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설 연휴 비디오 가이드 [1] - <심플 플랜> 外
2000-02-01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씨네21> 추천 '조용한' 걸작 비디오 20편

비디오숍에서 숨은 비디오를 찾는 즐거움이야말로 영화광들의 특권이다. 떠들썩하게 개봉하지 않고 비디오숍으로 직행하는 영화들 중에 정말 보석 같은 영화가 있다. 극장가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될수록 흥행성이 없다는 이유로 간판도 올리지 못하는 영화는 더 많아지고 규모가 작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 영화가 처한 입지는 좁아진다. 숨은 비디오 찾기는 그런 작가들에 대한 지지와 응원이며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재능을 격려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영화광들은 극장에서 채우지 못한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다. 비디오를 보기 좋은 시간, 20편의 조용한 걸작들을 소개한다.

숨은 비디오 걸작 1 - <심플 플랜>과 샘 레이미 감독

핏빛 아메리칸 드림 위에 내리는 눈

<뉴욕타임즈>는 98년 말 미국영화의 큰 수확 두 가지로 폴 슈레이더의 <어플릭션>과 샘 레이미의 <심플 플랜>을 꼽았고, <타임>은 <심플 플랜>을 99년 10대 영화에 끼워넣으며 샘 레이미의 귀환을 환영했다. 저예산 공포 영화 <이블데드>로 80년대 주목받는 테크니션이던 샘 레이미는 <퀵 앤 데드>의 실패 이후 한동안 잊혀진 이름이었다. 그러나 <심플 플랜>에서 그는 80년대 자신을 떠받들던 영화광의 열광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시킨다.

<심플 플랜>에 어떤 부제가 붙는다면 ‘가방 속에 든 아메리칸 드림’이 적당할 것이다. 미네소타의 눈덮인 작은 마을, 세 남자가 우연히 숲에 추락한 비행기를 발견한다. 조종사는 절명한지 오래고 비행기에는 440만달러가 든 돈가방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자, 이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 대니 보일의 <쉘로우 그레이브>가 연상되는 설정으로 막을 여는 <심플 플랜>은 처음부터 시체를 토막낼 만큼 과감하거나 엽기적이진 않다. 대신 소심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건 그저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일일 뿐이야. 남의 돈을 훔치는 게 아니라구.” 어엿한 직장과 출산을 앞둔 아내가 있는 남자 행크(빌 팩스톤)는 정말 단순한 계획(심플 플랜)을 제안한다. ‘비행기가 발견되고 누군가 돈을 훔쳤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을 때까지 일단 기다리고 안전한 게 확인되면 그때 셋이 돈을 나누자’는 것. 나머지 둘은 동의하고 행크에게 돈을 맡긴다. 물론 문제는 그 다음이다. 샘 레이미는 완벽해보이던 ‘심플 플랜’이 서서히 금이 가고 조금씩 이가 빠져서 급기야 작은 구멍이 댐을 붕괴시키듯 사람들을 망가뜨리는 과정을 그린다. 사소한 이기심과 작은 우연, 지레 짐작과 불신,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매함과 서로 다른 가정환경이 빚어낸 오해가 겹치면서 사건은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커져만 간다.

사실 미미한 시작이 꼬이고 뒤틀려 감당못할 결과를 낳는 이야기 구조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다. <배리 배드 씽>이나 <송어> 같은 영화도 비슷한 틀로 게걸스럽게 탐욕적인 인간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샘 레이미는 <배리 배드 씽>처럼 장난스럽거나 <송어>처럼 위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심플 플랜>의 등장인물들은 순박하면서도 이기적인 두 가지 얼굴을 수시로 바꾸는데다 끊임없이 내면의 도덕률과 씨름한다. 주인공 행크와 동생 제이콥(빌리 밥 손튼)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어딘가 좀 모자란 제이콥이 산통을 깨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노라면 모범적인 소시민 행크의 주도면밀함이 다행스럽지만, 다음 순간 행크가 보여주는 영악함이야말로 악마가 비집고 나오는 출구가 된다. 상황이 악화될수록 바보 같은 제이콥의 죄책감은 커지고, 도덕과 합리성의 조화를 추구하던 행크는 더 대담해진다. 행크가 빚만 물려준 무능한 아버지를 욕할 때 제이콥은 “아버지가 진 빚은 형 대학보내는 등록금이었다”고 상기시키고, 행크가 완전범죄가 성공했다고 안도할 때 제이콥은 “형은 죄책감이 들지 않냐”고 반문한다. 중산층 윤리의식이 뿌리내린 허약한 지반이 행크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에서 발가벗겨진다.

<심플 플랜>은 땅과 하늘이 구분되지 않는 은회색 풍경에 탐욕스런 인간들을 늘어놓은 코엔 형제의 <파고>를 연상시킨다. 실제 샘 레이미의 두 번째 영화 <크라임 웨이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오랜 친구로 지낸 코엔 형제는 눈 속에서 찍은 <파고>의 경험을 되살려 <심플 플랜> 촬영에 상당한 조언을 했다. <심플 플랜>에서 눈은 어제 일어난 사건의 흔적과 범죄의 핏자국을 덮는다. 그러나 아무리 눈이 쌓여도 양심을 찔러서 피를 낸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돈가방에 든 아메리칸 드림만 흔적없이 파묻어버린다.

<48시간의 킬링게임>

TV드라마 연출을 하다 할리우드로 건너온 존 허츠필드의 이 재기발랄한 데뷔작은 유희정신으로 똘똘 뭉친 선댄스 키드의 영화를 연상시킨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 남편을 청부살인하는 여자, 여자의 정부와 그 남자의 애인, 재수없이 사건에 휘말린 한물간 킬러, 그의 인질이 되는 신경쇠약 직전의 사람들로 이뤄지는 소동극. 겉보기에 무관해보이는 등장인물들이 겪는 사건을 한 조각씩 보여주며 호기심을 자극하던 영화는 마지막 순간 모두를 한자리에 불러 모아 꽤 영리한 시나리오에 기초했음을 입증한다. 성인 취향 스릴러답게 야하고 자극적인 묘사도 많은데 특히 <데블스 애드버킷>에 나왔던 샤를리즈 데론이 눈길을 끈다. 감독 폴 마주르스키가 한때 에미상까지 받았으나 이제는 몰락해 자살을 꿈꾸는 영화감독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1000에이커>

여성들의 삶과 사랑을 퀼트에 수를 놓듯 촘촘하게 화면에 직조해넣은 <아메리칸 퀼트>의 뒤를 이은 조슬린 무어하우스의 세 번째 영화. 아이오와 농촌을 무대로 한 <리어왕>에 가까운 이야기로, 독특하게 원작에서 불효하고 악한 두 언니들의 시점을 빌어왔다. 노년의 농부 래리는 딸들에게 땅을 분배하나 막내가 선뜻 응하지 않자 노해 두 언니 지니와 로즈에게만 나눠준다. 두 자매는 절대 복종만을 강요하는 아버지를 모시며 함께 땅을 가꿔왔음에도, 도시로 나간 막내와 마을사람들에게 결국 아버지의 땅을 뺏은 것이라며 미움을 산다. 게다가 재산과 함께 절대권위를 잃은 아버지는 딸들에게 구박받았다며 땅 양도 취하 소송을 제기한다. 근친상간에까지 이르던 폭압적인 권위에 시달린 두 자매를 통해 가부장적 환경 속의 여성들의 삶을 그린 정통드라마.

<림보>

<론스타> 이후 명실상부한 존 카사베츠의 대를 잇는 인디 영화의 대부로 평가받는 존 세일즈의 99년작. ‘림보’란 천국과 지옥 사이 어딘가를 뜻하는 말로, 등장인물이 머물게 되는 무인도를 가리키기도 하고,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사람들의 심경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고루 맛본 중년의 이혼 남녀가 여자의 딸과 함께 무인도에 갇힌 뒤 그곳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는 이야기. 풍요로운 미국의 그늘에 감춰진 사회문제를 목소리 높이지 않는 드라마로 엮어내는 게 장기인 존 세일즈가 <림보>에서 그리는 것은 가족이 되는 어려움이다. 황량한 마음에 상대를 그리워하는 작은 감정의 싹이 돋아 꽃을 피우는 것도 힘들지만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는 게 상대에 대한 사랑만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무인도라는 극한 상황에서 그들은 남편과 아내, 어머니와 딸이라는 관계를 다시 돌아보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법을 배워간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