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로저 코먼이 만든 포 원작의 공포 영화들
2005-07-07
글 : 한청남
B급의 제왕이 영화화한 대문호의 작품들

<어셔 가의 몰락>이 출시되면서 함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로저 코먼이 감독한 에드거 앨런 포의 원작의 나머지 작품들에 관해서다. 1961년 작 <저승과 진자>에서부터 1969년 작 <리지아의 무덤>까지, <어셔 가의 몰락>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작품은 아쉽게도 국내 발매가 예정되어 있지 않다. 물론 미국 등 해외지역에서는 해당 작품들이 모두 DVD로 나온 상태이며, 특히 일본에서는 ‘포 괴기 컬렉션’이라는 이름의 고급스러운 박스세트가 발매돼 마니아들의 환영을 받기도 했다.

로저 코먼의 포 원작 영화들은 저예산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코먼 나름의 예술적 야심과 명배우 빈센트 프라이스의 괴연이 빛을 발하는 작품들이다. 또한 포의 원작이 내포하고 있던 괴기성과 품격이 깃들면서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로 제작된 수작들이기 때문에 DVD로 소장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고전 호러물이라는 장르적 한계로 인해 국내 출시가 언제 이루어질지 요원한 상태지만 어떤 작품들이 존재하는지 소개하는 차원에서 <어셔 가의 몰락> 외에 나머지 포 원작 영화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했다(제목 등 고유명사 표기는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으로 국내 출간된 서적 ‘우울과 몽상’을 참조).

저승과 진자 The Pit and the Pendulum (1961)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암벽 위에 우뚝 솟은 메디나 가문의 성. 음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곳에 영국인 프랜시스가 찾아온다. 누이 엘리자베스의 죽음을 통보를 받고 스페인의 외진 마을까지 왔지만 누이의 남편 니콜라스는 아내의 사인에 대해 속 시원히 털어놓지 않고 수상쩍은 행동을 보인다. 그런 가운데 누이가 생전에 연주하던 하프시코드 소리가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흘러나오는 등 기괴한 일들이 벌어진다. 결국 사태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지하 고문실의 끔찍한 실체가 드러난다.

포의 괴기 단편 소설 <저승과 진자>를 바탕으로 로저 코먼이 감독한 포 시리즈 제2탄. <어셔 가의 몰락>과 마찬가지로 주연은 빈센트 프라이스가 맡고 있으며, 각본 역시 리처드 매드슨이 맡는 등 주요 스탭들은 전작과 거의 동일하다. 프랜시스 역의 존 커(영화 <남태평양> 출연)를 비롯해 이름 있는 연기자들도 새로이 가세했는데, 이태리 호러의 거장 마리오 바바의 <사탄의 가면>에서 열연한 바바라 스틸의 할리우드 데뷔작이기도 하다.

때 이른 매장 The Premature Burial (1962)

1860년대 런던. 의대생 가이 카렐은 강경증(catalepsy)의 공포에 휩싸여있었다. 부친이 지하 납골당에 산채로 매장 당했다고 믿는 그는 자신 역시 정신은 말짱한 채 신체가 딱딱하게 굳어져 사람들에 의해 죽은 사람처럼 여겨지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가이는 자신을 위로해주는 연인 에밀리와 결혼해 행복한 나날을 보내려 하지만 주변에 일어나는 기묘한 일들과 생매장의 공포 때문에 신경쇠약에 시달린다. 그리고 마침내 발작이 시작되고 그토록 우려하던 생매장의 위기가 다가오게 되는데….

마찬가지로 포의 동명 단편 소설을 영화화. 촬영감독 프로이드 크로스비, 미술감독 다니엘 할러 등, 주요 스탭진 구성은 전작과 동일하지만, 각본이 리처드 매드슨에서 찰스 버몬트 & 레이 러셀(TV 시리즈 <환상특급>의 작가)로 교체되는 등 일부 변경이 있었다 . 게다가 단골 출연 배우인 빈센트 프라이스 대신 빌리 와일더 감독의 <잃어버린 주말>(1945)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레이 밀랜드가 주연을 맡았으며, 영국 해머 필름사의 호러 영화들로 유명해진 미녀 스타 헤이젤 코트가 출연함으로써 시리즈에 변화를 예고했다.

테일즈 오브 테러 Tales of Terror (1962)

포의 세 단편을 소재로 세 편의 이야기를 그린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 아내를 잃고 외로이 살아가는 남자에게 26년 만에 딸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남자는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지하실에 그 시체를 보관하고 있었다(모렐라). 아내가 친구와 바람피운 사실을 알게 된 남자. 그는 아내와 친구를 함께 살해하지만 아내의 고양이에 의해 그 사실이 폭로 당한다(검은 고양이). 음흉한 최면술사가 사람이 죽기 전 최면술을 걸어 정신을 유지시키는 실험을 한다(M. 발드마르 사건의 진실).

세 이야기 모두 빈센트 프라이스가 출연하고 있어 그의 원맨쇼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M>(1931) <미친 사랑>(1935)의 명우 피터 로레와 <프랑켄슈타인의 아들>(1939)의 베이질 래스본, 그리고 <십계>(1956)의 데브라 파젯 등 화려한 출연진들로 구성된 작품. 또한 주요 스탭이 교체된 전작과 달리 각본 리처드 매드슨, 미술 다니엘 할러, 음악에 레스 백스터 등 시리즈 1편부터 함께 해온 베테랑 스탭들이 뭉쳐 재미와 위트가 넘치는 작품으로 완성시켰다.

갈가마귀 The Raven (1963)

대마술사 스카라부스에 의해 까마귀가 된 삼류 마법사 베들로. 그는 선량한 마술사 크레이븐을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크레이븐 덕분에 마법에서 풀린 베들로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로 2년 전에 죽은 줄 알았던 크레이븐의 처 레노아가 남편을 배신하고 스카라부스의 애인이 되었다는 사실.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크레이븐은 스카라부스의 저택으로 향한다.

원작은 불길한 암시로 가득한 단편 시지만, 영화는 경쾌한 호러 코미디로 완성됐다. 전작 <테일즈 오브 테러>가 150만 달러 이상의 흥행 수익을 거둔 것에 고무된 로저 코먼은 빈센트 프라이스, 피터 로레에 이어 유니버설사의 호러 영화 <프랑켄슈타인> <미이라>로 명성을 떨친 보리스 칼로프를 기용해, 명배우들의 화려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마법대결을 그렸다. 또한 젊은 시절 로저 코먼과 함께 했던 잭 니콜슨의 깜짝 출연도 볼거리.

귀신들린 궁전 The Haunted Palace (1963)

1765년 뉴잉글랜드의 한 마을에서 악마적인 의식을 거행하던 커웬은 마을사람들에게 붙들려 화형 당한다. 반드시 부활하여 저주를 내리겠다던 그의 사후 110년. 커웬의 후손인 워드와 그의 아내 앤이 마을을 방문한다. 상속받은 저택을 보기위해 찾아온 그들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초상화 속 커웬의 모습을 쏙 빼닮은 워드를 보고 두려워한다. 아니나 다를까 워드는 커웬의 사악한 영혼에 지배당해 또다시 공포의 의식을 거행하려 하는데….

제목은 포의 동명 시에서 따왔지만, 이야기와 설정, 등장인물은 공포문학의 대표주자 H. P.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찰스 덱스터워드의 비밀>을 고스란히 차용했다. 그로인해 전작들과 달리 러브크래프트적인 초자연적인 공포가 도입되었으며, 죽음의 책 ‘네크로노미콘’, ‘고대의 존재’ 등 러브크래프트 팬들에게 익숙한 요소들이 등장하고 있다.

적사병 가면 The Masque of the Red Death (1964)

중세 이탈리아. 사악한 악마숭배자 프로스페로 왕자는 자신의 영지에 죽음의 적사병이 돌자 마을 전체를 불사르고 그곳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처녀 프란체스카를 성으로 납치한다. 적사병을 피하기 위해 성문을 걸어 잠근 프로스페로는 자신의 주위에 모인 주변 제후들에게 비도덕적인 유희와 쾌락을 가르친다. 이윽고 악마와의 계약을 위한 가면무도회를 개최하는데….

시리즈 중 최초로 영국에서 로케 촬영된 작품. 주역은 역시 빈센트 프라이스가 맡았으며, <때 이른 매장>에도 출연했던 악녀 전문 배우 헤이젤 코트도 출연하고 있다. 미술감독 다니엘 할러의 뛰어난 세트 디자인과 촬영감독 니콜라스 뢰그의 탁월한 영상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로저 코먼의 포 영화들 중 최고로 꼽히고 있다.

리지아의 무덤 The Tomb of Ligeia (1965)

죽은 아내 리지아의 영혼을 두려워하여, 은둔 생활을 보내던 버든 펠은 아내를 쏙 빼닮은 귀족 여성 로위나와 만난다. 밝고 활달한 성격의 로위나는 버든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버든 역시 마음을 열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허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버든의 저택에는 리지아의 화신과도 같은 검은 고양이가 나타나는 등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버든의 무서운 비밀이 밝혀지면서 사태는 파국으로 치닫는데….

로저 코먼이 연출한 마지막 포 원작 영화. 전작 <적사병 가면>처럼 영국에서 촬영하여 황량한 묘지와 드넓은 전원 풍경 등 색다른 이미지와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기묘한 형태의 선글라스를 쓴 빈센트 프라이스의 괴연은 명불허전. 각본을 쓴 로버트 타운은 훗날 로만 폴란스키 감독, 잭 니콜슨 주연의 걸작 <차이나타운>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전설의 호러 명배우 빈센트 프라이스

로저 코먼의 포 영화들에 단골로 출연하면서 명성을 떨친 빈센트 프라이스는 1911년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빈센트 레너드 프라이스 주니어. 예일 대학 졸업 후 런던 대학, 뉘른베르크 대학에서 유학한 수재로, 유학 중 연극에 흥미를 가진 그는 런던에서 첫 무대를 가진 뒤 브로드웨이로 진출한다.

1938년 <호화스런 서비스>로 영화계에 입문한 뒤 1944년 작 <The Eve of St. Mark>와 <로라> 등에서 안정된 연기력과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선보였으며, 유럽 귀족과도 같은 풍모를 바탕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영화계 데뷔 직후부터 보리스 칼로프 주연의 <런던 탑>(1939), <돌아온 투명인간>(1939) 등 공포, SF 영화들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3-D 입체 영화 <밀랍인형의 집>(1953)을 찍은 뒤 본격적인 호러 전문 배우로 활약한다. 로저 코먼의 포 연작들로 미국을 대표하는 괴기 스타가 된 그는 이후 연극 무대와 TV를 오가는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다.

말년에는 그의 열렬한 팬인 팀 버튼 감독의 영화 <가위손>에 출연했는데, 그것이 그의 유작이 되었다. 1993년 10월 25일에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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