엷은 화장기의 화면 밖 얼굴을 봤을 때는 대학생인 줄 알았다. 말수 적은 대학생 같은 느낌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마지막 표지 컷을 앞두고,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내맡긴 채 다리를 쭉 뻗어 화장대에 걸치고 있는 모습에서 장난기가 배어났다. 인터뷰를 시작할 즈음에는 벌써 두눈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뒤늦게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고민과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하고, 하루키 소설에 스파게티가 등장하면 식욕이 샘솟으며,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암리타>에 나오는 구절인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모호한 감정들’ 속에 파묻히는 것을 좋아하는 스물넷. <외출>의 금지된 사랑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단 한번의 영원한 사랑을 꿈꾸며, 그래서 맑은 눈동자는 아직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는 듯이 반짝거리는 스물넷. 그는 그런 스물넷으로 <외출>의 여인 서영을 향해 외출을 떠났다가, 손예진으로 막 돌아왔다.
“세상이 모두 등을 돌린 느낌이죠”
-집중과 몰입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어요.
=원하는 시나리오였고, 내 영화이자 우리 스탭들이 함께하는 영화였고,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였기 때문에 빠질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그런지 건망증이 좀 심해진 것 같아요. 한곳에만 신경 쓰고…. 곽재용 감독님에게 귀신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어요. 감독님이 모니터 앞에서 나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하는데 저쪽 카메라 앞에 있는 내가 무슨 얘긴지 다 눈치를 챈다는 거예요. 귀에 도청장치라도 있느냐고.
-영화를 찍을 때마다 작품에 맞는 음악을 녹음해서 듣는다면서요. 이번에는 무엇이었나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이하 <지우개>) 때는요?
=비틀스, 유키 구라모토, 슬픈 한국 발라드들을 모두 MP3에 망라해서 그날그날 느낌에 따라 들었어요. 김광석도 듣고요. 이 영화는 일상적인 느낌이 많고 허진호 감독 특유의 롱숏이나 롱테이크가 관객에게 생각하게끔 하는 영화니까. 서영과 인수가 아무리 안타까운 사랑을 해도 인간의 초라함과 외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있어서 다양하게 들었어요. <지우개>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크릿 가든의 <아다지오>. 흥얼흥얼(실제로 노래를 부른다). 모르세요? 괜히 해줬네. (웃음)
-배용준은 테이크를 거듭하고 만족을 쉽게 못하는 편인데 현장에서 봐도 손예진은 확신이 있어보였다는 얘기가 있어요.
=전혀 안 그렇거든요(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데 치열이 참 가지런하다). 포기하는 거죠, 쉽게. 배용준씨는 의지가 강하세요. 밀고 나가는 부분이 있는 것 같고. 전 감정이 빨라요. 테이크가 갈수록 좋아지는 배우는 아닌 것 같아요. 테스트 촬영 때 오히려 좋을 때도 있고. 반면 오래 못 가죠. 확고하게 어떤 감정이라는 게 있다면 밀어붙일 수 있겠죠. 슬프고 울고 싶다고 우는 것만 보여줄 수는 없잖아요. 그럼 욕을 해볼까, 그러기도 하고. (계속 우는 테이크를 많이 가자는) 감독님한테 삐친 적도 있는데, 그래서 연기를 안 했더니 그게 더 좋다고 하기도 하고.
-시비거는 사람들도 있는데 신경 안 쓰는 건 원래 느긋한 성격이어서 그런가요. <지우개>에서 내숭의 전략을 분석한 기사도 있는데요.
=전 내숭 없어요. (웃음) 영화 속 이미지 그대로 믿고 싶은 분들이 계세요. 내가 이슬만 먹고살 것 같고. 루머가 나올 수도 있는데 그때마다 아니에요, 하는 거 자체가(이때 무릎을 의자 위로 올리고 무릎을 감싸안았다. 맨발엔 부분 페디큐어를 칠했다)… 그거에 대해 발끈하면 스트레스만 받죠. 진실은 나중에 다 알려지지 않을까요.
-남편과 그 애인이 낸 사고로 죽은 사람을 문상 갔을 때 머리채 잡히는 장면이 있죠. 이 장면이 영화의 감정적인 전환점인 것 같은데.
=서영을 떠나서 개인적으로도 힘들었어요. 서영으로서는 세상이 모두 등을 돌린 그런 느낌, 구렁텅이에 빠진 느낌이죠. 죽고 싶은 처절한 상황인데다가 추운 날씨에 오래 찍었는데 그 감정의 연기는 다시는 해보고 싶지도 않고, 안 그래도 우울한 서영인데 왜 바람 피우던 남편이 사람까지 죽여서 내 머리가 뜯겨야 하나, 너무 용서할 수 없는 거죠.
-자기도 모르게 서영의 감정에 붙들리게 된 대목은 없나요.
=인수와 술먹는 장면인데 이 장면부터 서영의 인물이 보여요. 서영은 일하는 여자에게 열등감이 있어요. 선보고 결혼하고 집에서 살림하며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느끼는 여자인데, 배신당하고 초라해진 거잖아요. 진짜 술먹고 찍었는데, 즉흥적으로 내 대사를 만들어서 했는데(“어떻게 만났어요?”라는 인수 질문에 애드리브로 “졸업하고 아빠가 빨리 결혼하라고 해서… 선봤어요. 그래도 좋았는데… 일하는 여자가 매력있죠? 그래도 나 예쁘지 않아요?” 하는 장면) 취해서 마지막 테이크를 남기고 쓰러진 거예요. 그 즉흥적인 대사들은 내가 서영이 됐기 때문에 가능했죠.
-‘외출’이라는 단어, 행위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외출을 한다면 어떤 계절에 하고 싶나요. 또는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다는데 어디로 외출을 먼저 가고 싶나요.
=제겐 의미가 있는 단어가 됐는데, 먼길을 떠날 줄 몰랐습니다, 하는 영화 티저 광고 카피의 느낌이 좋아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쓸쓸함이 묻어나고. 전 여름의 밤바람 냄새에 이렇게 민감해질 줄 몰랐는데, 후덥지근고 미지근한 공기 속에 신선한 바람이 불 때 기분이 이상해요. 아프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요. 사막이나 시골길을 달려보고 싶어요.
-혼자서 그 사막을 달린다고요?
=같이 갈 남자가 있으면 더 좋겠죠. 저는 첫눈에 반한 적이 없고 쉽게 누굴 좋아하지 못해요. 저보다 큰 사람이었으면 해요. 나를 담아줄 수 있는 큰 그릇이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