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여름 영화제를 가다 [1] - 정동진독립영화제
2005-08-31
글 : 오정연
사진 : 오계옥
무더위를 잊게 만드는 영화제 현장을 가다- 정동진독립영화제 vs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오, 통재라! 이번 여름도 결국 방콕으로 피서하였구나. 더위에 쫓겨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행렬을 보며 집 나서면 고생이다, 라고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건만. 전리품처럼 새카맣게 태운 검은 피부를 자랑하며 활보하는 이들을 보니 뒤늦게 후회막심이라. 도시에서 더위와 씨름한 이들이라면, 한번쯤 이런 마음 먹지 않았을까. 여기, 올해로 7회를 맞은 정동진독립영화제와 첫 행사를 치른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관한 짧은 휴양기를 내놓는다. 지칠 대로 지친 심신, 달랠 기회 놓치신 분들, 자포자기 마시고 일찌감치 내년 여름을 예약하라. 벌써부터 정동진의 해돋이를 보며, 제천 청풍호의 공기를 마시며, 영화를 즐기는 자신이 떠오르지 않나. 그 옆에 누군가 동행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별이 뜨면, 영화도 뜬다네

야외상영의 즐거움 빛나는 정동진독립영화제

삼루타를 쳐놓고 미안해하는 공격팀, 저 멀리 사라진 공이 돌아오려면 아직도 멀었건만 “자자, 삼루로 정리합시다!”라며 진루 여부를 협상하는 수비팀…. 지난 8월6일 정오. 한여름의 땡볕 아래 정동진 초등학교 운동장에선 5회짜리 미니야구가 한창이다. 누가 감독이고 심판인지, 타순은 물론이고 공격과 수비가 어떻게 갈리는지도, 웬만한 눈썰미가 아니면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전형적인 동네야구다. 그러나 각 지방의 시네마테크 일꾼들과 독립영화 감독들로 구성된 멤버의 면모는 제법 화려하다. 이래봬도, 지난 7년 동안 매년 8월 첫째 주말마다 3일씩 꼬박꼬박 열려왔던 유서 깊은 독립영화제의 부대행사다. 영화제 관계자와 자원봉사자들, 초청 감독들이 한곳에 묶는 숙소인 초등학교 교실 칠판에 붙여진 영화제 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날 영화상영, 뒤풀이. 둘쨋날 야구, 물놀이, 영화상영, 뒤풀이. 셋쨋날 축구, 물놀이, 영화상영, 뒤풀이.

신나게 보고, 신나게 물놀이 하고

던지는 공보다는 한마디씩 주워담는 훈수며 농담이 일품이었던 경기가 마무리되자, 이번엔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우르르 물가로 향한다. 자장면이 가득 담긴 철가방이 한 차례 다녀간 뒤 본격적인 물놀이가 시작될 무렵, 사각 수영복 차림의 김동원 감독이 가족과 함께 나타난다. 지난 1999년, 한국독립영화협회와 강릉시네마테크가 작지만 내실있는 지방의 독립영화제를 꿈꾸며 정동진에 터를 잡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을 제외하고 매년 이 영화제에 참가했다는 김동원 감독은 이경순 감독의 가족과 함께 학교 운동장 한구석에 나란히 텐트 숙소를 마련하고 있다고. “여기만큼 돈 안 들이고 피서 올 수 있는 데가 없다”는 김동원 감독이나, “1년에 딱 한번, 정동진에 갈 건지를 묻기 위해 김동원 감독과 통화한다”는 이경순 감독. 독립영화계의 맏형이자 맏언니 격인 두 사람의 어린 딸들이 전국에서 모여든 독립영화인들과 어울리는 광경은, ‘독립영화계의 연례 MT’라는, 이 행사의 또 다른 의미를 실감케 한다.

밤이 되면 스르륵 에어스크린 펼쳐져

그러나 ‘별이 지는 하늘과 영화가 뜨는 바다’를 슬로건으로 하는 정동진독립영화제의 클라이맥스는 초등학교 운동장 한가운데 에어스크린이 펼쳐지면서 시작된다. 땅거미가 퍼져가고, 모기를 쫓기 위한 쑥연기가 하늘로 번져가면, 그 어떤 휘황찬란한 영화제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 펼쳐진다. 초등학교 2학년짜리 아들의 성화에 못이겨 처음으로 영화제를 찾았다는 정동진 주민부터 두딸과 딸의 남자친구며 손자를 거느리고 강릉 시내에서 나들이를 나왔다는 할머니까지. 1년에 단 한번, “극장에선 볼 수 없는 특이한 영화”를 보기 위해 모여든 가족 단위 열혈 관객의 행렬은 마치 또 한편의 영화 같다. 물론 분위기 좋은 야외영화 상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들렀다가, 영화제 기간 내내 상영장을 찾게 된 휴양객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날의 화제작은 18세 이상 관람가 장면이 잠깐 등장하여 관계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음에도 모든 관객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던 <핵분열가족>과 어머니와 딸의 애틋한 관계를 담은 탓인지 유독 여성관객에게 두터운 공감대를 형성했던 <산책>. 덕분에 상영장을 나서는 길목에선, 어떤 영화에 관객상 표를 몰아줄 것인지를 둘러싼 일행들의 정겨운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스크린 뒤로 지나가는 기차 소리가 마치 영화 속 사운드의 일부인 듯 운치를 더하는 가운데, 12편의 영화가 스크린 위에 명멸하면서 500석 규모의 객석을 채운 관객의 반응도 점점 솔직해진다. 울고 웃으면서 점점 똘망똘망해져가는 이들의 눈빛에, 깊어가는 여름밤이 무색하다.


①영화제를 준비한 강릉시네마테크와 전국 각지에서 초청받은 이들이 강릉팀과 비강릉팀으로 나뉘어 야구경기를 진행한다. 언제나 비강릉팀이 우세였던 예년과 달리 올해는 강릉팀의 극적인 역전승이 펼쳐졌다.

②1년에 한번 있는 피서삼아 영화제에 참여하는 이들이 태반인데, 바다에 몸 한번 담궈보지 못한다는 건 너무 아쉽다. 한명씩 차례로 바다에 던지기, 팔이 더 아픈 물장난, 고무줄 규칙으로 운영되는 수구 등을 즐기기 위해선 일단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한다.

③본격적인 영화상영 전 마련된 특별공연. “희한하네”의 기글스팀(왼쪽부터 이재형, 한형민, 조영빈)이 정겨운 시간을 선사한다. 조영빈씨는 서울독립영화제 조영각 집행위원장의 친동생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유명인을 만난 동네 아이들, 관광객은 휴대폰으로 디카로 연신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출연료는 없다.

④정동진독립영화제는 매일 전날 상영작 중 가장 인기를 모았던 작품을 선정해, 그날의 상영이 시작되기 전 관객상을 수여한다. 선정은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관객이 가장 재밌게 본 작품이 적힌 통에 넣은 동전의 개수를 세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8월5일 상영작 중 가장 사랑받았던 것은 박수영, 박재영 감독의 <핵분열 가족>. 이들에겐 관객이 모아준 1만7670원이 상금으로 주어졌다. 받은 상금을 정동진영화제에 다시 기부하겠다는 이 감독들은 그러나, 뒤풀이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⑤정동진영화제는 영상자료원의 ‘찾아가는 영화관’과 함께한다. 덕분에 불안정했던 영사시스템도 많이 안정됐다. 많은 이들이 정동진영화제의 압권으로 꼽는 광경은, 에어스크린 뒤로 기차가 지나갈 때다. 여름밤의 야외영화제로, 상영환경의 특별함 때문인지 같은 영화라도 정동진에서 보면 남다르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말이다.

⑥집으로 돌아가는 길. 저마다 기꺼이 동전을 털어 재밌게 본 영화를 향한 애정을 표현한다. 이날은 <산책>을 은근히 강요하는 엄마, 혹은 할머니와 누가 뭐래도 <핵분열 가족>에 동전을 넣겠다는 아이들의 신경전이 만만치 않았다. 동전의 액면가는 관계없이 개수만을 따지기 때문에 아무리 영화가 좋더라도 1천원짜리를 덜렁 넣어버리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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