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담 광장, 감회가 새롭다"
<밀리언달러 호텔>에 베를린영화제의 초청장이 도착한 것은 지난 11월이었다. 독일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감독 빔 벤더스가 미국으로 건너가 할리우드의 큰손 멜 깁슨과 손을 잡았다는데, 도대체 어떤 물건이 나올지, 베를린에서 일찍부터 눈독을 들일 만도 했다. 게다가 영화음악은 물론 스토리 원안을 U2의 보노가 내놓았다고 하니, 50주년 행사용으로 이 이상의 화제작은 있을 수 없었다. 2월9일 개막식 본 상영에 앞서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에서 열린 <밀리언달러 호텔>의 첫 시사는, 과연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뤘지만, 빔 벤더스는 그 모든 기대와 관심에 일일이 부응하진 못했다. 도시인의 황량한 내면을 투사하는 솜씨는 녹슬지 않았지만, 수다와 유머가 늘어버린 대신 그만의 개성이 빛바랜 것이나, 할리우드에 다가서는 행보를 우려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한편 시사에 이어 진행된 기자회견은 “베를린영화제 50년 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부산스러운 기자회견”이라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겼다. 감독을 비롯, U2의 보노, 밀라 요보비치, 제레미 데이비스 등이 참석한 회견장은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찼고, 장내 정리에만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질문 세례는 감독 빔 벤더스가 아닌 보노에게로 쏟아져 두 사람 모두를 당황하게 했다. 밀라 요보비치는 “혹시 외계인 아니냐, 진실을 말해달라”는 황당한 질문까지 받았고, 어떤 독일 기자는 빔 벤더스가 영어로 대답하는 데 대해 노골적으로 반발하기도 했다.
-보노가 이 영화의 원안은 물론 시나리오 작업까지 참여했는데, 어떤 계기로 이 영화에 깊숙이 개입하게 됐는지.
=(보노) 나는 대담하되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다. 비상한 재주가 있는 나의 친구 빔 벤더스의 작품이고, 멜 깁슨, 밀라 요보비치나 제레미 데이비스처럼 놀라운 재능을 지닌 연기자들이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원안 제공이 인연이 됐지만, 시나리오나 음악 작업 역시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작품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은 것인가.
=(보노) 밀리언달러 호텔은 실제로 LA의 다운타운에 있다. 80년대 중반, 우리 그룹이 미국 순회공연을 할 때 들렀는데, 객실마다 각기 기막힌 사연이 있는 그런 곳이었다. 한번 들른 다음 잊혀지지 않아 뮤직비디오 작업 등을 위해 다시 들르기도 했다. 그 호텔 옥상에서 누군가 떨어져 내린다는 공상을 했는데, 그것이 스토리의 시작이 됐다. 무심코 이야기했는데, 빔 벤더스와 니콜라스 클라인이 반색을 했고, 그렇게 이야기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50주년을 맞은 베를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기분이 어떤가. 당신에게 베를린은 매우 특별한 공간인 것 같은데.
=(벤더스) 이 세상의 어떤 감독이라도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50주년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됐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기도 하지만, 포츠담 광장, 이곳은 내게 감회가 새롭다. 바로 이 건물 뒤편에 천사들이 살았고, 저 위편에는 포츠담 광장을 찾아 헤매던 노인이 있었다. <베를린 천사의 시>를 찍은 이곳에서 내 영화를 상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전작들과 달리 이미지보다는 내러티브를 강조한 느낌인데.
=(벤더스) 그렇다. 비주얼을 위해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영화에 동원한 이미지들도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
-영화음악은 어떻게 작업했나. 가사에서 많은 걸 암시하던데.
=(보노) 더블린에서 팀과 함께 작업했는데, 아주 재밌었다. 스크린에 영화를 틀어놓고 보면서, 직접 음악을 연주해 맞춰갔다. 미리 절반 정도 생각하고 진행했지만, 영화에 맞는 음악을 위해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했고, 영화 자체로 음악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노래말은 록밴드에 관한 소설을 쓰기도 한 작가 샐먼 루시디의 솜씨다. 빔이 특히 만족스러워했다.
-미국에서 미국 배우들과 작업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벤더스) 감독의 출신 배경과 아무런 관계 없는 ‘바깥’에서 ‘외지인’들을 고용하는 영화작업이 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알다시피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이런 선택을 한 건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 영화는 진정 아름답고 고귀한 인간성에, 나름대로 영위할 인생이 있었던 이른바 패잔병들, 버려지고 잊혀져가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귀하다는 이야기를 풀어가기엔 미국이란 배경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보노가 음악 파트너로 친숙하겠지만, 이번 작업은 그 이상이므로 의미가 달랐을 것 같다.
(벤더스) 내가 보노가 낳은 첫 아기의 아버지쯤 된다고 해두자. 니콜라스와 보노가 성심껏 아이를 낳아, 잘 키워보라고 내게 준 거다. 우리 셋은 매우 친밀하고 서로간의 공감대도 크다. 함께 창작하는 것은 정말이지 더없이 즐거운 작업이었다.
(보노) 빔 벤더스는 이야기가 끝나도 오래도록 맘을 울리는 이야기꾼이다. 그건 음악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감수성이 내게 어필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등에 브레이스를 한 FBI 요원으로 멜 깁슨을 캐스팅한 것은 매우 파격적이다.
=(벤더스) 완벽한 캐스팅이라고 생각한다. 첫 모습은 슈퍼맨의 캐리커처와 같지만, 오래지 않아 노틀담의 꼽추 같은 그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 그래도 관객은 여전히 그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건 전적으로 멜 깁슨의 연기력과 카리스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캐스팅이다. 주연 배우들은 물론 피터 스토메어, 글로리아 스튜어트 등 조연들이 훌륭했다. 그들의 보여준 열정과 앙상블에 박수를 보낸다.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개막작 <밀리언달러 호텔>
LA 다운타운의 허름한 호텔 옥상에서 누군가 떨어져 죽는다. 죽은 이가 언론 재벌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버려졌던 이 호텔은 별안간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FBI의 특별수사관(멜 깁슨)이 찾아와 타살 가능성을 짚어가며 호텔 식구 전원을 용의자로 몰아가는가 하면, 방송 카메라와 마이크는 이들에게서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서도, 심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톰(제레미 데이비스), 그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지만, 살아있는 송장 같은 삶을 사는 엘로이즈(밀라 요보비치), 자신이 비틀스의 5번째 멤버였다고 주장하는 음유시인 디키(피터 스토메어) 등이 꾸려왔던 그들만의 세상은 ‘그 사건’으로 인해 조금씩 허물어진다.
한 청년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는 스릴러 구조의 <밀리언달러 호텔>은 범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톰과 엘로이즈의, 그리고 그 친구들의 ‘백치 같은’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른 기준과 가치로 둥지를 틀고 사는 인간군상, 자의든 타의든 세상과 격리돼 살아가는 그들에게 지상 최후의 낙원이자 도피처였던 ‘밀리언달러 호텔’은 배경 이상의 의미다. 그 공간과 시간 속으로 빔 벤더스는 예전처럼 ‘여행’을 떠난다. 새벽빛으로 푸르스름한 호텔 옥상, 나른하고 애잔한 기타 선율과 목소리, 질주 그리고 추락. 몽환적이면서 강렬한 첫 시퀀스부터 무엇이 현실이고 환상인지 혼동시키며,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의문하게 만든다. 아마 세상이 미친 것인지, 그들이 미친 것인지, 묻고 싶었던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