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외출>의 배용준+손예진 [1]
2005-08-25
글 : 김혜리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불행한 연인들의 눈부신 백일몽

“당신은, 옛날이 혹시 기억나나요? 나의 남편과 당신의 아내가 우리를 속이기 전, 아니 그들의 배신을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때 말이에요. 나는 아직 노파도 아닌데 왜 백년도 넘은 일 같을까요. 그 시간들은 신의 음흉한 장난이었을까요? 아니면 그저 우매한 자의 백일몽?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오늘은 우리 둘이서 함께 그 꿈을 다시 꾸기로 해요. 아뇨. 눈 감을 필요는 없어요. 당신의 아내인 척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내 남편인 척도 하지 마세요. 이 꿈속에서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과 함께 잠깨어 창을 열고 티격태격 하루를 계획하고 팔짱을 낀 채 외출하고 싶어요. 걱정 말아요. 이 꿈속에서는 눈도 비도 내리지 않을 거니까. 약속해요.”

그게 누구라도 슬플 때는 서로를 애무해서는 안 된다고, 날이 밝으면 더 비참해질 뿐이라고, 작가 한스 에리히 노삭은 썼다.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외출>의 서영과 인수라면 그렇게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있다. ‘모든 사랑은 불가능을 향한 사랑’이라는 금언에 의하면, 이 불운한 남녀야말로 사랑의 예술가들이다. 사랑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함으로써 사랑의 윤곽을 가장 섬세하게 더듬는 손을 가진. 허진호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외출>의 인수와 서영. 본래 연인은 그들이 아니었다. 사랑한 건 그들의 배우자들이었다. 어리석은 남자와 여자는 그냥 ‘보호자’라는 무감동한 이름으로 마주쳤다. 먼 도시, 낯선 병원의 창백한 형광등 아래 복도에서.

<외출>의 인수와 서영, 배용준과 손예진이 도착한 장소는 완벽한 스위트 홈의 이미지로 벽을 바르고 기둥을 세운 아름다운 모델하우스다. 수많은 젊은 부부들이 선망에 들떠 방향감각을 잃어버리는 곳, 모든 가구가 너무 매끄럽고 반짝거려서 현실을 문 밖에 두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곳. 스스럼없이 자랑스레 ‘가짜’인 이 공간은 첫눈에도 꿈과 연극을 위한 장소다.

처음에는 불륜, 다음에는 혼수상태에 빠져버린 배우자들을 간호하던 인수와 서영은 그들의 그림자놀이에 빠진다. 그리고 세상이 ‘죄’라고 통칭하는 사랑의 그늘에서 옹색하게 부둥켜안는다. 그런 두 배우에게 이 모델하우스는 ‘모래와 안개의 집’이다. 배용준과 손예진은 말없이 인수와 서영이 되어 가면놀이를 시작한다. 서영은 잠꾸러기다. 인수는 따뜻한 아침식사로 그녀를 깨운다. 서영의 눈이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그이는 친절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잠들기 전에는 잠들지 않았고 이따금 내가 일어나기 전에 깨어나 커피를 가져다주곤 했죠. 좋아서 호들갑을 떨다가 커피를 흘린 적도 있었죠. 하얀 시트에 번지던 동그란 갈색 얼룩이 생각나요. 그때는 그게 그냥 얼룩인 줄만 알았어요. 하지만 얼룩은 언젠가 반드시 커져요. 자꾸자꾸 커져서 우리를 통째로 삼켜버리기도 해요.”

삼척의 병원과 모텔 앞 골목만 맴돌았던 인수와 서영이었다. 큰맘 먹고 나선 해변의 산책마저 냉정한 파도가 발자국을 감쪽같이 지워버렸다. 그렇지만 꿈속에서 그들은 당당한 외출을 준비한다. 서영은 종알거리며 화장에 공을 들이고 인수는 어디를 갈까 인터넷을 짐짓 뒤적인다. 옷은? 길가던 모든 사람이 돌아볼 만큼 화려한 것일수록 좋을 것이다. 여자가 옷깃을 바로잡아주자, 남자는 세상이 바로잡힌 것 같다. 남자가 옷자락을 쓰다듬자 여자는 거기서 떨어지는 꽃잎의 환영을 본다. 준비됐나요? 성큼 앞장 선 남자의 등 뒤에서 여자는 새삼 깨닫는다. 안 돼, 저 문을 나서면 자명종이 울릴 거야. 귀청을 찢고 우리 둘도 찢어놓을 때까지. 잠깐만요, 아주 잠깐만 우리 이 문턱에 그냥 서 있어요.

장소협찬 경남기업 주택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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