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5 한국 호러영화 결산 [1] - 김봉석
2005-08-31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2005년 여름 한국 공포영화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김봉석 vs 듀나

1998년 <여고괴담>의 흥행성공을 기점으로 공포영화는 한국영화의 여름을 대표하는 장르로 자리잡았다. 해마다 부침을 거듭하며 올 여름에도 <분홍신> <여고괴담4: 목소리> <가발> <첼로-홍미주 일가 살인사건> 등 4편의 공포영화가 관객을 만났다. 과연 올해 한국 공포영화는 진화했는가? 퇴보했는가? 개별 영화가 아니라 여러 영화를 한 묶음으로 단정짓긴 어려운 일이나 이런 궁금증을 막을 길은 없다. 특히 올해처럼 4편이 뚜렷한 공통점을 보여준 경우엔 더욱더. 우리는 공포영화 전문가인 두명의 영화평론가에게 올해 한국 공포영화의 경향에 진단하는 글을 부탁했다. 김봉석 영화평론가는 뛰어난 장면연출력을 보여준 영화조차 이야기가 어설프다는 점에서 지난해보다 실망스럽다는 의견을, 듀나는 장르영화의 규칙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봤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그들의 글을 통해 올해의 한국 공포영화를 돌이켜보는 기회를 가져본다.

그냥 무서운 영화를 보고싶다

동일한 패턴의 이야기 반복과 자의식 과잉 보여준 4편

올 여름에 개봉된 4편의 공포영화를 보고 나니, 이리저리 뒤엉켜 뭐가 뭔지 구분이 되지가 않는다. 다들 비슷하고, 어설프다. 이상하게도 올해의 공포영화는 하나같이 여성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여성인 것은 익숙한 일이지만, 이건 좀 과하다. 소유의 욕망이나 재능의 질투 같은 원초적인 감정에서 모든 비극이 시작되고, 피해자로 보인 여성은 사실 가해자였고 대체로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왜일까? 왜 하필이면 올해 나온 공포영화들이 모두 동일한 패턴의 이야기를 반복한 것일까?

그녀는 더 많은 재능을 가진 친구를, 죽인다. 사랑을 얻지 못한 그녀들은, 죽이거나 죽어버린다. 그리고 저주를 받거나, 저주한다. 너무 뻔하다고 해서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단지 그 이야기들이 별로 설득력이 없고, 공감을 사지 못한다는 것이 난감하다. 게다가 공포 하나만 집중하기에도 부족한 것 같은데, 욕심이 많아 이것저것을 끼워넣는다. <분홍신>은 욕망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춤을 추다 죽었다는 동화를 떠올리게 한다. 즉 탐욕이다. 그런데 선재의 탐욕은 도대체 무엇일까? 불륜을 저지른 남편을 죽인 것과 그녀의 탐욕은 어떤 관계일까? 분홍신을 발견하고 누군가를 죽이게 된 것이 먼저일까, 남편을 죽인 것이 먼저일까? 그건 분홍신의 저주일까, 선재의 또 다른 자아의 욕망일까? <분홍신>은 저주받은 물건이란 전통적인 소재와 이중인격이란 현대적인 요소를 섞으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왜 모두 여성의 탐욕인가

<여고괴담4: 목소리>

네편 중 가장 잘 만들어진 <여고괴담4: 목소리>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영언은 병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다, 너무 지친 나머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음악선생을 독점하지 말아달라는 귀신의 부탁을 용감하게도, 혹은 무모하게도 거절해버린다. 그 결과로 영언은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영언이 그 악행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언제부터의 일일까? 억울한 죽음의 충격 때문에? 아니면 어머니를 죽인 뒤, 이미 자아가 분리되어버린 것일까? 여러 번, 이해하려고 독한 마음을 먹으면 동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중인격은 요즘 너무 남용되고 있다. 갖가지 설정들을 다 갖다쓴 뒤에, 결말 부분에서 새로운 회상장면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 올해의 한국공포영화만이 아니라, <엑스텐션> <숨바꼭질> 등 해외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걸 반전이라고 우길 수도 있겠지만, 그건 반전이 아니라 폭력적인 정당화다.

게다가 한국 공포영화들은 너무 ‘예술’에 신경쓰는 것이 아닐까? 그런 시도 자체를 시비 걸 생각은 없지만, 지나칠 정도로 자의식 과잉의 경향을 보이는 것은 우려할 만하다. 공포 자체를 파고들어 승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적인 장식에만 신경을 쓰고 어설픈 철학만 난무한다. <분홍신>이 굳이 40년대 이야기를 끌어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선재의 탐욕을, 다중인격을 말하고 싶다면 ‘분홍신’이란 상징적인 물건 하나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선재가 분홍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미치지 않았을까? <가발>의 수현은 단지 희생자인 것일까? 동성인 선생을 사랑한 죄로 자살한 남학생의 혼이 씌워져, 그저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존재가 된 것일까? 가발이 필연적으로 수현을 만나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들은 그저 갖가지 상황들만을 마구 던져놓은 채 ‘충격 효과’에만 공을 들인다. 공포 그 자체가 아니라 미장센에 현혹되고, 이야기가 아니라 음향효과에 매달린다. 약간의 실수도 있었지만 <장화, 홍련>은 모든 것이 수미가 만들어낸 마음의 지옥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지옥을 위해서, 정교하고 세심한 공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후의 한국 공포영화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기괴한 가옥과 방, 벽지, 가구 등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분홍신>
<가발>

아무리 생각해봐도, 올해 한국의 공포영화는 매너리즘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생각해보면 지난해가 나았던 것도 같다. <령> <페이스> <인형사> <분신사바>는 한심했지만, <시실리 2km>와 <알포인트>는 좋았다. <시실리 2km>와 <알포인트>는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일관된 상상력을 발휘하며, 관객과의 게임에서 성공했다. 어설프게 반전을 꾀하거나, 새로운 공포를 보여주겠다며 호언장담한 영화들은 모두 실패했다. 이제는 ‘새로운’이란 홍보문구가 정말 짜증날 정도다. <가발>을 기대했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공포영화에서 가장 익숙한 소재의 하나인 머리카락. 처음부터 가장 익숙한 소재를 잡음으로써, 새로운 것에 집착하여 이도 저도 아닌 영화들을 만들어내던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해서 <가발>을 고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고편의 몇몇 장면들 말고 <가발>은 우왕좌왕한다.

언제나 새로운 소재를 찾아다니지만, 사실 공포영화는 가장 익숙한 이야기를 변주한다. <뉴 나이트메어>에서 웨스 크레이븐이 직접 이야기하듯이, 공포영화는 과거의 민담과 전설이 현대적으로 변형된 것이다. 괴물의 형태가 조금씩 바뀌고, 스타일이 번드르르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원형은 언제나 반복된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크툴프 신화를 창조한 H. P. 러브크래프트 같은 천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창조가 아니라, 자신만의 변주다. 늘 같은 길을 가면서도, 자신만의 보법(步法)으로 가야 한다. 재즈 스탠더드 연주처럼.

과욕이 공포를 죽인다

<첼로-홍미주 일가 살인사건>

참으로 기묘한 것은, 한국에서 공포영화를 만든 감독들은, 대체로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지 감독 제의를 받아서, 혹은 자신이 생각하던 테마가 공포에 어울릴 것 같아서 하게 되었다는 것이 대다수 연출의 변이다. ‘새로운’ 공포를 만들겠다며, 자신의 ‘의도’를 중심에 세운다. 그리고 몇편 본 공포영화와 뒤늦게 챙겨본 공포영화들에서 ‘무서운 장면’들을 따온다. 공포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런 무서운 장면들을 몇개 보여주면 만족할 것이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그런 생각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결과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뻔하고 공포는 베끼기 일색이다. 장르의 공식이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세련된 테크닉이 필요한 장르다. 테크닉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올해의 공포영화는 <첼로-홍미주 일가 살인사건>을 제외하고, 대단히 뛰어난 장면 연출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스스로 자멸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 의아할 뿐이다.

게다가 그 공포영화들이 하나같이 여성의 탐욕을 말한다는 것도 좀 짜증이 난다. 그게 지금의 시대정신도 아니고, 그들은 가장 나태한 선택을 한 것뿐이다. 여성을 비이성적인 존재로 보는 전통적인 편견도 작용했을 것이고, 유일하게 여성의 저주가 아닌 <가발>조차도, 동성애자의 저주로 변형시킨다. 그게 그들의 ‘새로운’ 공포일까? 음향이건, 아우라건, 미장센이건 모두 이후의 문제다. 여성의 탐욕을 사전적으로밖에 보지 않으면서 새로운 공포를 만들어내겠다는 것은 과욕이다.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감독도 얼마든지 걸작을 만들 수 있다. <링>의 나카타 히데오도, <소름>과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도 그렇다. 윤종찬, 민규동, 김태용은 자신의 테마에 충실했고, 나카타 히데오는 공포의 구현에 충실했다. 나카타 히데오는 공포가 일어나는 지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분명하게 만들어냈다. 탁월한 테크니션이자 장인인 것이다. 이제 매끈한 공포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에 별 관심이 없어진 나카타는, <링2>를 가족의 관계에 집중한 자신의 영화로 만들어낸다. 하지만 <링2>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면은 큰 사슴들이 자동차를 공격하는 광경이다. 그저 공포영화이기 때문에 집어넣은 장면이지만, 나카타는 최선을 다해 명료하게 뽑아낸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공포는 충분하다.

지금 한국 영화계에 필요한 것은 걸작이나 예술적인 공포영화가 아니라, <여고괴담> 1편처럼 다수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단순한 공포영화다. <소름> 같은 걸작이 등장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공포영화의 걸작은 공포영화 장르의 흐름이나 발전과 거의 관계가 없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오히려 제작사에서 시리즈를 계속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단지 재능있는 감독이 공포영화에 도전하여, 의미있는 걸작이 등장했다는 사실뿐. 1회성이었고, 산업에 영향을 주지도 못했다. 이제는 <여고괴담>으로 공포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이 발견되었던 것처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그저’ 무섭고 재미있는 공포영화가 필요하다. <스크림>, 혹은 <13일의 금요일>이나 <나이트메어>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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