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은 지금 공사중이다. 걸음을 떼기 무섭게 오렌지색 철구조물들과 계속 마주치는데, 영화제의 새로운 중심이 된 포츠담이 특히 그렇다. 드릴 굉음과 용접 불꽃이 반겨주는 포츠담 광장을 지나 마를렌 디트리히 광장쪽으로 걸어들어가야, 그제야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 여기부턴 문화의 거리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영화제 개막 며칠 전까지도 이곳 포츠담 일대에선 축제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행사장 주변에 ‘금곰’의 빨간 깃발이 내걸린 것은 개막 전야. 몇주일 전부터 포스터와 플래카드로 온 동네를 도배하거나, 노랫가락에 들썩거리는 잔치 분위기가 아니었다. 날씨 탓일까. 비바람이 몰아치던 2월9일 저녁, 베를린은 너무도 차분하고 덤덤하게 50주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앞으로 붉은 주단이 깔리고, 취재진과 시민들은 비를 맞고 추위에 떨어가며 한참 기다린 다음, 그 보람을 잠깐 맛봤다. 심사위원장 공리를 비롯, 안제이 바이다 월터 살레스 마리아 슈라이더 마리사 파라데스 등 심사위원단, 빔 벤더스 밀라 요보비치 제레미 데이비스 등 개막작 <밀리언달러 호텔>의 스탭들, 그리고 소피 마르소 등 축하객들을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서 만난 것이다. 초청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야외 멀티비전이 개막식을 생중계하는 동안, 그 옆엔 소규모 데모단이 떴다. 영화제 참석차 날아온 오스트리아 영화인들이, 최근 연합한 정치권 우익세력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인종주의자에게 권력을 주는 것은 유럽 전역의 불행이라는 생각에, 군중이 운집한 기회를 틈타 목소리를 낸 것이었다. 매서운 바람 탓에, 데모단도 자진 해산하고, 구름떼처럼 모였던 사람들도 30분 남짓 진행된 개막식 중계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거의 다 흩어졌다.
올해 베를린은 ‘50주년’과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살림을 늘리고 이사까지 했다. 대형극장과 회견장을 갖춘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10개관짜리 멀티플렉스 시네맥스, 소니센터의 시네스타 등이 올해 처음 선보이는 상영장. 대부분 포츠담 일대에 모여 있어, 동선 짜기가 한결 쉬워졌다. 영화제 기간 동안 이 세 극장에서 소화하는 영화만도 240편, 700회가 넘는다. 그간 베를린영화제의 중심이던 초 팔라스트 등 베를린 서부지역은 어린이 가족영화 상영관 또는 재상영관으로 활용된다. 이제 ‘초 팔라스트 시대’가 가고 ‘포츠담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는 한 노인이 “도대체 포츠담 광장은 어디에 있는 거야. 물어볼 사람 하나 없다”며 스산한 들판을 하염없이 걷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 그 자리엔 거대한 유리의 성, 소니 센터가 들어서 있다. 14년 전 촬영지에서, 이번엔 신작을 공개하게 된 빔 벤더스가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라며 얼떨떨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는 독일중앙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은 성장이다. 장벽이 무너진 다음, 베를린은 새로운 외관을 갖춰가고 있다. 유럽 중심지로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인 성장’을 이뤄야 승산이 있다는 것. 같은 유럽에서 열리는 칸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를 앞질러 나가려는 나름의 노력이기도 하다. 베를린영화제 모리츠 드 하델른 집행위원장은 “전통을 존중하면서 미래를 견지하는 것, 젊고 유능한 영화인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것”이 새 천년 그의 과제라고 밝혔다. 올해 프로그램들을 살펴보면, 그 공언이 헛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유고의 루비치아 사마르지크, 일본의 오가타 아키라 등이 첫 작품으로 경쟁부문에 올랐고, 이 밖에 두세줄의 짧은 필모그래피를 지닌 젊은 감독들도 상당수 포진하고 있다. 빔 벤더스, 폴커 슐뢴도르프, 장이모 등 친숙한 이름들도 함께다. 미국 작품 편수가 많은 것은 올해 역시 마찬가지. <리플리> <매그놀리아> <애니 기븐 선데이> <허리케인> <맨 온 더 문> <비치> 등 미국영화들이 줄줄이 올라 있는 경쟁부문이 ‘오스카의 예고편’은 아닐지.
개막 이틀째, 대중적인 영화제를 지향하는 만큼 베를린 현지 관객의 참여도나 관람 수준도 높은 편이다. 경쟁부문에 오른 작품 대부분이 매우 높은 좌석 점유율을 자랑한다. 최고의 화제작은 개막작인 <밀리언달러 호텔>. 모두 4회 상영하는 <밀리언달러 호텔>은 발매 서너 시간 만에 전회 매진됐다. <비치>도 상영일 사흘 전에 전회 매진됐다. 이 밖에 <줄 앤 짐>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밤> 등이 개막일에 이미 마감되는 등 잔 모로 회고전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