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적인 세상을 간지럼 태우자
여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광대가 있다. 직장에선 게으르고 무능하다는 이유로 궁지에 몰리고, 아버지에겐 “언제 철들래”라고 구박받으며, 마음에 둔 여자한텐 기껏 큰 맘 먹고 사랑을 고백했다가 “술 드셨어요?”라는 대답을 듣고, 여자에게 상처 받은채 광화문 앞을 가면에 넥타이 차림으로 질주하는 남자. 그는 우리를 대신해 고통받고 상처받으며, 피흘리고 핍박받으며, 난처해지고 좌충우돌하며, 바보짓을 하고 설움을 당한다. 이를테면 그는 태어날 때 불운이라는 탯줄을 끊지 못한 채 위험천만한 세상의 공기를 들이마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며 손뼉 치며 목젖 울리게 웃어제껴도 죄책감이 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자신의 불행과 낭패를 대행해주는 2000년의 채플린이며, 우리 자신의 신경증과 콤플렉스를 떠안은 서울의 우디 앨런이기 때문이다.
<반칙왕>의 주인공 대호는 “배, 배, 배신이야. 배반, 배신”을 연발하던 <넘버.3>의 조필 송강호의 육신과 음성을 빌려, 극장을 세상살이의 정신적 압박에서 해방되는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적어도 한국영화에서, “코미디는 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절망으로부터의 도피”라는 비평가 크리스토퍼 프라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작품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반칙왕>은 그 흔치않은 예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98년 자칭 코믹 잔혹극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한 김지운 감독은 두 번째 영화 <반칙왕>에서 코미디 장르에서 독창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작가의 길을 보여준다.
그는 <넘버.3>의 송능한, <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의 장진과 함께 당대의 코미디 작가 3인방이다. 물론 그들의 차이를 무시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단적으로 김지운은 송능한처럼 피가 뜨거운 사람이 아니고, 연극무대라는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장진보다 훨씬 영화광 체질이다. 모두 2편씩 만든 이들 작가의 우열을 논하는 건 어리석다. 일단 뛰어난 작가들이 연이어 등장한 시기에 주목하자. 코미디가 산업을 움직이는 촉매일 뿐 아니라 예술가를 낳는 태반이기도 함을 입증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50년대 악극단에서 90년대 기획코미디까지
국내에서 코미디는 50년대 악극단의 전통에서 시작했다. 전쟁이 휩쓸고간 황폐한 대지에서 유랑극단의 천막은 현실의 궁핍함을 잊을 환상과 웃음과 눈물로 부풀었다. 할리우드 무성 영화의 스타들인 채플린과 막스 브러더스의 피를 이어받은 슬랩스틱의 장인들, 김희갑, 구봉서, 양석천, 양훈, 곽규석 등 악극 배우들은 50년대 말 활동 사진의 세계에 포섭된 뒤 6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한 축을 차지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TV 보급은 영화 장르로서의 코미디가 더이상 숨쉴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70년대 영화현장 전반이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코미디는 배우들이 방송사로 발길을 옮기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코미디 영화는 이주일, 심형래, 김병조, 최양락 등 TV 코미디언들이 자기 이미지와 인기를 확장하거나 활용하는 부수적 무대에 머물렀다.
90년대 젊은 프로듀서들의 영리함이 코미디를 무덤에서 일으켜세웠다. 92년 <결혼이야기>, 93년 <미스터 맘마>로 이어지는 로맨틱 코미디는, 영화가 통계와 아이디어로 굴러가는 산업이며 충무로는 아직 전근대적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에 힘입어 한국영화의 유일한 대안처럼 여겨졌다. 그때 <투캅스>가 나왔다. 뇌물과 부패가 생활의 일부인 한국사회에서 근엄하기 이를데 없는 경찰에 대한 풍자는 대중의 박수를 받을 만한 힘이 있었다. 동시대 감독들 가운데 뛰어난 편집감각을 가진 걸로 정평이 난 강우석 감독은 <투캅스>에서 자기 재능을 십분 발휘했다.
그러나 흙 속에 파묻혀 있다가 채 피와 살이 소생하기 전에 뚜벅뚜벅 무대 전면으로 걸어나온 코미디는 영화를 산업이라 믿는 기획자들의 뇌수를 강박관념으로 채워넣었다. 90년대 중반까지 기획 영화는 곧 코미디였고, 많은 감독이 농담과 개그의 수집가가 됐다. 코미디 강박에 시달리던 이 무렵이 거품경제가 절정을 향해 줄달음치던 시기였다는 게 단순한 우연일까? 풍요와 사치, 소비와 향락이 시대정신이던 시기에 박중훈은 최고의 코미디 배우가 됐다. 박중훈은 기꺼이 물방울 다이아몬드의 노예로, 일확천금의 신화를 꿈꾸는 사기꾼으로, 남성적 판타지와 편견의 수호신으로 출현해, 저속하고 비열하고 이기적인 우리 내면의 맨얼굴을 드러냈다. 눈 앞의 돈다발과 늘씬한 여자 다리를 보며 즐거움을 감추지 않는 그의 표정이 소돔의 몰락을 예고하는 징조였음을 당시에 알아차리긴 쉽지 않았다.
한편에선 코미디를 통해 작가 겸 연출자로 입지를 다지려는 시도도 있었다. 여균동의 코미디 <세상밖으로>는 80년대의 상흔이 가벼움의 미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 됐다. 순수한 영화적 재미에 탐닉하려는 시도로는 김용태 감독의 <미지왕>을 들 수 있다. 카메라가 사고할 수 있는 장난끼를 벼랑 끝까지 밀고나간 이 영화는 극소수 영화광들을 만족시키는 데 그쳤다. 영화광 출신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는 그 중간쯤에 있는 영화라 할 만하다. 이런 영화들이 풍자와 유희, 그 사이에서 활로를 모색했지만 작가의 개성을 온전히 드러내기엔 부족했다. 반면 한번도 상처입은 적 없는 듯 흠없이 매끄러운 피부를 가진 로맨틱 코미디는 이광훈의 <닥터봉>, 한지승의 <고스트맘마> <찜> 등으로 기획 영화의 생명력을 보존해갔다.
송능한-장진-김지운, 세가지 색 코미디 장인들
90년대 후반 영화산업 내부에서 반성의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멜로, 액션, 스릴러 등 장르 다변화로 이어졌지만, 코미디 장르 안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을 촉발시켰다. 송능한, 김지운, 장진의 데뷔작이 나온 97년, 98년이 바로 이 시기. 개별 작품의 성패를 떠나 송능한, 김지운, 장진, 세 작가가 이전 코미디와 다른 점은, 무엇보다 그들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 겸 연출자이며 자신 색깔이 분명하다는 데 있다.
90년대 충무로 주류 영화를 지배한 코미디 생산시스템은 프로듀서의 기발한 아이디어, 전문 시나리오 작가의 대본, 시나리오 대로 깔끔하게 화면에 옮기는 연출자라는 세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었기에 연출자의 개성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송능한, 김지운, 장진의 등장은 코미디 대량 생산시스템과의 결별을 상징하는 사건인 셈이다.
물론 시스템의 변화는 미학의 차이가 낳은 결과다. 이들의 영화는 90년대 주류 코미디의 두 가지 전통, 말랑말랑한 로맨틱 코미디와 박중훈식 노골적인 풍자극에서 벗어나 있었다. 송능한 감독의 <넘버.3>에서 숨돌릴 틈 없이 쏟아내는 지독한 냉소와 독설은 삼류가 지배하는 현실과 깡패에 대한 영화적 거짓말, 둘 다를 통렬히 공박하는 것이어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즐거움을 안겨줬다. <세기말>에서 이런 유머와 재치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어쨌건 송능한 감독은 주류 코미디 전통을 전복시킨 첫 주인공이 됐다.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은 외딴 산장의 연쇄살인이라는 음산한 분위기에 엉뚱한 상황과 인물을 충돌시켜 비현실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현실풍자라는, 한국영화에서 희귀한 장르 전략을 보여줬다. <기막힌 사내들>은 이미 연극무대에서 덕배, 달수, 화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완성시킨 장진 감독의 재기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영화다. <간첩 리철진>에 이르러 그는 영화에 자기 세계를 고스란히 담는 호흡법을 체득한다. 서민적이면서 살가운 정감이 넘치는 장진의 코미디는 스크린에 펼쳐지는 한순간일지라도 세상과 화해하는 꿈을 실현시킨다.
사람 사이, 오해는 눈덩이처럼 구른다
김지운은 이들 세 작가 중에 가장 냉소적이고 개인주의적이다. 그의 영화에선 한번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심이 통하는 순간이 없다. <반칙왕>에서 주인공 대호가 장 관장의 딸 민영이에게 “레슬링 왜 하세요”라고 물을 때 답하는 장면을 보자. 민영의 무릎에 놓였던 꽃이 바람에 날라가는 통에 대호가 털어놓는 속마음은 온전한 독백이 되고 만다. 체질적으로 멜로적 분위기를 참지 못하는 사람인냥 결정적인 순간 그는 딴청을 부린다. <조용한 가족>에서도 욕정이 흘러내리는 섹스가 있을 뿐 외로움을 감싸안을 사랑은 없다. 장진의 영화와 대별되는 차이가 여기 있다. 장진은 어수룩한 사람들이 마음을 열 때 언제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덕배와 달수가 나누는 풋풋한 우정은 물론이며 화이는 간첩 리철진에게 자기 운명을 빌려준다. 김지운은 그러지 않는다. 대호를 둘러싼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동료는 “나 레슬러야”라는 대호의 말에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래, 가라, 가”라고 반응하며, 아버지에게 “제가 그동안 철이 없었습니다”라며 진지하게 사죄하는 대호의 무릎꿇은 자세에서 눈높이를 조금만 올리면 아들은 파리채로 맞아 마땅한 철없는 망나니로 돌변한다. 남녀 사이에 이뤄지는 낯간지러운 사랑의 속삭임이야 그렇다쳐도 아버지와 아들, 직장동료나 레슬링 파트너까지도 대호와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이다. <조용한 가족>에 나온 6명의 가족구성원도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들은 정감없는 개인주의자들로 등장한다. 오해가 사건을 눈덩이처럼 굴리는 과정에서 산장의 가족이 화해하는 순간은 영영 찾아오지 않는다.
놀라운 건 세상을 보는 김지운의 이런 냉정한 시각 자체가 코미디 작법이라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진심이 듣는 이에게 농담 밖에 안 되는 현실에서 김지운은 배꼽을 부여잡을 웃음을 만든다. <조용한 가족>에서 가장 웃기는 장면 중 하나. 맥주를 배달하려고 방문을 연 영민(송강호)에게 산장을 찾은 첫 손님이 말한다. “학생, 학생은 고독이 뭔지 아나?”, “그래서 뭐라고 그랬는데?”, “나, 학생 아니라 그랬지 뭐.” 한바탕 말장난에 불과한 것 같지만 여기엔 김지운식 코미디의 정수가 숨어 있다. 곧 자살할 이 손님이 힘주어 말한 것은 “고독”이지만 영문 모르는 영민에겐 “학생”이라는 말만 거슬리게 들린다. 그때 누가 따뜻한 말 한마디만 건넸어도 자살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고 산장이 연쇄살인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겠지만 김지운은 개인에게 절실한 무엇이 타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그 엇갈리는 마음과 언어에서 웃음을 만드는 화학공식을 발견한다. 더 놀라운 건 그게 웃기데만 쓰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대호의 사랑고백에 “술 드셨어요”라는 반응을 보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대호의 모습을 보며 질끔 눈물이 나지 않는다면 자신의 체온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결코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상황이야말로 산장의 가족이 겪는 불운이나 은행 부지점장이 거는 헤드록보다 더 서글픈 현실이다.
절망이 악마편에 서지 않도록
충무로에 입문하기 전 연극 연출을 한 전력 때문에 김지운은 종종 연극적이라는 평판을 듣는다. 대사가 큰 몫을 차지하는 수다스런 코미디를 만든다는 점에선 일면 타당해보인다. 하지만 영화적 표현력이 뒤떨어진다는 의미라면 대단히 잘못된 판단이다. 김지운의 코미디는 카메라와 편집을 적극 활용하는 시각적 개그의 비중이 대단히 크다. 예를 들어보자. 부지점장이 대호에게 헤드록을 거는 장면은 전형적인 공포 영화 편집리듬이다. 점증하던 공포감에 “왜 늦었어. 또 늦을래”라는 부지점장의 대사가 가세하면 상황은 폭소로 반전된다. 반면 회식장소를 엉망으로 만든 뒤 체육관을 찾아온 대호가 전봇대 뒤에 숨어 있다 민영과 눈이 마주치는 장면은 멜로 영화의 관습대로 진행된다. 마주 보는 시선과 클로즈업된 얼굴에서 사랑고백을 기대하는 순간 “백드롭 좀 받아주실래요. 백드롭”이라는 말로 뒤통수를 친다. 김지운은 패러디도 적극 활용한다. 대호의 아버지 역에 신구를 등장시킨 건 <8월의 크리스마스>의 구도를 뒤집은 것이고, 진도아리랑 벨소리로 시작해 “박사장님” “김전무님”으로 이어지는 핸드폰 에피소드는 송강호의 CF를 연상시킨다. 심지어 충무로 코미디의 뿌리인 악극의 잔재도 있다. 대호가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으로 노래부르는 꿈 장면은 사각의 링을 촌스러운 쇼무대로 둔갑시킨다. 삽으로 머리를 때리거나 포크가 두피 속으로 파고드는 잔혹한 장면에서도 익살을 부리는 김지운은 과장되고 촌티나고 충격적인 묘사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대중문화의 온갖 요소를 끌어들여 싸구려도 값져보이게 만드는 희한한 재주를 부리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가능케 하기 위해 그는 비현실적 공간을 만들어내곤 한다. <조용한 가족>의 산장이나 <반칙왕>의 레슬링체육관은 꿈결같은 이미지로 등장,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현실을 침해하지는 않을 것처럼 보인다.
권위와 질서에 대한 김지운식 비판은 세상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없이 끝맺음된다. “절망으로부터의 도피”가 ‘희망’을 의미하지는 않는 셈이다. 이런 암울한 전망에 대해 김지운 자신은 ‘소통이 되는 세상, 꿈이 이뤄지는 세상’을 “그저 동경한다”고 답한다. “영화란 봉인된 시간”이라는 타르코프스키의 말을 믿는 그는 솜사탕처럼 달콤하지만 쉽게 녹는 희망을 만드는 대신 절망이 악마의 편에 서지 않게 묶어놓는다. 분명 그건 일시적인 위안이며 대중의 변덕에 마음졸여야 하는 불안한 예술이지만 최악에 맞서는 방법 하나는 제대로 일러준다. 헤드록은 반드시 백드롭으로만 푸는 게 아니다.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는 반칙도 세상을 살아가는 소중한 지혜다. 김지운은 지금 우리 사회의 발바닥을 간지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