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호러에 대한 반작용
장르의 규약에서 많이 벗어난 올 여름 호러의 어떤 경향
2005년 여름 시즌 호러영화들의 가장 큰 특징은 ‘탈장르화’다. 이건 끔찍했던 2004년 여름 시즌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좋게 말하면 감독들과 작가들이 어느 정도 자유를 얻은 것이고 곧장 말하면 모두들 겁에 질려 지난해와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가짜 사다코들은 퇴출되고 의무방어 깜짝쇼들도 많이 줄었으며 드라마는 강화되었다. 몇몇 영화들은 더이상 ‘호러영화’라는 장르의 규약에 얽매이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정말로 이들이 장르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장르의 영역은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넓고, 만약 누군가가 그 경계선을 벗어난다고 해도 쉽게 그 영역을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장르는 먹성이 좋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SF 독자들은 여전히 캠벨식 우주선 모험이나 읽고 있었을 거고 추리 독자들은 여전히 크리스티식 범인찾기 이외엔 다른 책들은 찾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탈장르화’라고 했지만 여전히 올해의 호러영화들은 특정 서브 장르의 좁은 공간 안에 갇혀 있다. 사다코의 굴레에서 간신히 벗어나긴 했지만, 이들은 모두 고등학생 관람가인 순정만화식 호러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은 모두 <장화, 홍련>의 동생들이다. 모방의 대상이 <링>에서 <장화, 홍련>으로 옮겨진 것이다. 다음 유사점들을 보라.
<분홍신> - 고전 소재, ‘슬프고 아름다운 호러’, 왜곡된 기억과 현실, 과장된 인테리어.
<여고괴담4: 목소리> - 왜곡된 기억과 현실, 다중인격.
<가발> - ‘슬프고 아름다운 호러’, 자매, 꽃발 날리는 벽지, ‘돌이킬 수 없는 일’.
<첼로-홍미주 일가 살인사건> - 과장된 인테리어, ‘돌이킬 수 없는 일’, 왜곡된 기억과 현실.
찾아보면 더 나온다. 직접적인 영향은 아닐 수 있지만, 어느 쪽이건 올해의 호러영화들이 여전히 안전한 길을 택하고 있다는 증거는 된다.
사다코 퇴출·깜짝쇼 배제, 드라마는 강화
그럼 구체적인 작품들을 다루어보기로 하자. 대충 내가 간단하게 점수를 매겨 줄을 세워본다면 <여고괴담4> <가발> <분홍신> <첼로>가 될 듯하다. 1, 2위는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깝고 <분홍신>은 중간, <첼로>는 한참 밑이다. 재미있는 건 이들의 성공과 실패가 모두 장르를 다루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고괴담4>는 장르의 규약에서 자유롭다. 호러 장르의 스토리와 설정을 빌린 뒤 기성품 장치들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이야기를 펼치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영화는 깜짝쇼와 가짜 사다코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자체적인 예술적 완결성을 유지하며, 비슷한 영역을 다룬 2004년의 <령>이 공식에 좇기다 건드리지 못했던 새로운 주제까지 찾아낸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여고괴담4>가 장르에서 벗어난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다른 세 작품들과 비교하면 이 영화는 가장 전통적인 호러영화처럼 보인다. 학교 지하실에서 밤을 보내던 영언의 유령이 보이지 않는 존재 때문에 공포에 질리는 장면은 제인 랜돌프가 수영장에서 표범 그림자의 위협을 받는 <캣 피플>이나, 앤 카터가 목없는 기사에게 쫓기는 <캣 피플의 저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곧장 말해, 이 모든 건 지극히 발 루튼적이다. 공포의 자극보다는 그 맛깔스러움과 의미에 더 치중하는 것이다. 자동적으로 이 영화는 위에서 언급한 장르에 대한 명제를 설명하는 효과적인 예가 된다. 장르의 폭은 (그것이 아주 고전적인 정의라고 해도) 대부분의 관객이 가지고 있는 장르에 대한 고정관념보다 훨씬 넓다.
장르를 무시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장 고전적인 장르의 영역에 안착한 <여고괴담4>와는 달리, <가발>은 장르와 정면대결을 하고 있다. 영화는 도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최근 아시아 호러영화의 가장 도식적인 클리셰라고 할 수 있는 긴 머리 가발을 관객의 코앞에 들이민다. 심지어 <장화, 홍련>의 모방도 그냥 모방 같지는 않다. 도전장이 던져지고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장르 규약은 실험되고 파괴되며 종종 대척점에 놓인 대안이 제시된다.
만약 이 장르 게임을 순수하게 연장했다면 <가발>은 아시아 호러영화 버전 <스크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 영화는 너무 심각하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드라마와 심리묘사를 다루는 데에도 정공법을 취한다.
이 선택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가발>에서 캐릭터 묘사와 드라마의 진정성은 강점이다. 하지만 영화의 설정(또는 각본)과 연출 사이에는 분명한 갭이 존재한다. <가발>은 장르 게임과 드라마(감독의 말을 빌린다면 ‘클래식 호러’)가 어색한 엇박자로 추는 댄스처럼 보인다. 이 거칠거칠한 느낌은 매력이기도 하지만 완결성을 해치는 단점이기도 하다.
<분홍신>에서 주제와 소재는 장르 공식과 정면충돌한다. <가발>에서는 종종 스텝이 어긋나긴 했어도 드라마와 장르는 같은 춤을 췄다. 하지만 <분홍신>에서는 그런 통일성이 없다.
그러나 모두 <장화, 홍련>의 동생들
<분홍신>엔 전혀 다룬 두개의 영화들이 하나로 합쳐져 있다. 영화 1번은 고급 커리어 우먼인 주인공이 남편의 불륜을 알아차린 뒤 겪는 심리물이다. 영화 2번은 저주받은 물건인 분홍신을 다룬 동화적 호러다. 이 둘은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1번 영화가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섬세한 캐릭터 묘사는 2번이 요구하는 동화적 간결성에 의해 박살난다. 아무리 김혜수가 그럴싸하게 연기를 해도 정작 연기되는 캐릭터는 설득력이 없다. 김혜수의 캐릭터는 마치 백설공주와 조이스 캐롤 오츠 소설의 주인공을 토막내 멋대로 연결한 것 같다. 어느 쪽으로 봐도 자연스러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당연히 진실성 역시 사라진다.
스타일 면에서도 이 둘은 충돌한다. 블리치 바이 패스로 멋들어지게 뽑은 <분홍신>의 쿨하고 도회적인 화면은 <4인용 식탁>이나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역에 속해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이미지로 계속 <장화, 홍련>을 원색적 동화를 찍으려 하고 있다. 영화는 멋있어 보이긴 하지만 그 쿨한 겉모양은 형식적 완결성과 연결되지 않는다.
<분홍신>에서 장르는 족쇄이다. 이 영화에서 장르 도구들은 자연스럽게 스토리 안에 녹아 흐르는 대신 중간중간에 튀어나와 그럭저럭 괜찮을 수도 있었던 드라마를 박살낸다. 그렇다고 해서 호러 장치들에 어떤 창의성이 스며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의 모든 호러 장치들은 의무방어이다. <분홍신>은 아시아 호러영화의 공식에 가장 충실한 영화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장르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은 가장 부족하다. <첼로>는 정체성 위기를 앓고 있는 영화이다. 언뜻 보기에 <첼로>는 장르 공식과 의무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도전적인 영화처럼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뭔가 있어 보이는 것 같던 설정과 도입부는 이번 여름 시즌의 가장 뻔한 ‘긴 머리 여자 귀신’ 복수담으로 이어진다. 장르 안에서 가능한 최악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새롭거나 도전적이지도 않고 드라마도 얇은데, 자극도 공포도 없다.
<첼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뻔하고 호러 장치들은 형편없이 다루어졌고 이 과정으로 이어지는 심리묘사와 캐릭터 묘사, 대사의 수준은 거의 <령>과 맞먹을 정도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자기가 그 이상의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만약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장르에 대해 아주 약간의 관심이라도 있었다면 이들이 택한 ‘반전’이 얼마나 지루한 수준인지, 이들의 형식 실험이 얼마나 고루한지 알았을 것이다. 그걸 인식했다면 차라리 재래식 깜짝쇼라도 넣어서 영화에 자극을 주기라도 했을 것이고.
그러나 <첼로>는 여전히 유익한 영화이다. 적어도 이 영화의 실패는 올 여름 시즌 호러영화들을 묶는 유익한 교훈 하나를 제공해준다. 장르영화의 성공은 장르의 규칙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와 아무 상관이 없다. 심지어 장르에 대한 애정과도 무관하다. 중요한 건 자신이 어느 위치에 서 있고 무엇을 알고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명백하게 인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