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애니메이션 캐릭터, 디즈니 vs 워너 [1]
2000-01-11
글 : 박은영
미키 마우스 vs 벅스 버니, 디즈니와 워너의 애니메이션 계보 70년

디즈니와 워너가 한 무대에? 88년 <누가 로저래빗...>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

무대 위에 피아노 두대. 도널드 덕과 데피 덕, 두 마리의 오리가 등을 지고 앉아 제각각 연주를 하고 있다. 산만하고 성질 급하기론 두 연주자가 똑같아 보이는데, 느닷없이 수다쟁이 데피 덕이 도널드 덕에게 눈을 흘긴다. “너처럼 말도 제대로 못하는 오리는 처음 봤다.” 자존심 상한 도널드 덕은 온몸을 날려 데피 덕을 피아노 속에 가둬버린다. 그리고 질세라, 한마디 쏘아붙인다. “꽥꽥.”

딱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낯설고 이상하다 싶다면, 맞게 본 것이다. 이건 이만저만한 구경거리가 아니다. 각각 월트 디즈니와 워너브러더스의 대표 선수인 이들이 한 화면에 섞였다는 건 역사적인 사건이다. 88년에 실사 합성 애니메이션 <누가 로저래빗을 모함했나>가 이 놀라운 이벤트를 연출했다. 도널드 덕과 데피 덕이 서로 몸싸움을 벌이는가 하면, 미키 마우스와 벅스 바니는 의외로(?) 사이좋게 낙하산을 탄다. 악당의 손에서 만화동산을 구해내고, 만화 주인공들이 그 땅의 새 주인이 된다는 해피 엔딩에 이르면,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가 된다. 족히 열쌍은 넘어 보이는 양팀의 클래식 캐릭터들이 기쁨을 가누지 못해, 화면 가득 깡총거리는 것이다. 세기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난공불락인 양대 스튜디오 디즈니와 워너가 함께라면, 만화동산을 되찾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텐데, 그래도 그 장면이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 없다.

30년대 디즈니 스타 탄생, 착하고 예쁜 미키마우스

디즈니는 이제 애니메이션의 대명사가 됐다. 물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90년대 들어 세계 박스오피스를 종횡무진하는 것도, 클래식 애니메이션의 선배 캐릭터들이 열심히 터를 닦아놓았으니 가능한 일이다. 부드러운 미소의 미키 마우스, 모자란 듯하지만 귀여운 구피, 성미 급하지만 개성 넘치는 도널드 덕 등이 간판선수들. 이들은 30년 넘도록 단편 시리즈물 120여편에 얼굴을 내보였다. 그 사이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도 제작했는데, 이는 대개 고전 동화에서 소재를 취한 것들이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피노키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누구에게나 친숙한 동화를 가공해서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자는 것이, 당시 디즈니의 전략이었다. 산만한 아이들의 마음과 시선을 오랜 시간 잡아두기 위해, 캐릭터마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하고 유치한 성향을 담고, 쉼없이 활기차게 움직이도록 연기시켰다. 디즈니는 캐릭터의 ‘리얼리즘’을 강조했는데, 실사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고 풍부하게 감정을 담아내기 위함이었다. 고전 동화에서 스토리와 캐릭터를 따왔다는 한계가 만들어낸 특성들도 있다. ‘우리 편’으로 칭한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착하고 예쁘고 감상적이며 언제나 행복하다.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외형만으로 극명하게 드러나고, 이 때문에 캐릭터는 대부분 평면적이며 스토리의 반전 역시 기대하기 힘들다. 하지만 “장애가 되는 논리가 있다면 무시하고, 대신 엔터테인먼트를 구하라”는 월트 디즈니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고, 디즈니 클래식 애니메이션은 세대의 고개를 넘으며 어린 관객의 시각과 감정에 호소할 수 있었다.

30년대 워너 스타 탄생, <루니 툰즈>의 악동들

미키 마우스가 데뷔한 지 10년이 지난 1930년대 말, 워너브러더스도 스타 캐릭터를 배출했다. <루니툰즈> 시리즈는 다혈질의 까만 오리 데피 덕을 시작으로, 홍당무를 물고다니는 악동 벅스 바니, 작지만 성깔있는 카나리아 트위티와 앙숙인 고양이 실베스타 등이 연이어 탄생했다. 후발주자인 루니툰즈 캐릭터들은 스튜디오의 의도대로, 디즈니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반듯하고 착한 캐릭터는 이미 디즈니가 선점했으니, 달리 어떻게 갈 것인가를 고민하던 워너의 애니메이터들에게 영감을 준 이는 험프리 보가트였다. 그가 스타가 될 수 있었던 비결, 그의 매력을 파고든 것이다. 개성있는 용모, 반항적인 이미지를 차용하자, 그리고 길거리 현자들의 깐죽거림에 귀기울이자는 것. 워너의 캐릭터들은 이렇게 해서 삐딱선을 타게 된다. 생긴 것부터 곱상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빼빼하거나 푹 퍼졌거나, 아님 왜소하다. 용모로 성격을 짐작하기도 힘들다. 아이처럼 사랑스럽고 착한 눈망울을 가진 카나리아 트위티가, 탐욕스럽고 음흉한 얼굴의 고양이 실베스타에게 폭탄 공격을 가하리라고는, 보지 않고서 어떻게 믿겠는가. 깡마른 타조 로드러너와 코요테 커플도 마찬가지다. 실상 루니툰즈 월드에는 착한 캐릭터나 악한 캐릭터가 따로 없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괴짜고 악동이다. 성인 팬을 유난히 많이 거느리고 있는 벅스 바니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악동이다. 사냥꾼 엘머의 총구에 팔을 얹고 홍당무를 어석어석 베어먹는가 하면,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그를 장난감 다루듯 골려먹는다.

루니툰즈의 동물 캐릭터들은 극악무도한 장난질말고는 아무것도 괘념치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의 철학이 있다는 분석도 심심찮다. 이를테면 실베스타가 트위티에게 번번이 당하기만 하는 건, 트위티 편인 주인 할머니와 불독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자신이 사람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살상은 안 된다는 인간의 율법과 먹이는 잡아야 한다는 본능의 충돌이고, 더 나아가 인간(문명)과 자연의 대립 또는 조화를 의미한다는 해석이다. 캐릭터와 스토리에 대해 심오하고도 다양한 해석이 오갈 만큼, 청소년 이상 성인 팬층이 두텁다는 사실도 그 자체로 흥미롭다.

98년 디즈니의 뮬란, 공주병은 싫어!

클래식 스타들의 혈통은 여러편의 영화를 통해 대물림돼 왔지만, 최근 들어 변화의 기류가 피어오르고 있다. 서로를 벤치마킹한 결과랄까. 디즈니가 90년대에 내놓은 장편 애니메이션들을 살펴보자. <인어공주>와 <미녀와 야수>는 서양의 고전 동화를 교본으로 삼았지만, <포카혼타스>와 <뮬란>에 이르러서는 인디언과 중국의 역사로 시야를 조금 넓혔다. 작품의 분위기에 따라 비주얼에 차별성을 둔 것도 이때부터다.

주인공도 달라졌다. <미녀와 야수>의 벨은 순응적이고 온화한 디즈니 여성캐릭터의 전형에서 벗어났다. 뮬란은 한술 더 떠 여자임을 거부해서 성공하는, 디즈니 사상 최대의 이변을 연출한다. 아름답지도 않고, 여자답지도 않은 뮬란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여자임을 감추고 출정한 전쟁을 통해서였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했을 뿐 아니라, 가족을 보호하고, 나라를 구하는 데 일조한 것이다. 이 밖에 개성있는 외모에 재치있는 입담을 자랑하는 조연의 비중도 커졌다. 실제로 <라이온 킹>의 인기 일순위는 심바도 무파사도 아닌, 티몬과 품바였다. ‘하쿠나마타타’를 외치던 몽구스와 멧돼지가 비디오물 <티몬과 품바>에서는 일약 주연으로 부상했다.

98년 워너의 카일리, 바니의 딸이자 뮬란의 친구

워너 역시, 94년 장편 애니메이션 부서를 따로 만드는 등 활동무대를 극장까지 확대하면서, 나름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마이클 조던과 벅스 바니가 공동 주연한 실사 합성 애니메이션 <스페이스 잼>이 첫 장편 애니메이션. 98년엔 창립 75주년 기념으로 <매직 스워드>를 내놓았다. <매직 스워드>를 이끈 주인공은 눈먼 마구간지기 소년 개럿과 겁없는 소녀 카일리다. 수수한 외모, 강한 인상의 카일리는 ‘디즈니의 여장부’ 뮬란과 닮은 꼴이다. 겁없이 ‘금지된 숲’에 들어가는가 하면, 개럿과 함께 왕국을 구하고, 여자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기사 작위까지 받는다. 반항적이고 호기심 많고 진취적인 카일리는, 자신의 힘으로 신분상승한다. <매직 스워드>는 열등하고 삐딱한 캐릭터, 단순하고 우울한 색조 등 ‘워너적’ 특성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로, 디즈니적 특성을 접목하려 했다. 로맨스와 모험담을 버무려 구성한다거나, 뮤지컬 시퀀스를 삽입한다거나, 스타 배우를 성우로 기용한다거나 하는 시도는 과감하긴 했으나, 새롭지는 않았다. 지

난 여름 선보인 세 번째 장편 <아이언 자이언트>는 외계에서 날아온 거대 로봇과 친구가 되는 소년의 이야기로, <ET>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스토리라인과 친화적인 캐릭터가 워너답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본격적으로 ‘가족영화’ 시장에 뛰어든 워너의 야심을 짐작할 수 있는 변화이기도 하다.

디즈니는 워너를, 워너는 디즈니를 얼마간 닮아가고 있고, 관객의 혼을 빼놓을 만한 3D CG 캐릭터들이 출몰하고 있다. 양팀의 버팀목인 오랜 친구들, 그 후손과의 만남이 새록새록 정겹지 않은가. 반듯한 모범계의 디즈니와 천방지축 악동계의 워너는, 차별적인 이미지메이킹과 관객의 예상을 앞지르는 팬서비스로, 수십년째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 끝을 과연 누가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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