우정을 자랑하는 두 친구, 창수와 우섭의 삶을 통해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세련된 캐릭터나 감각을 자극하는 이야기 전개나 연출도 없지만 자근자근 씹어내는 듯 풀어내는 연출이 주제와 맞물려 독특한 분위기를 낸다. 2000 동아-LG국제만화페스티벌 장려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