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가네시로 가즈키 [1]
2005-07-27
글 : 김영희 (한겨레 기자)
<플라이, 대디, 플라이>의 원작자, 가네시로 가즈키의 작품세계

영화 <고(Go)>의 원작자로 널리 알려진 재일동포 3세 작가 가네시로 가즈키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플라이, 대디, 플라이>가 지난 7월9일 일본에서 개봉했다. 또 최근 <레볼루션 No.3> <플라이, 대디, 플라이>에 이은 ‘좀비스’ 삼부작 <스피드>를 출간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영화화된 그의 작품이 벌써 <Go> <꽃> <연애소설> 3편에 달한 데서 알 수 있듯 그의 작품은 언제나 ‘영상적’이란 말을 들어왔다. 작품마다 옛날 영화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 가네시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꿈꿔왔다고 한다. 영화 개봉을 핑계로 지난 7월1일 도쿄의 도에이 영화사에서 가네시로를 만났다. 영화와 문학, 정치가 비슷한 비율로 뒤섞인 인터뷰였지만 그의 희망대로 정치 이야기는 많이 자제한 결과다.


가네시로 가즈키(37)의 이야기는 <Go>에서 출발한다. 가네시로 자신이 가장 닮았다고 꼽는 주인공 스기하라는 총련계 민족학교를 다니다가, 아버지가 북한 국적을 버리고 한국 국적을 선택하면서 일본학교로 옮긴다. 민족학교에선 ‘민족반역자’라는 비난을, 일본학교에선 ‘자이니치’(일본에서 재일동포를 일컫는 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아버지가 전 복싱선수에, 영화처럼 ‘폭력적’인 것까지- 더 지저분한 얘기는 자제했다는 게 이 정도!- 그대로다. 가네시로의 아버지는 영화처럼 ‘하와이에 가고 싶어’ 국적을 바꾼 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의 골드코스트에 가고 싶었던” 게 계기였다지만. 물론 오랜 세월 북한 국적으로 살아온 윗세대라면 적잖은 이들이 갖고 있던 체제에 대한 회의감이 근본 이유였다. “국적을 바꾸면 뭔가 극적으로 바뀌거나 기분이라도 바뀌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바뀌지 않더라. 이 의문에 답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죽어라고 어려운 책들을 파봤다. 노자부터 쇼펜하워, 니체, 우익 책부터 좌익 책까지. 결국 철학책엔 답이 없었다. 근데 소설이건, 영화건 ‘이야기’를 읽거나 보면 달라지는 것 같았다.”

한때 인권변호사를 꿈꾸며 게이오대 법학부에 진학한 그는 금방 진로를 소설가로 바꿨다. 장편 <Go>(2000)는 123회 나오키상을 수상해 당시 그는 ‘최연소 수상자’가 되었고,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구보즈카 요스케 주연의 영화도 대성공을 거뒀다.

차별의 굴레를 영화와 소설로 벗어나다

단편집 <레볼루션 No.3>(2001)의 좀비스 멤버들은 구제불능의 ‘후진’ 일반 고교에 다니는 학생들이다. 이들의 목표는 이웃에 있는 명문 여고의 축제 입장권을 손에 넣어, 궁극적으론 “공부 잘하는 여자와 섹스를 해 우수한 유전자를 얻어 아이를 낳는 것”이다. 그게 그들의 세상을 바꾸는 레볼루션이자 가네시로가 고리타분한 사회에 대해 날리는 유쾌한 펀치다.

가네시로는 좀비스 멤버들에게 의식적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필리핀 어머니와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의 본명 아기날드는 필리핀의 항일운동 인물, 하야시는 오키나와의 옛 류큐 왕조의 정치인, 박순신은 이순신에서 따온 이름이다. 모두 항일운동이나 반일운동을 한 영웅이지만 나중에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이다(이순신도 투옥당한 적이 있기에). 특히 순신은 “괴로워하던 어린 시절 이런 친구가 있었음 좋겠다 생각했던” 그의 이상형이다.

소설과 영화는 ‘정의의 세계’와 ‘이야기’라는 점에서 가네시로에게 똑같은 의미다. 영화 <플라이, 대디, 플라이>를 내놓으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부조리하고 불공평한 싸움에 걸핏하면 휘말리던 어린 시절, 어두운 극장으로 들어가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스크린엔 세계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어 안심하곤 했다. 정의는 이기고, 부조리하며 불공평한 건 반드시 고쳐지고, 거기에 미인도 나오고! 거기서 얻은 용기를 갖고 극장에서 나와 일상의 세계에 부딪히곤 했다.”

가벼운 문체 속에서 삶과 죽음까지 이야기

<플라이, 대디, 플라이>

가네시로의 인물들이 정의가 무조건 이긴다고 순진하게 믿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배배 꼬여 있지도 않다. 그의 작품을 이런저런 해설을 달아가며 심각하게 보는 건 ‘오버’다. 깨지더라도 세상의 벽을 향해 발길질하는 모습은 정말 ‘폼난다’. 정의의 세계에서 한순간 신나게 지내면 그만이다. 그런데 여운은 길다. 앉은 자리에서 후루룩 읽히는 빠른 전개, 가벼운 문체 속에서 삶과 죽음까지 이야기한다. <레볼루션…>의 히로시나, <Go>의 정일, 그리고 단편집 <연애소설>(2003) 중 <꽃>의 노변호사 도리고에 같은 인물들은 접한 이들에겐 좀체 잊혀지지 않는다.

<플라이, 대디, 플라이>(2003)에 이르면 가네시로는 이 세상 지친 모든 아버지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보낸다. 일본인 중년 샐러리맨 스즈키는 사랑하는 딸 앞에 당당한 아버지로 서기 위해 딸을 폭행한 고교 복싱 챔피언과 맞서기로 하고, 여름 내내 휴가를 얻어 박순신에게 싸우는 방법을 배운다.

사실 “아마 다른 사람들이라면 민망해서 못했을 것”이라는 그의 말마따나 가네시로의 작품 가운데 <플라이, 대디, 플라이>는 가장 단순하고 너무나 스트레이트하다. 솔직함과 용기를 미덕이 아니라 어릴 때의 치기로 치부해버리는 세상에선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 용기야말로 유치한 것이 아니라 “일상에 숨어 있는 기적”임을 보여주는 게 가네시로 세계다. 순신은 스즈키에게 말한다. “내가 가르치는 건 이기는 게 아니라 싸우는 방법이야.” 이기든, 지든, 싸울 준비를 하는 것. 그게 가네시로가 모순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영화 끝에서 스즈키에게 순신은 외친다. “아저씨, 날아요, 날아.” 그가 어린 시절 소설과 영화에서 용기를 얻었듯, 지금 우리가 그렇다.

<플라이, 대디, 플라이>는 어떤 영화?

이 세상 모든 지친 아버지들에게 보내는 응원가

피곤한 회사의 일상을 마치고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실은 스즈키, 그와 같은 이들에겐 전차 밖 화려한 불꽃놀이도 흑백의 세상이다. 그래도 전차를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도착한 교외에는 그림 같은 집과 아내, 딸이 있어 행복하다. 사랑하는 딸이 고교 복싱 챔피언이자 잘 나가는 국회의원의 아들인 이시하라에게 폭행당해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는.

영화 <플라이, 대디, 플라이>에서 순신이 등장하는 순간, 비로소 화면은 컬러가 된다. 자, 이제부터 신나는 여름방학이 시작하는 거야, 라고 말을 걸듯이. 그러고보면 <플라이, 대디, 플라이>는 한바탕 여름방학의 즐거운 모험 같은 영화다.

영화 속 순신은 강한 모습 뒤의 쓸쓸한 얼굴까지 드러낸다. 열쇠를 열고 집에 들어가면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너라”를 혼자 되뇌고, 높다란 나무 위에서 스즈키에게 어렸을 때의 끔찍한 기억을 털어놓는다. 영화는 이렇듯 한껏 입체화된 캐릭터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준다. 스즈키가 퇴근할 때 항상 버스를 타던 회사원들도 하나하나 인물들이 묘사되며 영화에 온기와 유머를 더욱 불어넣었다. 수다스런 대사나 화려한 영상 대신 툭 던지는 대사 한마디와 미니멀리즘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영상은 효과적이다. 순신이 매의 춤을 출 때 부는 잔잔한 바람부터 대결장면의 서부극 같은 거친 바람까지, 다양한 바람소리의 사용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끌어가기도 했다.

순신 역을 맡은 오카다 준이치는 10년 전 14살의 나이로 아이돌 그룹 V6의 멤버로 데뷔했지만, 최근 1∼2년간 일본 영화계의 대표적인 차세대 주역으로 급부상한 배우. 그의 얼굴엔 소년과 어른이 공존한다. 쓰쓰미 신이치는 한국엔 <착신아리>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연극배우로 출발해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폭넓은 역할을 소화해내는 실력파다. 소설의 서두에 가네시로가 인용했던 노래 문구 <날개를 펴서 빛이 비치는 곳으로>의 주인공 미스터 칠드런이 영화 주제가를 불렀다.

사진제공 ⓒ F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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