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설 연휴 비디오 가이드 [4] - <어머니와 아들> 外
2000-02-01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숨은 비디오 걸작 5 - 알렉산드르 소쿠로프의 <어머니와 아들>

좁은 문을 통과한 현자

<어머니와 아들>은 불가사의한 영화다. 속세에 더럽혀진 사람이 만들 수 없는, 꿈결같은 풍경화로 이어지는 이 영화는 관객을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어플릭션>의 감독이자 <초월적 스타일: 오즈, 브레송, 드레이어>라는 책을 낸 비평가 폴 슈레이더는 초월적 스타일의 계승자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대신 알렉산드르 소쿠로프를 꼽았는데 <어머니와 아들>을 보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폴 슈레이더는 <필름 코멘트>에 실린 소쿠로프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소쿠로프의 영화는 영적 영화의 새로운 형태를 규정했다. 그는 시각 미학, 명상, 러시아 신비주의 등 외부의 전통을 작가적 방법, 환경과 행동의 불일치, 결정적 순간, 균형감각 같은 초월적 스타일의 요소들과 결합시켰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아들>은 정말 어머니와 아들 두 사람만 나오는 영화다. 아들은 죽어가는 어머니를 품에 안고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는다. 아들은 산책을 하고 싶다는 어머니를 안고 밖에 나갔다 돌아온 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숲 속에서 혼자 운다. 어머니는 혼자 남을 아들을 염려하고, 아들은 “그곳에서 만날 거”라며 어머니를 위로한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에 나비 한 마리를 남기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다. 줄거리에서 드러나듯 소쿠로프는 정말 단순한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던 두 사람이 헤어지는 순간을 성화처럼 그리면서 그는 어떤 드라마도 만들지 않고 하등 전후 맥락을 설명하지 않는다. 채 1초로 걸리지 않는, ‘억’하는 신음소리로만 표현되는 이별의 찰나를 맞기까지 관객은 영겁의 세계에 들어갔다 나온다.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는 아주 느리게 간헐적으로 이어지며 카메라는 산과 구름과 들과 나무와 풀과 기차와 연기를 오랫동안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그 지루하고 심심한 순간에 기적같은 일이 벌어진다. 풍경이 말을 하고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작아진 인물만큼 줄어들어야 할, 바람과 나뭇잎과 풀이 내는 자연의 소리가 더 크고 날카로워지면서 꺼져가는 생명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아들의 어깨를 휘감는다. 그것은 마치 육신을 벗어난 어머니의 영혼이 초록빛 대지와 황톳길과 아름드리 나무에 깃들어 아들을 품에 안은 것처럼 보인다. 반면 어른이 된 아들은 늙고 병들어 작아 진 어머니를 병약한 자식 돌보듯 무릎 위에 눕힌다.

이런 역전된 관계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우지만 죽음의 그늘에 깃든 슬픔마저 휘발시키지는 않는다. 물기에 젖은 듯 프레임 경계선이 흐릿한 화면은 <어머니와 아들>을 비극의 테두리에 머물도록 한다. 이런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그는 카메라 렌즈 앞에 각도를 달리한 색칠한 거울을 갖다댔다. 화면 가장자리가 흐리게 뭉개지는 몽환적 공간은 이같은 촬영술로 ‘창조’된 것이다. 화면에 사람의 혼을 머물게 하는 현자 소쿠로프는 스크린을 화폭처럼 사용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런 유의 영화로는 타르코프스키가 가장 유명하지만 소쿠로프는 타르코프스키처럼 커다란 주제에 매달리진 않는다. 도덕적, 종교적 구원을 향한 도스토예프스키적 고뇌와 작고 일상적인 정서에 주목하는 체홉의 세계가 드러내는 차이처럼, 소쿠로프는 영화를 어떤 보편적 감정의 결정체로 직조해낸다. 그래서 그가 그리는 마음의 풍경엔 <향수>나 <희생>처럼 자기 육신을 불태우는 격정의 회오리가 없다. 마치 자기 내면으로 향하는 맑은 거울이 되기를 의도한 것처럼 <어머니와 아들>은 그냥 조용히 그자리에 한참 멈춰 있다. 움직임이 없는 세상에서 소쿠로프는 영원으로 통하는 문을 발견한다.

팀 로스의 비열한 거리

<팀 로스의 비열한 거리>는 마틴 스콜세지가 이탈리아 이민자의 거리에서 그렸던 이야기를 러시아 이민자의 집단 거주지인 브루클린 근처 브라이튼 비치에서 펼쳐 보인다. 전문킬러가 되어 돌아온 형을 신문가판대에서 일하는 어린 동생은 믿고 따른다. 죽어가는 어머니와 혁대를 풀어 때리는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가정은 제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킬러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게 대안이 될 리는 없다. 조직의 보복이 시작되고 형을 구하려던 동생은 사소한 오해로 인해 총을 맞고 쓰러진다. 영화는 마지막 순간 동생을 잃은 형의 회상 장면을 보여준다. 형과 동생이 어머니의 양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있는 그 순간은 안식처를 잃은 자들이 꿈에서나 그려보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다.

버스를 타라

영화로 흑인 인권운동을 계속하는 스파이크 리는 백인 권력에 대한 고발에서 차츰 흑인 내부의 문제로 관심의 영역을 확장해간다. <버스를 타라>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도 백인 위주의 미국사회보다 흑인들 스스로를 병들게 하는 편견과 인습의 장벽이다. 95년 워싱턴 D.C에서는 흑인 인권운동의 일환으로 100만인 행진대회가 열렸다. <버스를 타라>는 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워싱턴 D.C를 향하는 20명의 흑인들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작품. 20명의 흑인 중엔 동성애자도 있고 경찰도 있고 살인자도 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것 같던 그들은 버스 안에서 서로 미워하고 혐오하고 멸시하는 시선을 교환한다. <똑바로 살아라>와 <정글피버>에서 “깨어나(Wake Up!)”라고 선동했던 스파이크 리의 새로운 구호 “버스를 타라!”는 내부의 적을 향한 외침이다.

그로스 포인트 블랭크

마틴 블랭크는 단골 고객까지 제법 확보한 중견 청부 살인업자. 과로한 ‘전문직 종사자’인 그는 정신과를 찾아 “며칠만 아무도 죽이지 말아봐요. 기분이 어떻게 되나 한번 보라구요.” 따위의 충고를 듣지만 자신의 무의식을 둘러싼 정서적 진공 상태를 깨지 못한다. 디트로이트 출장 건이 생긴 차에 고교 졸업 10주년 동창회 초대장을 받은 마틴은 자신의 뿌리를 더듬기로 결심한다. 졸업 무도회에서 그가 바람맞힌 여자친구 데비와 재회한 마틴은 소생하는 감정을 느끼지만 동창회로 찾아온 라이벌 킬러의 자객 덕분에 한판 총격전을 벌인다. 건들대는 리듬과 블랙 유머를 겸한 독특한 범죄 영화 <마이애미 블루스>를 만든 조지 아미티지는 이 영화에서도 코미디와 액션의 세련되고 경쾌한 이중주를 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동창회 영화답게 80년대 생활양식에 대한 조크들도 풍성하다. <애널라이즈 디스>의 ‘정신과 치료를 받는 마피아 두목’ 컨셉은 <그로스 포인트 블랭크>에 빚진 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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