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계명_풍경 사진 찍듯 글쓰라, 무릇 영화는 눈으로 보는 것이니
“<비트>는 정우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팔을 펼치는 이미지에서 시작됐다 할 수 있다. <태양은 없다>는 정우성의 얼굴이 못 알아보게 얻어터져서 화면에 꽝 떨어지는 이미지가 시작이었다. 기타노 다케시는 어느 인터뷰에서 ‘어떤 남자가 머리에 총을 대고 있는 장면을 먼저 생각하고, 얼마 있다가 해변에서 어른들이 스모하는 장면을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6∼7개의 그림이 모이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_심산
작가는, 시나리오는 문자로 이뤄져 있지만 그 본질은 영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어떤 캐릭터와 스토리를 생각할 때 영상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만희 작가는 이를 ‘감성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예를 들어 남자가 여자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치자. ‘나는 너에 비해 보잘것없는 존재야’라고 말하는 것보다 ‘네가 이조백자라면 나는 거기 붙어 있는 김칫국물 같은 거다’라고 말하는 게 시각적으로 바로 다가온다. 결국 다양한 영상적 재료를 일상에서 보고 비축해두는 게 작가의 출발점이다.”
이런 훈련이 잘되면 “문자로 시나리오를 쓰는 게 아니라 내 머리 속의 영상을 글로 옮긴다”(김희재)는 개념이 성립된다. “<공공의 적2>에서 아끼던 수사관이 죽은 뒤 강철중이 어딘가로 걸어오는 장면이 있다. 그 부분을 썼는데, 후배가 묻더라. ‘사운드는 왜 넣으셨어요?’ 그러고보니까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 들려온다’는 대목이 있더라. 머리 속 장면을 글로 적다보니 그런 대목까지 무의식적으로 적힌 모양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영상적으로 사고한다는 말은 듣기엔 쉬워도 실제 행하기란 녹록지 않다. 고윤희 작가처럼 ‘입봉’한 경우에도 이른바 ‘비주얼 스토리텔링’은 난제다. “대개 난 어떤 장면을 써야겠다고 하면 대사부터 떠오른다. 그래서 쓰고 싶은 말을 쓰면 노트 한권이 되기도 한다. 개인적인 훈련방식은 그냥 영화를 많이 보는 거다. <화양연화>에서 장만옥의 의상은 그 자체로 대사가 아닌가.” 무언가를 시각적으로 묘사하려면 막연한 상상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장감이야말로 시각화의 기초다. 박정우 감독은 “작가가 직접 배경이 되는 공간에 가보는 게 중요하다. 그게 안 된다면 인터넷에 들어가 비슷한 공간의 사진이라도 띄워놓아야 잘 써진다”고 말한다.
9계명_중도에 포기하지 말지니라
“작가로 데뷔하기 전 시나리오 한편을 썼다. 지금으로 치면 <몽정기>와 비슷한 내용인데, 결국 영화화하지 못했지만, 한 출판사에서 책으로 내자고 제의했다. 울릉도에 가 3개월 동안 권당 350쪽이 되는 두권짜리 소설을 썼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나리오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그렇게 하고 나니 요령이 생기더라. 글이란 게 그런 것 같다. 일단 하나를 끝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고, 많이 써야 실력이 느는 것 같다.” _박정우
8계명까지를 순조롭게 돌파했다 해도 피할 수 없는 수렁이 있다. 어떤 대목에서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그것이다.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캐릭터 사이의 갈등을 뽑아내야 한다거나, 근사한 상황을 만들어야 하거나, 적절한 대사가 안 써지거나, 아니면 그 모든 것의 복합이던가. “프로 작가가 됐지만 초고를 쓸 때 5∼6대목이 막히는 것은 예전과 마찬가지”란 이해영 작가의 말처럼 이는 글쓰는 이의 숙명 같은 것이다. 육상효 감독은 “일단 어딘가에서 막히더라도 웬만하면 포기하지 마라. 특히 시나리오를 처음 쓰는 사람이라면 결국 쓰레기가 된다 하더라도 일단 완성될 때까지 밀어붙여봐라. 한편의 시나리오를 끝내는 경험 자체가 그 이전 단계에선 느낄 수 없는 많은 것을 준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쓰는 이의 의지다. 이만희 작가는 “풀어내려는 고민으로 꽉 차 있는 한 언젠가는 풀린다는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돌파구를 찾으려는 고민이 꽉 차 있기만 하다면, 언젠가는 답이 나온다는 얘기다. 엉뚱하게도 꿈이 해결해줄 수도 있다. “<약속>을 쓸 때 공상두(박신양)가 희주(전도연)에게 뭔가 예시적인 얘기를 해줘야 하는데 안 나오더라. 어느 날 잠을 자는데 내가 강화도행 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아서 초행길인데도 ‘다음엔 저수지’, ‘다음엔 사당’, 이렇게 알아맞히고 있더라. 깨어나자마자 이걸 상두의 시점으로 시나리오에 옮겨썼고, ‘너와 사랑의 결말이 이렇게 될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는 대사로 마무리지었다.” 이만희 작가의 말을 뒤집어보면 해답이 안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고민이 덜 찼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숨을 건다는 자세로 치열하게 고민을 거듭해서”(김해곤) 첫 시나리오를 완성해낸다면 이제 당신은 시나리오 작가로서 걸음마를 시작한 셈이다.
10계명_귀에 쓴 말 듣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연애의 목적> 이후 <어깨 너머 연인>의 각색을 맡았는데 초고를 만들기까지 무려 6개월이 걸렸다. 혼자 예술한 거지. 완벽하게 해서 바로 영화화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각색이라서 그런지 내 것을 좀더 넣고 싶다는 욕심이 컸던 것 같다. 결과물을 본 감독님이 창작에 가까울 정도로 원작과 동떨어져 있다고 해서 결국 새로 써야 했다. 그때 아직도 미련한 초짜구나 싶었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했으니까.” _고윤희 작가
초고를 손에 든 순간에야 본격적인 계주가 시작된다. 트랙을 몇 바퀴 돌아야 스크린에 당도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장애물은 곳곳에 있다. 고윤희 작가는 <연애의 목적>을 처음 시나리오 학원에 내놓았을 때 “변태 아냐? 인물도 제정신이 아니고, 쓴 사람도 미쳤다”는 악의적인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걸 참아내지 못하면 시나리오는 무덤으로 직행이다. 박정우 작가는 “데뷔할 때 감독하고 매번 싸웠다. 심지어 못하겠다면서 영화 그만두겠다고 나간 적도 있다”고 말한다. 이원재 작가 또한 “초고는 마음으로 쓰고 수정은 머리로 하라”는 금언을 알면서도, “많게는 15번, 16번을 고쳐써야 한다면 초고는 불과 시나리오 작업 중 10분의 1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첫 작품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노혜영 작가 또한 <싱글즈>의 초고를 영화사에 들이밀었을 때 “이걸로 영화할 수 있겠어. 엎어야 하는 것 아냐”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상처란 영예를 얻기 위한 당연한 과정이라고 긍정한다. 박정우 작가는 “시나리오는 집에 쌓아두기 위해 쓰는 게 아니다. 초고를 빨리 쓰는 건 더 많은 모니터와 수정을 위해서다”라면서 비판을 달게 받으라고 말한다. 친한 이들에게만 모니터를 요구한다면 하나마나한 일이라는 게 그의 덧말. 육상효 작가도 “썼으면 감추지 마라. 남들의 판단에 맡겨라. 상처를 견디지 못하면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어쩌면 모니터는 또 다른 애정의 표현일지 모른다. “습작 때부터 모니터를 해줄 수 있는 이들과 함께 팀을 꾸려 작업을 하다 보니 어떤 비난도 당해낼 자신이 생기더라”고 노혜영 작가는 말한다. 당신의 시나리오에 대한 세상의 수많은 화살, 피할 수 없다면 당신의 스크린 입성을 축하하는 축포라고 여겨라. 아니, 진실로 박수세례일 것이다.
도움 주신 분들 (가나다 순)
고윤희 작가. <연애의 목적> 씀. 김해곤 작가, 배우. <파이란> <이것이 법이다> <청풍명월> <블루> 씀. 김희재 <H> <국화꽃 향기> <누구나 비밀은 있다> <공공의 적2> <홀리데이> <한반도> 씀. 노혜영 작가. <싱글즈> <영어완전정복> 씀. 박정우 작가, 감독. <마지막 방위> <키스할까요?> <주유소 습격사건> <산책> <신라의 달밤> <선물>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 특사> <바람의 전설> 씀. 심산 작가. <맨발에서 벤츠까지> <비트> <태양은 없다> 씀. 육상효 작가, 감독. <장미빛 인생> <축제> <아이언 팜> <달마야 놀자2> 씀. 이만희 작가. <약속> <와일드 카드> <보리울의 여름> <아홉살 인생> <6월의 일기> 씀. 이원재 작가. <여선생 vs 여제자> <혈의누> 씀. 이해영 작가. <품행제로> <안녕! 유에프오> <아라한 장풍대작전> 씀. 장항준 작가, 감독. <박봉곤 가출사건> <북경반점> <불어라 봄바람> <귀신이 산다> 씀.
이런 시나리오를 보고 싶다
김미희/ 싸이더스FNH 공동대표
요즘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불만이 좀 있는 편이다. 젊은 작가들에게 이런 부탁을 드리고 싶다. 첫째로는 내가 감독들에게도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시나리오 작가들도 자기만의 독특한 화법이라며 시나리오를 써오곤 하는데 나로선 이해가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감독들이 자기만의 화법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시나리오가 독특한 화법을 갖는 건 매우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어차피 대중영화를 만든다고 한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감성만큼은 대중적이어야 하는데 그런 점이 부족한 시나리오가 참 많다. 그래놓고 자신만의 독창성을 몰라줘 답답하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얘기를 듣는 나 역시 답답할 뿐이다. 주변 사람을 통해 모니터를 하든, 영화계 사람에게 보여주든, 대중적인 감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게 부족한 상태에서 테크닉이나 독창성만을 내세우는 것은 곤란하지 않을까. 박정우의 코미디 문법을 봐라. 일단 철저하게 대중적인 정서를 가진 가운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지 않나.
이와 반대로 정서는 대중적이지만 남들이 하지 않은 시도를 아예 감행하지도 않는 시나리오도 있다. 이런 경우 아주 매끈하긴 하지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준다. 또 시나리오가 재밌게 잘나가다가 더 는 발전하지 못한 채 그냥 끝나버리는 경우도 있다. 작가들이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상상력도 많이 키웠으면 좋겠다. 너무 안전하고 전형적으로 가려고 한다. 물론 전형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대목도 있지만, 그런 경우조차 비틀어서 새롭게 하려는 노력이 없어 보인다. 드라마 구성의 기교랄까, 이런 게 모자라다는 생각이다. 너무 정직하다는 말이다. 스릴러나 미스터리 장르에 관심이 많은데 우리는 아직 발달되지 않은 것 같다. 한국적 정서를 깊이 담은 스릴러를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발 영화화되었을 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무책임하게 쓰지 말아달라. 갑자기 헬리콥터가 뜨는 장면을 넣고 하는데, 그거 한번 띄우는데 얼만데. 그래야 영화가 커보인다고 말하지만, 헬기 한대로 블록버스터가 되나. 돈도 돈이지만 문제는 그 신이 그 정도의 규모가 있어 보일 정도로 임팩트가 있도록 짜여졌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할 거면 프로 정신을 갖고 써줬으면 좋겠다. 2~3고까지만 쓰겠다는 식으로 계약을 요구하는데, 자기 이름을 걸고 영화를 만든다면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책임진다는 프로 근성을 가진 작가를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