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영애의 재발견 [1]
2005-08-09
글 : 이종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13년 연기생활, <친절한 금자씨>로 다시 태어난 배우 이영애

<친절한 금자씨>에서 13년간 갇힌 금자씨 이영애는, 스스로 후광을 발하며 한밤중 어두운 교도소를 은은하게 빛낸다. 그 빛은 옹색한 감방 창살을 넘어서 교도소 밖까지 미친다. 중세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 그림을 패러디한 이 장면은, 여신 같은 이미지로 지상에 현현한 CF모델로서의 이영애를 패러디하는 듯하다. 그러나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CF모델로서의 이영애가 아니라 데뷔한 지 13년 된, 그리고 재능이 흘러넘치는 배우 이영애의 후광이다. 이영애는 대중의 선입견에 갇혀 있지만, 배우로서의 연기력과 잠재력은 관객의 편견을 넘어서 비추고 있다는 것이 이 장면의 또 다른 메시지가 아닐까.

여신처럼 보이는 우아한 자태와 산소만 먹고 사는 듯한 살결과 그리고 길게 늘어뜨린 옷자락 때문에 종종 배우 이영애가 보이지 않거나 잊혀질 때가 있다. 노희경의 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의 작부 애숙이나, 드라마 <대장금>에서의 장금, 또는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에서 보여준 의외성을 이영애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한번 더, 게다가 극적으로 다시 보여준다.

그 의외성이라는 것은 아이러니에서 나온다. 그것은 <봄날은 간다>에서 고봉처럼 쌓인 밥을 앞에 두고 밥을 덜어주려는 유지태의 수저를 자신의 수저로 가로막는 순발력이며, <대장금>에서 수두에 걸렸다고 속이고서 제주도 감옥을 빠져나올 때 싱긋 짓는 눈웃음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영애는 임신을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문제 고등학생이 되어 백 선생에게 전화를 건다. 왼쪽 발등으로 오른쪽 종아리를 문지르며 수화기를 붙잡고 난감함과 수줍음의 목소리를 동시에 전하던 그가 10여년 뒤 바바리 코트 자락을 휘두르며 단호하게 권총을 휘두를 때 그것은 매우 놀라우면서도 신선한 충격을 준다. 아름다움 뒤에 숨은 복합적인 배우로서의 자질을 박찬욱 감독은 자극하고 일깨운다.

<인샬라>나 <공동경비구역 JSA>나 <선물>에서는 이영애의 후광이 미미했다고 할 수도 있다. 지적이며 아름답고 우아한 배우에게서 지성과 고아함을 이끌어내는 데 그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봄날은 간다>나 드라마 <대장금>은 천상의 여신 뒤에 숨은 인간적인 숨결과 고통과 내면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호기심을 건드리고 나아가 감정을 흔든다. 조금 지나치게 말하는 게 허용된다면, 이영애는 자신의 천상에서 온 듯한 이미지를 세속의 환란 한가운데로 관통시키면서 배우로서 더 깊고 견고한 아름다움을 얻어낸다. 물론 이런 아이러니를 완성하는 것은 배우 자신의 고결한 이미지 말고도 배우 자신의 연기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 그리고 최상의 조력자인 감독의 도움이 동반되어야 한다.

허진호나 박찬욱 같은 당대의 감독들이 이영애를 선택하는 까닭은 바로 이런 이영애의 이미지가 갖는 이중성과 모호함, 그리고 그를 통해 대중을 객석으로 끌고 나올 수 있는 저력 때문이 아닐까. 허진호는 이영애의 고결한 이미지 뒤에 숨어 있는 배우 이영애의 표현력을 발굴했다. 이기심과 머뭇거림과 갈등을 자연스러운 연기로 이끌어내면서 이영애는 사랑의 낯선 그리고 익숙한 국면을 개성적으로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박찬욱은 한발 더 깊숙이 들어가 이영애의 우물 속에 두레박을 내린다. 배우 내부에 있는 모호함과 복합성을 건져올리는 <친절한 금자씨>는 욕설을 내뱉으면 내뱉을수록, 복수가 잔인하면 잔인해질수록, 속죄를 하면 할수록 더 아름다워지고 우아해지는 역설을 실험한다. 햄릿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복수의 지연(햄릿은 주저하느라, 금자씨는 더 아름답게 하느라), 복수를 미학화하려는 시도를 이영애 같은 배우 말고 달리 누구에게 부탁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박찬욱 감독은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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