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솔직한 쪽을 택했다”
최익환 감독은 여고에 불쑥 들어가더라도 바바리맨쯤으로 오해받지 않을 만큼 어려 보인다. 그 때문에 소녀의 마음 어두운 구석의 파장을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는 단편영화 <트루 로맨스> <나는 왜 권투심판이 되려 하는가>로 주목받았던, 벌써 서른여섯 먹은 감독이다. <여고괴담>의 조감독을 했던 경력이 십년 가까운 시간을 돌아 시리즈 네 번째 영화에 맞닿은 신기한 인연. 언제나 정체성과 기억에 관해 물어왔다는 그는 데뷔작을 만들면서 목소리에 자신의 존재 전부를 실을 수밖에 없는 슬픈 원혼을 발견했고, 시리즈에 묻히지 않는 비전을 드러냈다. 첫 번째 시사회가 끝난 다음날, 필름현상소에 가기 전의 바쁜 막간, 약간은 혼돈에 빠져 있다는 최익환 감독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기자시사를 마친 소감이 어떤가.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도 든다. 내가 기본적으로 영화를 보는 기준과는 다른 측면으로 영화를 평가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영화에 대한 기준 자체가 애매해지고 있다고나 할까.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 건가.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관객을 무섭게 만들기 위해 어떤 기술적 테크닉들이 쓰였는지에 먼저 주목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느낌의 호러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사실 <여고괴담>이라는 시리즈 자체가 공포영화로서의 한계를 많이 안고 가는 것 아닌가. 머리 풀어헤친 여고생 귀신이 또 나온들 어색하기만 할 거다. 그래서 여고라는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간의 관계들에 주목했고, 그런 드라마들을 통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려 했다. 그런데 하도 ‘무서운가 아닌가’에 주목들을 하니까 뒤늦게야 ‘무서워야만 하는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인 남자가 여고생들의 정서를 잡아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도 애틋한 느낌이 있다.
=<여고괴담> 1편 조감독을 하면서 아이들이랑 많은 이야기도 했고, 이후에도 고등학생들을 만나서 피자 사주면서 취재하기도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들의 삶도 내가 상상한 거랑 그리 다르지는 않더라. 그래서 여고생에게 맞추기보다는 나에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연기 지도 할 때는 배우들에게 “넌 이게 자연스럽니?”라고 물어보고, 배우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엘리베이터나 중앙복도 등 영화의 무대로 사용된 학교 건물이 인상적이다. 어떻게 섭외한 장소인가.
=구리시의 우리집 옆에 있는 학교다. (웃음) 집에 가는 길에 요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들어가봤다. 학교 사람들이 너무 친절해서 바로 교장선생님도 만나게 해줬다. (웃음)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복도였다. 영언이에게 또 다른 시공간을 소개하기 위한 공간으로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다. 학교 행정실장이 애니메이션 학교 실장 출신이어서 많이 열려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편했다.
-집에서 가까워서 더 편했겠다.
=스탭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웃음)
-가장 좋아하는 <여고괴담>은 어떤 작품인가.
=개인적인 취향에 대한 문제일 텐데, 2편이 제일 재미있었다. 앞으로 <여고괴담> 시리즈를 감독하게 될 분이 있으면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연출을 하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전작과 닮은 점들을 피해가고 싶은 본능이 생기더라. 하지만 정서적이거나 여고생들의 관계에 초점을 많이 맞춘 드라마 때문에 2편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점이 분명히 있을 거다. 귀신이 주인공이라는 측면이나 미스터리의 진행방식은 좀 다르지만.
-귀신을 주인공으로 설정하는 경우에 감수해야 하는 위험성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일단은 공포에 한계가 있다. 주인공이 귀신이라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관객에게 안겨주기가 힘들다. 대신 그런 위험성을 감수한다면 좀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귀신이 된 아이에게도 여전히 공포스러운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더 무서운 장면도 있다. 특히 죽은 음악선생 희연이 갑자기 영언 앞에 나타나는 장면.
=그건 음악선생이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영언이를 한번 더 찾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언이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듣고 싶어서 그 목소리를 흉내내며 노래를 부르며 다가오는 것이다.
-<여고괴담4: 목소리>는 김용흥 촬영감독의 입봉작이다.
=김용흥 촬영감독과의 친분은 아주 오래됐다. <모텔 선인장>의 후반작업 코디네이터를 할 때 김용흥도 촬영부에 몸담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내 단편영화 <나는 왜 권투심판이 되려 하는가>의 촬영을 맡게 되었던 거다. 워낙 드라마를 잘 아는 친구여서 보여주고 끌어주는 촬영 같은 경우 굉장히 좋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래 이미지를 만드는 데 대해서는 좀 까다로운 편이라(웃음) 조명기사와 촬영감독이 고생을 많이 했을 거다. 이미지나 라이트 사용 계획도 미리 다 꼼꼼하게 약속을 해놓고 들어갔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별 고민없이 단숨에 진행됐다.
-<여고괴담> 1편에는 어떻게 조감독으로 참여했던 건가.
=서울대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3학년 때 휴학하고 영화아카데미에 다녔다. 아카데미를 마친 뒤 복학해서 4학년을 마치고, <세친구>와 <모텔 선인장> 연출부를 했다. 그러다가 서울단편영화제 때 박기형 감독과 친해져서 그 친분으로 <여고괴담>의 조감독을 맡게 됐다.
-멀쩡히 학교 다니다 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단 말인가.
=원래는 영화에 관심도 없었는데 공짜로 1년 동안 영화를 가르쳐준다기에 혹해서 시험을 봤다. 빠듯하게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당시 영화아카데미 입학 시험 비중의 50%가 영어여서 유리했다. (웃음) 지금은 안 그런다더라. 또 면접볼 때가 한창 <구미호> 등의 영화가 나오던 때라 한국영화의 CG 기술력이 서서히 부각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컴퓨터 잘하냐기에 잘한다고 말했고, 아마도 심사위원들이 그런 쪽으로 쓸모있을 거라 생각해서 뽑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웃음)
-휴학하고 아카데미에 지원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과는 다른 걸 해보고 싶었다. 색다른 것을 갈구하는 지점이 당시에는 있었고, 자연스럽게 영화에 대한 동경 같은 게 생겼던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카데미를 알게 되어 지원을 했던 거다.
-학교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건가.
=아니. 방위 갔다와서 복학하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었다. (웃음) 공부가 재미있어서 장학금도 많이 받았다. 그뒤로 언론사에 들어가기 위한 스터디를 하다가 이곳저곳 떨어지고, 그래서 영화로 시선을 돌린거다. (웃음)
-2000년부터 2003년 초까지는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유학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필름 메이킹을 공부했다. 물론 미술학교여서 미술공부를 제일 많이 했다. 비디오아트와 퍼포먼스도 공부하다가 대학원에 갔는데, 재밌었지만 내가 놀 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필름 메이킹으로 돌아와서 실험영화도 찍고, 너무 재미있게 공부했다. 많은 힘이 되었던 시기다.
-그런데 유학은 왜 갔나.
=<여고괴담> 끝내고 바로 감독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다른 걸 하고 싶었고, 긴 여행도 가고 싶었고. 그래서 갔다. (웃음) 공부를 하고 싶었다기보다는 여러 군데 흥미가 워낙 많아서.
-특별히 사운드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가 있나.
=이미지는 24프레임으로 돌아가는데, 사운드는 하나의 단위가 1초에 4만4천개 이상이다. 이거 정말 완전히 다른 세계더라. 공간에 스피커를 어떤 식으로 설치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경험들을 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사운드의 영역이다. 진짜 재미있다. 이건 좋은 스피커로 듣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감각을 제공해주는 차원이다. 그리고 실험영화의 사운드 믹싱을 직접 하다보니까 앞으로도 사운드의 장점들을 잘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상업영화를 너무 실험적으로 만들 수는 없다. <여고괴담4: 목소리>의 사운드 믹싱을 함께한 블루캡의 김석원 대표도 영화는 관객의 시선에 맞추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관객이 편안하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만든 것이다. 다른 영화들과의 차별점이 있다면 그건, 이미지보다도 오히려 사운드가 앞서서 나오는 경우도 있는 작품이라는 거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나.
=사운드가 만들어내는 공포에 초점을 둔 게 아니라, 목소리만 남은 애가 경험할 수 있는 사운드는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영화는 어차피 시각과 청각이 함께 어울려야 하는 거니까 사운드가 들릴 때 거기에 맞춰서 관객이 보게 될 이미지를 만드는 고민도 있었다. 처음에는 미세한 사운드로 채워넣으려고 했다. 차임소리나 바람소리 등. 소리가 들린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움직인다는 증거인데, 그렇다면 움직이는 건 물이나 바람 같은 것들이 아닌가. 원래 사람은 그런 작은 소리에 더 공포를 느낀다. 그런데 그걸 드라마 속에 녹아들도록 하는 게 참 힘들더라.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아이들의 연기를 살리는 데 더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아이들의 연기가 어색해보이면 안 되는 거니까 최대한 드라마에 맞추어서 가자는 생각이었다. 절대 자극적인 소리를 만들어내 공포를 배가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영언의 목소리가 사라져가는 과정은 어떻게 구상한 것인가.
=그것 역시 드라마를 중심으로 구상한 것이다. 내가 만든 실험영화 중 하나가 목소리가 사라져가는 여자에 대한 거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 사운드 아티스트와 공동으로 만든 영화다. 한 여자가 자신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목소리가 사라져가면서 점점 추상적인 단어로 바뀐다. 그리고 화면에 나오는 여자의 과거 역시 추상적인 이미지로 변해간다. 기억들이 재구성되다보니까 사실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 여자가 확신하는 건 어느 여름에 머물렀던 친구집의 카펫 색깔이나, 잠자리를 함께했던 남자 귀에 뿜는 숨소리. 그런 추상적인 것들이다. <여고괴담4: 목소리>를 찍으면서 그 영화 역시 사운드팀한테 보여주었다. 물론 <여고괴담4: 목소리>는 실험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튀는 듯한 음을 배제하고 오히려 편안하게 가려 했다. 사실 기억이라는 게 주관적인 경우가 많지 않나. 그렇게 잘못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게 참 재미있는 것 같다. <여고괴담4: 목소리>도 그런 이야기이고.
-계속해서 사운드 실험을 해나가고 싶은 생각이 있나. 물론 상업영화에서 그런 실험을 해나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항상 상업영화만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영화의 구성요소들을 실험하기 위해서라면 상업영화가 아닌 포맷도 많다. 상업영화는 언제나 관객에게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운드 실험을 하고 싶다면 실험영화를 만들면 되는 거다. 그러고나서 미술관 같은 곳에서 틀든지 하면 될 거다. 그런 걸 받아줄 수 있는 관객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를 보니까 주인공들이 졸업하고 학교를 떠날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아이들처럼 보인다.
=따지고보면 그게 허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순간에 그저 머무르고 싶다는 슬픔은 잘 드러난 것 같은데.
=특히 선민이라는 캐릭터는 어차피 그 순간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캐릭터다. 그래서 죽어서 떠도는 영언을 지금이라도 빨리 학교에서 내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간직하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드라마를 풀어내기보다는 설명자를 등장시켜 마무리하는 것이 좀 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할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고민이 많았다. 그쯤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분량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친구인 류승완 감독에게서도 조언을 많이 얻었는데, 항상 시나리오 페이지를 계산하고 작업하는 방식 등을 배웠다. 후반부 장면들은 리허설을 할 때도 걱정이 참 많았다. 하지만 정적인 상태에서 설명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않고 액션을 가미하게 되면 규모가 너무 커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처럼 이야기를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첫 영화를 만들고 나서 조금 아쉽게 생각되는 부분은 없나.
=희연 선생이 첼로줄에 묶여서 죽는 장면 같은 경우. 첼로줄들이 몸을 향해 날아가는 컷이 많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받았다. 보여줄 땐 좀더 확실히 많이 보여줘도 되는 장면이었는데…. 그리고 영언 목소리에 놀란 아이들이 집단으로 도망치는 장면도 컷이 너무 짧았다. 아이들이 복도 끝으로 달려가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10초 정도지만, 10초 이상의 액션을 거기서 뽑아냈어야 옳다. 영화를 편집하면서 내가 액션에 대한 실제 시간과 영화로 보여지는 시간의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공포영화를 많이 보나.
=많이 보진 않는다. <여고괴담> 1편에 참여했던 것이 4편을 감독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사실 요즘 공포영화에서 귀신이 기어나오고 이러는 건 전혀 무섭지 않다. 그냥 우습다. (웃음)
-그럼 뭐가 무섭나.
=나는 공포영화를 전혀 무섭게 보지 못한다. 슬래셔 무비를 보면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서운 것과 잔인한 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항상 궁금하더라. 예를 들어, 신체절단 영화들을 보면 너무 잔인하기만 하지 않나. 그런데 귀신이 신체절단을 행하면 사람들이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범인이 사람이면 스릴러이고 귀신이면 호러다. 이런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내가 본 공포영화들이 현실적이지 않아서 덜 무서운 것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차기작으로 HD영화를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다.
=코미디적 상상력을 살려서 실사에 애니메이션 리터치를 가미해 만들 것이다. 디지털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고민을 하다가, 이런 방식이 즉발성이나 상상력을 집어넣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줄 것 같아서 구상하게 된 거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웨이킹 라이프>와도 비슷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