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자동차 추격신 그리고 폭팔
결말부터 보여주며 호기심을 유발한 <범죄의 재구성>(2004)
검은 스크린 위로 무전을 닫으라고 질타하는 경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화면이 밝아지면 “oh, shit”이라는 대사를 내뱉으며 차를 몰고 거리로 내달리는 주인공 최창혁(박신양)이 등장한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격렬한 자동차 추격장면에 주요 인물의 그래픽과 형형색색의 크레딧이 화면을 가르며 삽입된다. 터널을 통과한 자동차는 허공을 가르고 추락하며 폭파된다. 불길에 휩싸인 차량 앞에서 뉴스를 전하는 리포터가 보인다. 추격장면에 걸맞은 강렬한 음악도 차분한 톤으로 바뀐다. 폭파된 차량을 페인트칠하듯이 뒤덮으며 제목 ‘범죄의 재구성’이 갑자기 나타난다. <범죄의 재구성>의 타이틀 시퀀스는 사건의 결말을 도발하듯 영화의 첫머리에 내세운다. 이는 ‘리얼 사기극’을 표방한 영화의 시간적 구성이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는 숨은그림찾기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최동훈 감독은 “이것은 여러분들이 봤던 할리우드 범죄물을 연상케 할 것이라는 관객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라고 설명했다.
“장르영화 타이틀의 모범”
심보경/ PD·<안녕, 형아> <바람난 가족>
<범죄의 재구성>은 독창적인 미학이나 기술적인 특출함보다는 충실한 장르영화 타이틀 시퀀스의 모범을 보여준다. 카체이싱이나 애니메이션의 스톱모션 기법처럼 액션영화의 오프닝에 빈번히 사용되는 표현양식을 효과적으로 적용했다. 할리우드영화의 관습적인 오프닝에 익숙한 사람들은 ‘많이 보던 것’이라고 쉽게 말할지도 모르지만, 한국영화에서 이러한 장르적 접근으로 재미있는 오프닝을 만드는 일은 현실적으로 만만치가 않다. <범죄의 재구성>의 오프닝은 잘 만들어진 장르영화의 타이틀 시퀀스가 관객에게는 언제나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재삼 확인시켜준다.
동치성의 생애 최악의 하루
무려 10분 뒤에야 제목이 뜨는 <아는 여자>(2004)
안개가 스멀거리는 숲길을 산책하는 두 남녀가 보이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화면 하단에는 남녀 주인공의 크레딧이 흐른다. “사랑은 새벽길을 산책하는 것이다”라고 로맨틱한 내레이션을 읊는 남자는 주인공 동치성(정재영)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도 곧바로 부서진다. 손을 꼭 잡고 길을 걷던 애인(오승현)은 그에게 갑자기 이별을 통보한다. 흔들거리는 화면 속에서 침을 뱉고 욕을 하며 성질내는 치성. 선물로 받은 옷을 내던지며 발악하는 그의 모습은 실은 상상의 산물이다. 넋나간 치성의 내레이션이 이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의사는 그에게 시한부인생을 선고한다. 10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치성과 이연(이나영)의 우연한 첫 만남이 완결된다. 그제야 <아는 여자>의 오프닝은 제목과 감독의 크레딧을 함께 선보인다. <아는 여자>의 타이틀 시퀀스는 화려한 비주얼이나 타이포그래피가 없다. 남자주인공 치성의 정보는 과도하게 제시되지만 여자주인공 이연은 외양만 겨우 드러낼 뿐이다. 이러한 배치는 이연이 치성을 따라다니는 본편의 이야기 구조와 잘 맞아떨어진다.
“정서는 슬프게, 표현은 코믹하게”
이민호/ PD·<귀신이 산다> <실미도>
<아는 여자>의 타이틀 시퀀스는 남자와 여자의 이별을 예쁜 그림 위에 코믹하게 그려낸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와 더불어 대조적인 이미지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정서적으로는 이별의 슬픔을 담고 있지만 유머러스한 화법과 상상을 통해 역설적으로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방식이다. <실미도>를 막 끝낸 정재영이라는 남자배우가 주는 거친 느낌과 팬시하고 트렌디한 그림이나 동화적인 공간이 대구를 이루는 것도 영화 초반 관객의 관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