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김지운식 코미디 [2] - 김지운·장진 인터뷰 ①
2000-02-15
사진 : 정진환
정리 : 조종국
정리 : 황혜림
김지운과 장진- 간첩, 반칙왕을 인터뷰하다

일찍이 연극무대에서 만나 평소 호형호제 하는 사이로 친분을 나누고 있는 김지운 감독과 장진 감독. 지난해 6월 <간첩 리철진> 개봉을 앞두고 <씨네21>의 요청으로 김지운 감독이 장진 감독을 인터뷰한 바 있다. 이번에는 장진 감독이 <반칙왕>을 만든 김지운 감독을 인터뷰 했다. 장진 감독은 “할말이 많다”며 ‘전의’를 불태웠지만, 두 사람은 오랜 ‘영화동지’답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의미있는 질문과 대답을 이어갔다.

복면을 쓴 구애, 그게 모티브야

장진 | 축하드려요, 안전사고 없이 영화가 끝나서. 저도 극장에서 관객과 같이 영화를 봤어요. 증거까지 보여드렸죠? 예매 티켓.

김지운 | 주운 거 아냐? 다른 영화 보고 나오다가.

장진 | <반칙왕>은 일단 기획부터가 좀 위험한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대로 밀어붙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궁금했어요. 형 생각에는 <반칙왕>이 갖는 의미, 미덕이 뭐예요?

김지운 | 사전 화두와 사후 화두는 상당히 상반된 요소 같지만, 결국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영화를 만든 뒤 그게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또는 영화를 읽어내려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나를 발견하기도 하거든. 그러니까 보는 사람들이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특별한 것들을 읽어낼 때, 아 그럴 수도 있구나 싶더라구. 결국 모든 것들은 내 무의식의 소산이고, 무의식은 의도하고 통제하지 않았을 뿐 사실은 내 안에 있는 것 같아. 내 무의식도 내 의지의 반영일 거고, 결국 작품으로 만들고 난 결과는 어떤 목적을 억지로 돌출시키는 것이라기보다 보여지는 대로의 의도를 지니는 것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드네.

장진 | 물론 재미있게 봤지만 좀 아쉬운 게 있었어요. 형이 맨 처음에 나한테 대본을 보여줬을 때, 반칙왕이나 가면이란 코드가 영화적으로 참 재미난 코드라고 생각했어요. 가면을 쓰고 있을 때와 벗은 상태의 모습에 대한 것들, 그리고 왜 가면을 벗은 상태에서는 가면을 썼을 때보다 삶에 파이팅이 없을까, 그런 화두가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그 원안에서 없어진 부분들이 많아요, 그렇죠?

김지운 | 아마 장 감독은 처음 그 아이템을 들었을 때 공감하고 매력을 느꼈던 내 영화적 코드들이, 결과물에는 그때 달떠서 얘기한 것만큼 안 나왔다고 느끼는 것 같아. 그런데 매번 그런 코드들을 풍성하게 집어넣는 것도 좋지만, 그것을 전체 1시간 반, 또는 2시간 분량에 맞게 제거하고, 분배하고 조절하는 균형감도 연출자나 작가가 가져야 하는 덕목이란 생각이 들어. <반칙왕>은 가감하는 과정에서, 작은 이야기로 시작해 큰 의미를 끌어낼 수 있는 전략으로 갔던 거지. 그래서 작업 초기에 풍요롭게 얘기했던 코드의 다양성에 대한 아쉬움을 느낀 게 아닐까.

장진 | 제가 형의 코미디에 손을 드는 가장 큰 이유는 형 나름의 시추에이션을, 김지운식으로 풀어내는 방식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반칙왕>은 상당 부분이 배우들의 기능, 재기에 의존한 것 같아요. 소시민이 우연히 레슬링을 배우고 가면을 쓰고 반칙을 하고. 반칙이 통용되는 사회를,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경험하지 못하고 다른 음지에서 경험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재미난 상황이 드라마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한 게 아닌가 싶더라구요. <조용한 가족>은 배우보다는 철저하게 작가가 상황을 엮어가는 재미로 웃겼다고 보거든요. 수첩에 질문으로도 써왔어요. ‘드라마를 잊었는가?’ 드라마의 중요성, 힘을 잊으셨나 하는, 우매한 질문입니다.

김지운 |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은 읽어내려가는 방법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 이야기 전개방법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조용한 가족>은 어떤 상황이 있고, 그 절묘함 때문에 웃지 않고 못 배기는 그런 상황을 가져온 시추에이션 드라마의 성격이 강했지. <반칙왕>은 가장 큰 모티브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복면을 쓰고 사랑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의 매력이었어. 한 인물, 그가 보여주는 따뜻함, 뭔가 몸부림치는 안간힘 등 캐릭터를 쫓아가는 거니까 시각 자체를 옮겼다고 할까. 무기력하고 바보스럽고, 소시민적인 인물인데, 가면을 쓰면 아버지한테 가서 효도하겠다고 말하는 진실이 나오고, 링에서 싸울 수도 있는 그런 남성적 판타즘 같은 것들을 우화적으로 보여주는 것, 레슬링이란 소재를 선택할 때도 그런 정감, 우리가 잃어버렸던 따뜻한 감성들을 배치하고 보여주려 한 것이기 때문에 아마 작품을 전개하는 방법에 차이가 생긴 것 같아.

풍자는 놀면서 길찾기

장진 | 풍자는 결국 세상과 영화에 실린 뭔가가 일치됐을 때 극명한 리얼리티가 되는 것, 그게 풍자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형 생각에 <반칙왕>이 가지고 있는 풍자성은 어떤 거예요?

김지운 | 풍자라는 것은 사실 정공법이 아니고, 정면대결이 아니고, 상대를 사이드나 밑에서부터 공격해 들어가 균열감을 주면서 무력화하는 거랄까. 정색하며 덤비고 충돌하는 게 아니라. 그리고 풍자에는 유희정신이 있어. 길을 찾으면서 가되 딴청 피우면서 가는 거지. 놀면서 길찾기. 한바탕 웃음으로 끝나는 요절복통 코미디, 그 속에서 어떤 부분들을 얻어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일 텐데, 현대인의 일상 속에서 자기 무력감을 탈출하고 싶은 욕구, 슬픈 자화상 뭐 그런 평을 들었잖아. 내 안의 또다른 나를 찾고 싶어한다는 말도 있었고. 한계를 맞닥뜨렸을 때 공포감이 오는데, 한번도 자기를 변화시키지 않고 그럴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한 소시민이 자기를 극복해내려는 발버둥 자체, 우스꽝스럽지만 어딘지 슬픈 기운도 있는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어.

장진 | 형만 해도 적이 분명한 시대의 문화적 체험을 했을 텐데, 그때는 아주 직설적인 화법이라든지 선동적인 것, 구호가 ‘짱’이던 시절이었죠. 완성도나 테크닉이 떨어져도 목소리만 분명하면 작품이 살던 때였죠. 그래서 오히려 풍자의 의미를 잘 못 잡던 시절인데, 아무리 개인의 기질 차가 있다 해도, 형 세대들에서 나오기 힘든 형의 이야기 방식이라든지 풍자성이 참 보배 같아요.

김지운 | 내 과거를 들춰내는 부분이긴 한데, 난 어렸을 때부터 참 ‘솔로지향적’이었던 것 같아. 어디랑 섞이지 못하고, 또 섞인다 한들 뭐 구색이 맞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그런 편인데 어떤 경향이나 사조 같은 것에 휩쓸려본 일이 거의 없거든. 아마 나랑 가장 거리가 먼 단어가 의기투합, 도원결의 그런 걸 거야. 그런 이야기 들으면 난 싸늘해져. 의기충천해서 의기투합하겠다는 남성들의 모습을 보면 상당히 냉정해지지. 그렇게 모여서 잘되는 것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설사 잘된다 한들 뭐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장진 | 이 사회는 혼자 떠들면 궤변이지만, 옆에서 누가 같이 떠들어주면 그게 정변이 되거든요. 그게 바로 연대고, 힘이 되는 건데, 그런 것에 대한 필요성은 못 느끼나요.

김지운 | 그렇게 말하니 내가 갑자기 고독한 예술가가 된 것 같네. 나는 내가 개인적인 코미디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대중적인 맥락을 타고 들어갔을 때 나오는 반응이 신기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내가 대중화한 코드를 속성으로 가지고 있는 건지, 나는 기존 코미디, 다른 영화에서 비껴가려는 욕구도 있고, 내 성향에 맞는 코미디를 하고, 변종 장르를 하려고 하는데 그게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수용되는 게 놀랍거든. 물론 내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고, 나랑 작업하는 배우, 스탭, 제작자 등의 힘으로 개인적인 코미디를 대중적인 감성으로 끌어올 수 있었던 거겠지만. 이번 제작사 봄, <조용한 가족>의 명필름 모두 기존 영화사에서는 선뜻 나서기 어려운 작품을 맡아줬으니 운이 좋았던 거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공유감, 그 정도가 내가 생각하는 연대인 것 같아. 개개의 이슈나 사조에서 말하는 연대나 발언을 통해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다른 의미지.

가끔은 사냥꾼의 시선으로, 가끔은 농부의 마음으로

장진 | 신문이나 뉴스를 잘 안 보는 것 같은데, 그러세요?

김지운 | 아니, 신문도 잘 보고, 뉴스도 잘 봐.

장진 | 그래요? <반칙왕>을 보면 은행원이 주인공인데 IMF라든가 하는 시대적 고민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지 않잖아요. 예술작업자로서 문화창작자로서 시대적 고민을 작품 속에서 어떻게 풀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요.

김지운 | 현실적인 이슈를 민감하게 보려고 하고 관심도 많은데, 삼류작가일수록 말을 직접적으로 하고, 시대적 요청에 더 부응하는 것 아닌가. 어느 책에 나오는 말처럼, 예술가가 사냥꾼의 시선을 가져야 하는 시대가 있는가 하면, 농부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시대가 있는 것 같아. 대중예술 하는 사람이면 그런 시대적 요청에 따라갈 수도 있어야겠지만, 난 좀 약한 것 같아. 하지만 난 황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한번도 리얼리티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 리얼리티라는 게 사실은 황당하지만 그럴 수 있겠다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현실적인, 직접적인 이야기를 자제하게 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자꾸 풀어가면서 정서적 공감을 끌어내고. 예술을 하는 사람은 고도의 이성적 체계와 질서에 따라 만들지 모르지만, 수용하는 사람은 정서적 반응을 하잖아. 난 감성에 호소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조금 유리된, 우화적인 분위기가 풍길 수 있겠지. <조용한 가족>도 그렇고, 내가 처음 쓴 ‘좋은 시절’이란 시나리오도 그렇고 지나간 것들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많아. 나도 모르게 지나간 것의 현재성, 현재적 의미를 자꾸 되살리고 싶고, 타르코프스키가 영화를 ‘봉인된 시간’이라고 한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싶어.

‘열연’은 싫어, 쿨한 연기가 좋아

장진 | 이번 작품에서 나는 송강호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것보다, 늘 믿었던 대로 잘해냈다는 생각을 했는데, 형의 배우에 대한 의존도는 어느 정도예요?

김지운 | 나는 배우의 매력이 발산되는 영화를 하고 싶은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연기가 ‘열연’이야, 열연. ‘열연했다’는 그런 연기가 너무 싫어. 우리나라 배우들이 열연을 많이 하는 것 같아.

장진 | 배우들에게 위험한 게 너무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해, 나는 배우들이 최선을 다했다고 그러는 게 닭살이야. 너무 그렇게 최선을 다해버리면 숨쉴 틈도 없고, 여백도 없고….

김지운 | 좀 다른 얘기 같은데, 나는 이상한데서 큰 감동을 받아. <굿바이 칠드런>에서 엄마가 레스토랑에서 장난치는 아이를 애정어린 눈길로 야단치는 그런 연기가 너무 좋아. 그건 연기도 아니야. 그냥 엄마들의 표정을 짓는 건데, 모성을 다 보여줬다고 생각해. <스네이크 아이>에서 마돈나가 술집 같은 데서 이야기하다 말고 먼저 가겠다고 일어나는, 그런 연기가 좋아. 나는 먼저 일어나고 싶어도 선배들이니, 중요한 사람들 있는 데서 한번도 일이 있어서 먼저 가겠다 그러질 못하는데, 마돈나가 그런 걸 보여주는 게 상쾌해. 좀 쿨한 연기, 코미디도 쿨했으면 좋겠어.

장진 | 형도 형 스타일을 믿는 것 같아, 형이 아무리 배우한테 의존한다고 해도 형 스타일은 영화에 묻어나와요. 너무 작가주의나 스타일리스트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배우를 죽이고 영화에서 감독이 보이게 하잖아요. 근데 형은 참 편하게, 고집스럽지 않게 작업하는 것 같아요. 영화를 보면 배우와 감독이 상당히 친할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나는 그것도 감독의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김지운 | <반칙왕>은 송강호의 재능과 유례없이 독특한 연기를 많이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영화 만들 때 전체적인 톤과 리듬만 생각해. 촬영 때 배우나 스탭들에게 현장에서 논다는 기분으로 하자고 했어. 작업을 방만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내 전략이자 전술이야. 나는 뉘앙스에 기대고 그걸 집요하게 쫓아가는 스타일이거든. 이를테면 코미디는 쉴새없이 대사가 튀어나오고, 빠른 커팅이 있는 게 기본인데, 나는 오히려 간과하기 쉬운 어떤 뉘앙스를 끄집어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뉘앙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그걸 끄집어내기 위해 뭘 던져서 충돌시키고 그러는 편이지. 그런 점에서 배우들, 스탭들이랑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나는 연극할 때도 공연 직전에 새로운 대사를 막 던져주고 그랬어. 그러면 배우가 긴장하게 되고 생생한 대사가 나오거든. 고도의 훈련을 통해 나오는 연기에 조금씩 다른 걸 던져주면서 신선한 기운을 줘야 한다는 생각을 영화에도 옮겨온 것이지. 그래서 현장에서 많이 바꾸는 편이지. 하지만 전체적인 톤을 항상 쥐고 있으니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고. 변증법적인 이야기인데, 기존에 깔려 있는 것에 뭘 하나 던졌을 때 일어나는 파장, 파열, 충돌에서 나오는 새로운 기운, 그런 걸 포착하려고 하는 거지. 리허설도 별로 안 하고 배우들이랑 사전에 얘기도 많이 안 해. 나도 감으로, 배우들도 감으로 왔으면 했거든.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