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여름 영화제를 가다 [2] - 제천국제음악영화제
2005-08-31
글 : 이영진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청평호에 가득찬 노래소리

음악영화를 전문으로 하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바람 한점 없는 뜨거운 오후. 외마디 비명이 청풍호에 수직으로 꽂힌다. 지상 62m 높이에서 떨어진 비명은 외줄의 탄성(彈性)을 이용해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한다. 국내에서 가장 높다는 청풍랜드 번지점프대(臺) 주변은 아찔한 추락을 목격한 동반 비명으로 가득하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팸플릿을 들여다보며 야외상영 일정을 확인하던 한 여자는 자신의 남자친구 순서가 됐는지 곧바로 번지점프대 근처로 다가선다. 그리고는 슈퍼맨 포즈로 하강했다가 개구리 모양으로 튕겨오르는 남자의 모습을 놓칠세라 캠코더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않는다. 망원렌즈로 올려다보며 입맛만 다실 수 없었는지 혈기왕성한 사진기자도 급기야 카메라를 내려놓고 대기표를 받으러 간다. 뛰어내리고 싶으면 혼자 그럴 것이지 “같이 안 할래요?” 하고 물어볼 게 뭐람. 게다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온 선배는 어렸을 때부터 심장이 약해서 안 한다고 그러네”라고까지 한다. 못 들은 척 다시 한번 올려다보니, 머리, 가슴, 다리까지 여전히 울렁울렁, 후들후들한 높이다.

한낮,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제1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도 번지점프대 위에 올라선 기분일 것이다. 야구치 시노부의 <스윙걸즈>를 비롯해 음악과 관련있는 국내외 40여편의 영화들을 인구 14만명의 소도시로 불러들인 류상욱 프로그래머는 “첫해라 아무래도 부족한 게 많다”면서 “촉박한 일정과 적은 예산으로 사전에 뉴욕 트라이베카영화제와 홍콩국제영화제밖에 돌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오후 들어 숙소가 몰려 있는 청풍랜드쪽과 제천역 근처를 돌아온 셔틀버스가 20분 간격으로 시내에 있는 상영관 TTC 앞에 영화제 손님들을 토해놓지만 썰렁한 분위기를 만회할 정도는 아니다. 각종 기념품들과 영화 관련 CD, 서적을 파는 부스도 한산하다. 한 자원활동가는 “개막일이었던 어제는 그래도 4∼5개 팔았다”고 말한다. 코스프레와 영화 속 장면 따라하기 이벤트도 열렸지만, 그 일대는 외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보다 현지 주민들이 더 많다. “컷! 대사를 그렇게 하시면 안 되죠.” 흥을 돋우는 영화제 스탭의 우렁찬 목소리에 아이들과 촌로들만이 삼삼오오 모여 “뭔 일이래요?” 하며 신기해할 뿐이다.

한밤, 생음악과 함께 객석은 불타오르고

썰렁한 영화제라는 한나절의 아쉬움은, 그러나 오해였다. 사랑을 너무 많이 아는 여자들과 사랑을 전혀 모르는 남자들의 옥신각신 수다를 뮤지컬로 옮긴 알렝 레네의 <입술은 안돼요>를 보기 위해 밤 8시 청풍호반 야외상영장을 찾은 이들은 눈짐작만으로도 1천명이 넘었다. “혁신도시 한다면서 (공공기관) 하나 못 끌어오면 안 돼!”, “영화 틀려면 기름값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라며 불경기가 걱정인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의 시사 만담이 들려왔지만, 여든이 넘은 프랑스 거장의 유쾌한 뮤지컬을 관람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물 만난 영화, 바람난 음악”이라는 모토를 내세운 영화제에서 개막 이후 가장 관심을 끌어모은 행사는 바로 ‘원 썸머 나잇’. 10시가 넘어서 영화상영이 끝나자 중년 부부와 가족 단위 관객 일부가 빠져나갔지만, 제천에 뒤늦게 도착해 호수가로 급히 달려온 젊은이들로 객석은 금세 메워졌다. 13명이나 되는 애시드 솔 밴드인 커먼 그라운드가 등장하자, 새로운 피를 수혈한 관객석은 밴드 이름처럼 ‘만장일치’의 몸짓으로 흥청거린다. 빌리지 피플의 <Y.M.C.A>를 시작으로 1970, 80년대 디스코 음악 메들리가 연달아 뿜어나오고, 관객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리에서 일어서 머리 위에 두 손 올린다. 영화와 음악의 만남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청풍명월 관객의 요란한 응원에 극성이던 모기떼도 온데간데없다.


①TTC영화관 입구에 마련된 간이 무대 위에선 오전부터서 색소폰 연주와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다. 5곡을 채운 다음 코미디언 배연정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고 무대를 내려온 박동준씨와 김슬기씨는 알고보니 제천 토박이. 일본 오사카, 나고야 등지에서 클럽 연주 생활을 하기도 했던 박씨는 “말 못할 사정 때문에” 20년 동안의 타지 생활을 접고 몇년 전 고향인 제천으로 돌아왔다. 지난해부터 ‘박동준 색소폰 아카데미’를 차려 20여명의 원생들에게 연주 실력을 전수하고 있는 그는 관객이 없어서 연주 또한 흥이 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첫해라 아마도 홍보가 부족해서 그렇지 내년 되면 달라질 겁니다”라고 정색하고 답한다. 아, 그런데 저기 산만한 꼬마들에게 색소폰 연주는 너무 과한 이벤트가 아닐까.

②다들 제 좋은 시간에 와서, 제 좋은 자리에 앉아, 제 좋은 자세로, 가끔은 딴짓도 하며 커다란 튜브 스크린을 바라보는 즐거움이란!

③+④이틀 전 사할린의 한인들과 문화교류 행사를 가졌다는 캐비넷 싱얼롱즈는 여독이 채 풀리지도 않은 채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찾았다. 이들은 트럭을 개조한 무대 위에서 흥겨운 폴카 연주를 날리며, 청풍호 주변에 비해 다소 한산했던 TTC영화관 앞 거리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⑤“노는 것 무진장 좋아하는 엽기가족”이라고 자신있게 소개한 허형모(가운데)씨 가족은 “여기 와서야 영화제가 열린 걸 알았어요. 내년엔 영화 보러와야죠.”라고 한마디. 이 가족을 2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을까.

⑥겉으로는 영락없는 세 친구, 알고보니 대안학교인 이우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여선생과 제자들이란다. 부천과 분당에 사는 송원준, 홍지은(왼쪽부터)씨는 “시골에서 한번쯤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며 자신들을 버리고 제천으로 내려온 수학선생님 한지영(맨 오른쪽)씨를 만나러 왔다가 <다큐멘터리 한대수>를 봤다고. “그냥 기인인 줄만 알았는데 순수한 인간이더라고요.”(홍지은) “나중에 영화감독이 될 것이라고 꼭 써달라”는 송원준씨는 현재 푸른영상에서 자원봉사 일도 하고 있다.

⑦야외상영 뒤에 이어지는 음악공연 ‘원 썸머 나잇’을 위해 대기 중인 커먼 그라운드. 멤버가 13명이나 되는 탓에 넓은 천막 대기실마저 좁아 보인다. 테너 색소폰을 맡고 있는 김중우씨는 “제천처럼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선 대기하는 것마저도 즐겁다”면서 “비장의 무기를 준비하고 있으니 꼭 맛보고 가라”고 한다. 오는 9월에 두 번째 앨범을 발매할 예정인 이들은 이날 무대가 무너질 만큼의 박력을 맘껏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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