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 7.24
문제의 사랑가 장면. “이리 오너라. 업고 노자”로 시작되는 이 대목은 아마도 <춘향뎐>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장면의 하나일 것이다. “5, 6일이 지나니 두 남녀는 부끄럼을 잊고….” 서로의 몸을 알게 된 어린 남녀는 이제 수줍음을 버리고 서로 수작하다가 병풍 뒤로 들어가 옷을 벗어던지고 몸을 맞대야 한다. 문제는 그 전과정에 소리가 흐르고 모든 동작이 한컷에 담겨야 한다는 것. 3분 가까이 한 호흡으로 소리의 리듬을 타는 고도의 사랑놀이. 수줍은 첫날밤을 찍은 22일분은 무난하게 넘어갔지만, 이 장면에선 조승우가 눈에 띠게 굳어 있다. 경험이 없는 16살 소년이 하긴 어떻게 능청맞게 여자의 몸을 희롱할 수 있으랴. 조승우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 리듬감도 절실함도 없어보였다. 처음엔 조용히 타이르기만 하던 임 감독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속절없이 이틀이 흘러가고 전 스탭은 초긴장상태. 임 감독이 폭발했다. “니네 어리광을 언제까지 받아줘야 하냐. 니들 때문에 모든 스탭들이 이틀 동안 한 장면도 못 찍고 있잖아. 슬쩍 만지나 세게 만지나 그게 무슨 차이야.” 임 감독이 그렇게 화를 낸 건 처음이었으니, 모두들 땅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조승우는 나중에 “그땐 정말 맞는 줄 알았다”고 했다. 이상한 건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고 나니 춘향과 몽룡은 몸이 풀렸다. 그리고 세 테이크만에 오케이가 났다. 모두들 박수.
1999. 8.1
사랑가는 그래도 어렵다. 며칠 만에 만난 청춘남녀는 며칠 전보다 더욱 농염하게 뒹굴어야 했으나 어쩐지 어설펐다. 설상가상으로 의상까지 실수가 있어 남녀의 하의 색이 똑같았다. 임 감독은 갑자기 뒤로 사라졌다. 한달 휴식 뒤로는 방향이 잡히니까 훨씬 낫긴 한데, 임 감독의 긴장은 날로 더해간다. 편집으로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한 테이크 안에서 리듬을 만들어내는 건 촬영할 때 대단한 긴장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하나라도 삐끗하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잠시 뒤에 다시 나타난 임 감독은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말했다. “정기사, 담배 하나 줘봐.” <장군의 아들> 때 끊었던 담배를 10년 만에 다시 피웠다. 임 감독의 흡연 재개는 뉴스가 돼 충무로에 알려졌다. “내가 과연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마지막 순간까지 임 감독은 마음 깊이 꿈틀거리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1999. 10.15
이별가 장면. 몽룡은 작별을 고하고 나귀에 올라타는데, 속울음을 삼키던 춘향은 더 참지 못하고 “여보 도련님, 날 데려가오”라고 부르짖으며, 나귀에 매달린다. 삼돌이는 그동안 잘해줬다. 하도 오랫동안 현장에 있다보니 이놈이 서 있어야 하는 장면에서도 레디고만 떨어지면 움직인다. 그래서 임 감독은 삼돌이 때문에 손짓으로 레디고를 알려야 했다. 줄을 잡고 늘어져야 하는 효정이 자꾸 손을 놓은 바람에 임 감독이 다시 화를 냈다. “붙잡지 못하고 있으면 끌려라도 가야지.” 용기를 내 나귀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효정이 갑자기 삼돌이 뒷발에 밟혔다. 임 감독과 스탭들은 식은땀이 흘렀다. 효정은 병원으로 이송됐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라서 하루 입원하고 다시 찍을 수 있었지만, 모두 아찔한 순간이었다. 삼돌이의 비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숙소 앞에 매둔 삼돌이가 사라졌다. 영화 찍는 게 지겨워선지 달아나버린 것이다. 지금 삼돌이가 사라지면 끝이다. 새 나귀를 찾을 시간도 길들일 시간도 없다. 스탭 7명이 나서 한 시간을 헤맨 끝에 옆마을의 어떤 아저씨한테 끌려간 삼돌이를 천행으로 발견했다. 삼돌이는 그날 뒤론 정말 착한 출연자로 남아주었다. 소리가 몸에 익은 스탭들은 이젠 일사천리다. 대사와 소리 이어붙이기가 가장 난해했다는 십장가(춘향이 곤장맞는 대목) 장면도 임 감독의 호통과 효정의 눈물이 이어지면서 성공적으로 끝났다. 임 감독은 사람 달래는 데도 탁월하다. “나, 밉지?”
1999. 11.1
몽룡이 거지 차림으로 월매의 집을 찾아가는 밤 장면. 이동 카메라가 몽룡의 걸음을 뒤쫓는다. 임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이 이동차 담당하는 조수 최운진에게 “이건 자네 장면”이라며 일임했다. 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연인의 집. 신분을 감추고 방문할 수밖에 없는 몽룡의 착잡한 심경을 표현해야 하는 간단지 않은 장면. 3번 정도의 테이크만에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냈는데, 최운진은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고집 피워 결국 다시 찍었다. 이젠 모든 스탭들이 판소리의 리듬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끝이 다가오고 있다.
몽룡이 과거 보는 장면을 고증하러온 성균관 윤여빈 의례부장은 “이 영화는 임권택본 춘향전”이라고 말했다. 춘향전은 양반의 멋과 교양, 상민의 독설과 해학이 교합하면서 끊임없이 변해왔고, 새 천년 벽두에 임권택이라는 노감독의 손에 의해 또 하나의 이본(異本)이 탄생한 것이다. 이 신판 춘향전은 다른 판본들과는 달리, 세계인의 추임새를 만나게 된다. <춘향뎐>은 이미 전례없는 새로운 소리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제작기는 연출부 강경환씨의 구술을 토대로, 임권택 감독의 회고와 기타 자료를 보며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