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편의 영화들을 감독하고 수백편의 저예산 영화들을 제작한 B급 영화의 제왕 로저 코먼, 그의 이력 가운데 가장 독특한 작품들로 꼽히는 것은 바로 미국의 대문호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일련의 영화들이다. <적사병 가면> <갈가마귀> 등 포의 음울하면서도 환상적인 세계를 나름의 B급 테이스트를 가미한 호러물들로 제작했는데, 저 예산 영화들임에도 불구하고 고딕풍의 음산한 분위기를 잘 살린 매력적인 작품들로 완성되어 지금까지도 마니아들의 꾸준한 지지를 얻고 있다.
그 가운데 <어셔 가의 몰락>(1960)은 로저 코먼의 포 원작 영화들 중 첫 번째로 제작돼 상업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이후 다른 영화들이 나올 수 있었던 기반이 된 작품이다. 당시 싸구려 흑백영화만 찍던 로저 코먼에게 있어서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의 총천연색 컬러 필름을 사용한 최초의 대작이었지만,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제작비 20만 달러에 불과한 저예산 영화였다. 오프닝의 황량한 숲을 촬영하기 위해 실제 화제로 불탄 숲에 배우를 데려다 놓고 찍는가 하면, 영화에 쓰였던 소품과 세트를 고스란히 다른 작품에 재활용하는 등의 이야기는 값싸고 빠르게 찍기로 소문난 로저 코먼의 명성을 빛내는 전설적인 일화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만을 놓고 보면, 당시 메이저 제작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A급 영화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품격을 지닌 기이한 작품이라는 사실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싸구려 티가 안 나도록 공들여 제작된 세트와 함께 <하이눈>의 촬영감독이었던 프로이드 크로스비가 잡아낸 유려한 영상이 포의 원작이 가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과 비교할 때 문학적 향취는 줄어든 대신 등장인물들의 갈등구조는 더욱 심화되고 폭력성은 노골적으로 강조되어, 지하 납골당의 음산함과 어셔 가가 몰락하는 마지막 순간의 화려함 등 시각적 볼거리는 풍부하다(공포소설 <나는 전설이다>의 작가 리처드 매드슨이 각본을 썼다). 특히 원작보다 훨씬 기괴한 인물로 탈바꿈한 로드릭 어셔 역은 호러 명배우 빈센트 프라이스가 맡았는데, 그가 여동생을 생매장시키면서 보이는 음험한 눈빛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명장면이다.
최근 디지털 복원 기술이 발달하면서 과거의 명작들이 최신 영화들 못잖은 화질로 선보이곤 하는데, 아쉽게도 <어셔 가의 몰락>은 그런 모범사례에 들지는 않는다. 다소 빛바랜 듯한 색감에 잡티도 많이 눈에 띈다. 하지만 오리지널 화면비를 그대로 담은 안정적인 영상이기 때문에 감상에 큰 지장은 없다. 돌비 2.0 모노 음향은 지극히 고전 영화다운 사운드. 부록으로는 극장 예고편과 포토 갤러리가 수록됐다.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질 포토 갤러리가 참으로 반가운데, 본편보다 훨씬 화려하고 눈부신 색상의 사진자료들이 담겨있다. 때문에 오리지널 필름으로 영화를 본다면 어떤 느낌일지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