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시나리오 쓰기 10계명 [1] - 작가들이 뽑은 베스트 시나리오
2005-08-16
글 : 이영진
글 : 문석
일러스트레이션 : 김동규
충무로 시나리오 작가 11인이 말하는 시나리오 초보자를 위한 10계명

당신이 온 세상을 즐겁게 해줄 이야기 보따리를 갖고 있다 해도, 모든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해도, 커피보다 진하고 설탕보다 순수한 삶의 진실을 간직하고 있다 해도, 결국 시나리오의 형태로 제작자나 감독의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와 재능과 철학은 영화로서의 생명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한 작가는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조물주가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창작의 본질이 다 그러할 터지만, 현대에서 가장 영향력 강한 매체인 영화라는 소우주에서 창조와 파괴를 주재한다는 건 분명 특권에 속하는 일이리라. 이 특권을 꿈꾸며 자신의 첫 번째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왕초보 시나리오 작가들을 위해 충무로에서 활동중인 11명의 시나리오 작가가 복음을 전한다. 십수년 경력의 고참에서 이제 막 충무로에 입성한 작가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이들은 후배들이 시행착오를 덜 범할 수 있도록 자신의 경험담을 적나라하게 들려줬다. 이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왕초보 시나리오 작가가 하시라도 머릿속에 넣어둬야 할 10계명을 제시한다. 이 10계명이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에게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안겨주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희망한다.

1계명_네가 쓸 수 있는 이야기를 깨달으라

“<11월의 비>를 각색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실수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긴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긴가 따져보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였다. 돌이켜보면, 한석규의 컴백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후광을 기대하고 참여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3주 각색하는 동안은 정말이지 지옥 생활이었다. 몸무게가 5kg이나 빠졌다. 하지만 돌아온 건 힐난뿐이었다. 뜻대로 쓸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지만, 결국 영화사로부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는 말만 들었다. 그날 이후로는 못하겠으면 못하겠다고 정중히 거절한다” _이해영 작가

만능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애당초 버리는 것이 좋다. 이해준 작가와 함께 작업해온 이해영 작가는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는 대개 궁합이 맞지 않는 아이템이었다고 털어놓는다. 하물며 처음 시나리오에 도전하는 이들이야 말해서 뭣하랴. 선배작가가 예비작가에게 던지는 충고의 대부분은 “모든 걸 다 잘할 순 없으니 먼저 자신의 취향에 대해 진단해보라”는 것이다. 이해영 작가는 “<네 멋대로 해라> 이후 쿨한 시나리오들이 쏟아져나온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쿨한 척하는 것일 뿐이다. 쿨하지 않으면 쿨한 글을 쓸 수 없다. 누구나 인정옥(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작가)이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건지, 영화판에서 놀고 싶은 건지, 그냥 글을 쓰고 싶은 건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심산 작가의 독설과 “휴일도 없고, 월급도 없고, 퇴직금도 없다. 그럼에도 올인할 수 있는가”라는 김희재 작가의 엄포를 넘어섰다면, “당신이 시나리오로 쓰고 싶은, 쓸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당신에게 답변은 무리일 것이다. 이쯤에서 선배작가의 경험 하나를 들어보자. 로맨틱코미디를 잘 쓰는 것으로 알려진 노혜영 작가는 <싱글즈>를 끝낸 뒤, 사극을 써볼까 스릴러를 써볼까 하다가, “함부로 도전하지 마라. 잘하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주위에서 들었다. 하지만 SF멜로에 도전했고, 1년 동안 슬럼프에 빠졌다가 결국 포기했다. “한계를 인정하니까 오히려 맘이 편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다시 자문하게 됐다”는 게 노 작가의 말. 박정우 감독은 “습작을 하다 보면 자신이 맞는 장르뿐 아니라 대사를 잘 쓰는지, 캐릭터를 잘 만드는지, 구성이 좋은지 저절로 알게 된다”고 말한다. 이쯤에서 슈퍼맨이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좋다. 다만, 잊지 말지어다. 자신의 감성 촉수 중 가장 발달한 것을 찾아내야 한다는 임무를.

2계명_ 좋은 소재 발굴에 게으름을 피우지 말지어다

“유명 연기자의 소개로 왕년의 조직폭력배를 만났다. 자기 얘기를 영화로 만들어보지 않겠느냐는 청을 전해들어서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싸움 이야기만 하는데 너무 지루했다. 얘기를 빨리 끝내려고 혹시 ‘사랑 같은 건 안 해봤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한 재즈 피아니스트를 사랑했다고 하더라. 그는 조직의 명령으로 누군가를 살해했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하지만 몇년 뒤 출옥했을 때 몇년이고 기다리겠다던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를 찾아 미국이고 멕시코고 안 가본 데가 없으며 아직도 총각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눈물을 비쳤다. 순간, 난 속으로 외쳤다. ‘소재다!’ 보스의 위대한 사랑 이야기 <약속>은 그렇게 시작됐다” _이만희 작가

<약속>

맛난 음식은 좋은 재료에서부터, 좋은 재료는 지극정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건 상식이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좋은 소재에 대한 갈망은 모든 작가들의 욕망이다. 조폭으로부터 흥행영화 <약속>의 불씨를 얻어낸 이만희 작가는 “(소재를 찾으려는) 간절함이 없었다면 그저 눈물만 흘리고 뒤돌아 나왔을 것”이라고 말한다. 간절함은 의식 넘어 무의식의 세계에도 가닿는다. 작가들은 꿈속에서도 쉬지 못하고 소재를 찾아 헤맨다. 육상효 감독은 “고은 선생은 꿈에서도 시가 주르륵 보인다고 하는데 영화 소재도 마찬가지다. 새벽에 어떤 영상이 떠오르면 어서 빨리 일어나서 적어야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깨고 나면 기억이 안 난다”고 아쉬워한다. 고윤희 작가도 자는 동안 계시를 받을 일이 있을지 몰라서 잠자리에서 항상 노트를 준비해두곤 한다.

하지만 이건 만의 하나에 대비하는 자세다. 예비작가의 경우 잠을 설칠 필요까진 없다. 눈뜨고 있는 동안 일단 떠오르는 아이템은 무조건 적어두고 아이템을 발전시키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만큼 차고 넘치지 않는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라. 김희재 작가는 “시나리오 구조에 대한 이해가 없어 마구잡이로 쓴다고 할지라도 창작의 열정을 막아선 안 된다”면서 “일단 컴퓨터에 폴더를 100개쯤 만들어라. 제목만 떠올라도 인물 한명만 떠올라도 각각의 폴더를 열고 집어넣어라. 그렇게 쌓이다 보면 나뉘어져 있던 폴더 안의 조각들이 희한하게 서로 연결될 때가 있다”고 제안한다. 비현실적인 소재라고 미리 내팽개칠 필요는 없다. 이원재 작가가 5년 전 썼던 흡혈귀를 소재로 한 습작 <세일즈 맨>은 당시 “터무니없다. 서양 귀신이라 별로 매력이 없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최근 충무로에는 흡혈귀 영화가 여러 편 준비되고 있다. 한 작가의 경우, 흥행작을 내놓은 다음 전에 써뒀던 습작까지 모조리 뜨고 있다 하니 소재야말로 든든한 밑천이다. 쉬지 말고 캐다 보면 언젠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3계명_처음 주제를 잊지 말지니라

“<실미도>의 그들은 마음만 먹었다면 탈출한 뒤 외국으로 가거나 어딘가로 숨을 수도 있었다. 왜 굳이 청와대로 향했을까. 그게 의문이었다. 내겐 정체성의 문제로 보였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뿌리와 정체성을 잃은 사람들이 무언가 헌신할 목적을 잃은 채 생물학적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는 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로 주민등록번호를 쓰는 장면도 신파 효과를 내려는 게 아니라 이 주제를 내세우는 클라이맥스로 생각했다.” _김희재

<실미도>
<라이터를 켜라>

기가 막힌 소재를 찾았으니 이제 끝난 거나 다름없다고? 속단은 금물이다. 소재만큼이나 중요한 게 주제다. 육상효 감독은 “상업영화에는 주제가 없다고들 생각하는데 그러면 오히려 흥행도 안 된다”고 말한다. 시나리오의 주제는 영화가 본질적으로 이야기하려는 바다.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과 이를 쫓는 형사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끝까지 들어가보면 집념에 관한 이야기이고, <아마데우스>가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의 삶을 보여주지만 질투에 관한 이야기인 것처럼, 주제는 그 영화가 캐릭터와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작가의 속뜻이다. “훌륭한 영화를 보면 모든 장면에 주제가 관통된다”고 육 감독은 설명한다.

김희재 작가야 주제를 이해해준 강우석 감독을 만난 덕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모든 경우가 그런 건 아니다. 장항준 감독은 <라이터를 켜라>를 만들던 당시에 결말을 놓고 속을 앓았다. 제작사는 봉구(김승우)가 영웅이 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기를 원했다. 봉구가 신문에도 나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사열도 받아야 한다는 제작사의 주장에 그는 당시 작가였던 박정우 감독과 함께 담배 한대를 맛있게 피우는 모습의 결말을 고집했고, 결국 이를 지켜냈다. 그에게 이 영화의 주제는 ‘뛰는 사람 따로, 대접받는 사람 따로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노혜영 작가도 “주제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욕심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이만희 작가의 이야기 또한 유념해야 한다. “헤밍웨이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오히려 다 들어낸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거창한 주제의식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는 것이다.” 주제란 마치 공기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시나리오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명심하라.

시나리오 작가들이 꼽은 베스트 시나리오

육상효의 베스트 시나리오

<그녀를 믿지 마세요>(최희대, 박연선 씀)

일단 주인공 영주(김하늘)의 캐릭터가 좋다. 이 캐릭터는 예상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데, 그에 따라 이야기 또한 예측이 불가해진다. 그리고 장면마다 두개의 긴장이 복합적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좋다. 예를 들어 영주와 희철(강동원)이 저수지에서 말하는 장면은 거짓말을 둘러싼 긴장과 서로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는 긴장이 복합적으로 드러나며 꽤 세련되게 표현됐다. 구조적으로도 매우 뛰어나다.

김해곤의 베스트 시나리오

<연애의 목적>(고윤희, 한재림 씀)

인물 묘사가 사실적이어서 좋았다. 일반인이 보면 뭐 저런 새끼가 있어, 하겠지만 유림(박해일)과 홍(강혜정)은 생생한 캐릭터들이다. 직접 경험했거나 간접적이지만 잘 알지 못하면 쓸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게 캐릭터에서도 묻어난다. 대사가 막 갈 때는 막가고, 아낄 때는 아낀다는 점도 미덕이다. 성격이 리얼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 파격과 생생함만으로 좋은 느낌을 전달하는 작품이다.

결국 이를 통해 관객과 공유할 수 있는 정서를 만들어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노혜영의 베스트 시나리오

<혈의 누>(이원재, 김성제, 김대승 씀)

기교 부리지 않는 힘찬 필치가 좋다. 큰 플롯을 간결하게 가져가면서 단서는 치밀하게 배치하고 있다. 끝까지 긴장을 몰아가는 잘 짜인 미스테리 구조라는 점이 돋보인다. 반전 장치를 관객과 두뇌싸움하는데 쓰는 대신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로 사용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읽는 사람이 상황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묘사가 적확하다.

김희재의 베스트 시나리오

<박하사탕>(이창동 씀)

이 시나리오를 적힌 그대로 보고, 시간의 순서대로 풀어보면 완벽한 플롯의 승부란 것을 알 수 있다. 시간 순대로라면 이야기는 그저 김영호(설경구)라는 한 인간의 개인사가 된다. 하지만 그것을 역순으로 만듦으로써 미스터리가 발생한다. ‘그래서’란 접속사가 아니라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한 인간을 이해하게 하는 게 아니라 클라이맥스로서의 광주를 바라보게 한다. 플롯을 바꿈으로써 영화를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받아들이게 했다는 얘기다.

심산의 베스트 시나리오

<말아톤>(윤진호, 송예진, 정윤철 씀)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초원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한편으로는 감정이입이 되고, 한편으로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아주 신기한 경험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대사로 맛을 살린다든가 하는 칭찬할 점도 많다. 세렝게티 공원에 대한 이야기나 비에 관한 이야기도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앞뒤를 오가게끔 맞춰놓았다. 느슨한 듯 보이지만 사실 구성이 정교하다. 2번을 반복해서 보면 정말 뺄 신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큰돈 들이지 않아도 되는 좋은 얘기를 만들어낸 점이 좋다.

박정우의 베스트 시나리오

<공공의 적>(백승재, 정윤섭, 김현정, 채윤석, 구본한 씀)

뒤로 갈수록 힘이 배가된다. 어떻게든 적을 때려잡아야 한다는 주인공의 간절함이 통쾌함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인물이나 대사는 그 자체로도 좋지만, 주인공과 악당의 밀고 당기는 긴장관계 안에서 개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형사영화의 포맷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력3반>을 쓰면서 어떻게든 <공공의 적>을 피해보려고 했는데 불가능하더라.

장항준의 베스트 시나리오

<범죄의 재구성>(최동훈 씀)

일단 한국영화에 생소한 캐릭터들을 불러들였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이런 캐릭터들을 만들다 보면 과장하고 싶은 유혹이 생기게 마련인데, 오버하지 않는 적절한 톤으로 캐릭터들을 이끌더라. 장르적으로 탄탄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캐릭터를 잘 운용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취재를 통해 얻은 생생한 대사들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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