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4일 일요일
올랜도 블룸, 팬과 폰카 찍다
팔라갈릴레오 극장 앞에서 영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올랜도!”를 외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들 들려온다. 매일같이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팔라초 카지노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배우를 정식으로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포토콜에 참석하지 못하는 기자들은, 행사장을 나서는 감독과 배우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라도 찍기 위해 이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 오늘은 카메론 크로 감독의 <엘리자베스타운>(비경쟁 부문)의 주연배우 올랜도 블룸, 커스틴 던스트, 수잔 서랜던이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영화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기네스 팰트로(<프루프>·경쟁부문), 조니 뎁(<유령신부>·비경쟁부문) 등 각종 부문에서 상영되는 할리우드영화의 주연인 톱스타들 어느 누가 리도섬을 찾을 것인지는, 많은 이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몇몇 언론은 할리우드를 향한 베니스의 지나친 구애를 비판했지만, 마르코 뮐러는 ‘스타가 영화제를 살린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영화제 기간 내내 미국의 유력한 영화언론은 유럽 거장들의 신작 리뷰보다는 스타의 사진과 일거수일투족을 소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는 레드카펫이 펼쳐진 팔라초 델 시네마 앞에서 머물며 스타를 기다리는 일반 관객 역시 마찬가지. 이들은 <Fragile>(비경쟁 부문)에서 주연을 맡은 칼리스타 플록하트가 남자친구인 해리슨 포드와 함께 리도섬을 찾았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올랜도 블룸이 레드카펫에서 팬과 함께 휴대폰 사진을 찍었다는 뉴스에 까무러친다.
이탈리아의 각종 언론에 <친절한 금자씨>에 대한 리뷰가 실렸다. “한국의 복수, 가학적이고 병적인”, “집단적인 복수의 아름다운 여왕”, “할리우드와 타란티노를 무색하게 만든 박 감독” 등을 제목으로 하는 이들 기사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 서부극을 연상시키는 가혹한 복수 등 비교적 다양한 관점에서 영화를 분석했다. 박찬욱 감독의 성을 찬욱이라고 이해한 일부 언론이 찬욱 감독이라고 표기한 것이나, “그는 매우 차분해 보였다. 거친 면이 있었다면 손으로 머리를 뒤를 넘길 때 정도”라며 박찬욱 감독의 외모와 버릇까지 묘사한 기사 등은 소소한 흥미를 선사한다.
오후에는 메인상영관인 팔라초 델 시네마의 살라 그란데 극장에서, 공식시사를 관람했다. 21년 전 <조용한 태양의 해>로 베니스에서 황금사자를 거머쥐었던 폴란드의 거장 크지슈토프 자누시의 신작 <페르소나 논 그라타>(경쟁부문)는, 젊은 시절 폴란드의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폴란드 대사의 회의와 깨달음을 다룬 영화다. 다소 고전적이지만 노년의 정직함이 돋보이는 영화가 끝나자, 관객은 함께 영화를 관람한 감독과 배우에게 5분이 넘도록 기립박수를 보낸다. 영화를 통해 얻은 감동을 그대로 만든 이에게 표현할 수 있는 이런 순간은, 국제영화제가 관객과 감독에게 선사하는 큰 선물 중 하나다.
9월5일 월요일
슈라이버 감독이 운 까닭은
베니스영화제의 메인 섹션은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거장의 영화를 접할 수 있는 경쟁부문, 각국의 돋보이는 상업영화를 주로 선보이는 비경쟁 부문, 그리고 신인 및 중견감독들의 도전적이고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영화를 선정한 오리존티로 나뉜다. 어쨌거나 순위를 매겨야 하는 경쟁부문이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나, 스타들이 두루 포진한 비경쟁 부문의 상업영화가 인기를 끄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영화 그 자체만을 놓고 봤을 때 일반 관객에게 가장 큰 만족을 선사하고 있는 것은 오리존티 부문이 아닐까. 비욕이 주연으로 출연한 실험영화 <Drawing Restraint 9>이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와일드 블루 욘더>(베르너 헤어초크), <La dignidad de los nadies>(페르난도 솔라나스) 등 거장의 다큐멘터리도 선전하고 있다. <스크림>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등에 조연으로 출연했던 리브 슈라이버의 감독 데뷔작 <에브리싱 이즈 일루미네이티드>(Everything is Illuminated)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주제로, 가족과 역사, 유럽의 정신까지 언급하는 영화. 공식시사가 끝난 뒤, 그 어떤 경쟁작보다도 뜨거운 환대를 받아 주목을 끌었다. 주연인 엘리야 우드 등과 함께 시사에 참석한 슈라이버는 관객의 반응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는 후문이다.
영화제가 중반으로 향하면서 영화제 데일리에 기재되는 별점의 목록이 점점 길어진다. <라 레푸블리카> <코에레 델라 세라> <일 가제티노> 등이 참여한 별점표에선 <굿 나이트 앤드 굿 럭>이 1위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마법의 거울>과 <친절한 금자씨>가 뒤를 잇고 있다. 개인적으로 여태껏 본 경쟁작 중 최고작으로 뽑고 있는 <가브리엘>(파트리스 셰로)은 별점과 평점에서는 그닥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물론 <마법의 거울>의 경우 한 신문에서는 별 다섯개 만점을 줬지만, 다른 곳에선 한개의 별만을 주는 등 대부분의 평가는 평론가 개인의 기호를 반영한 것이다. 기자회견장에서 <그림 형제>의 일반적인 리뷰가 악평 일색인 것에 대한 질문에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제각각인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대답한 테리 길리엄 감독의 말처럼, 영화를 두고 순위를 매기고, 다시 이를 토대로 영화제의 결과를 점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공식상영이 이루어지는 살라 그란데의 일반 관객 역시 그날의 분위기와 자신의 기호, 어떤 스타가 참석했느냐에 따라 일관되지 않은 반응을 보인다.
존 터투로가 제임스 갠돌피니, 수잔 서랜던, 케이트 윈슬럿, 스티브 부세미 등의 지인들을 데리고 만든 유쾌하고 기괴한 뮤지컬 <로맨스와 담배>(경쟁부문)를 봤다. <A Man Without Love> <Piece of My Heart> 등의 잘 알려진 팝 명곡이 흐르면 등장인물들이 <록키 호러 픽쳐 쇼>와 맞먹는 흥겨운 율동을 선보이는 영화로, 수잔 서랜던의 천연덕스러운 B급 연기가 일품이다. 그러나 사력을 기울여 싸워대던 부부가 남편(제임스 갠돌피니)의 죽음을 계기로 화해하는 결말은 다소 불만스런 지점이다.
9월6일 화요일
열흘간의 행복한 기억은 계속되리
영화제도 이제 후반부로 치닫고 있지만, 행사장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거쳐야 하는 테러방지용 검문검색은 점점 삼엄해진다. 마르코 뮐러가 영화제 시작 전 “다행히도, 리도 주변의 바다는 잠수함이 침입하기엔 너무 얕다”는 농담을 통해 테러에 대비한 안전대책의 완벽함을 알린 바 있다. 각종 외신도 매번 금속탐지기를 지나고, 모든 가방과 주머니를, 검은 양복을 입은 요원들에게 열어 보여야 하는 영화제의 경비를 주요 뉴스로 전했다. 영화제 기간 중 사진촬영에 필요한 도구를 들고 행사장에 들어오려다, 이를 무기로 오해한 안전요원에게 들켜 경찰서까지 따라가야 했다는 프랑스 사진 기사의 소식이 지역신문으로 전해진다. 몇몇 기자들이 이러한 상황을 연관시켜 할리우드 스타들의 정치적 입장을 듣기 위해 유도성 질문을 던지는 광경도 종종 목격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계자들은 이처럼 큰 규모의 영화제가 철저한 보안검색을 실시하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행사의 운영과 조직과 관련해서도 무난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너무 많은 상영작과 허술한 운영 덕분에 모든 스케쥴이 연기되는 등 혼선을 빚었던 지난해에 비해 올해는 별다른 사고나 실수 없이 행사가 마무리되고 있다. 베니스에 거주하며 매년 영화제에 참석한 한국영화사이트 운영자 다비드 카잘로는, “남미와 중동의 영화가 제외되긴 했지만, 마르코 뮐러가 말했듯이 그것은 올해 그 지역에서 별다른 영화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세계의 다양한 영화를 포함한 올해의 라인업은 상당히 흥미롭다”며 라인업에 대해 만족했다.
그러나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베니스영화제를 향한 위협은 곳곳에 있다. 베니스와 미묘한 차이를 두고 9월8일부터 열리게 될 토론토국제영화제는 칸과 베를린, 베니스의 화제작은 물론 전세계의 다양한 상업·예술영화를 포함하는 막강한 라인업으로 바이어를 끌어들이고 있다. 지난 9월4일치 <이탈리아 신문>에는 로마에서 베니스와 유사한 규모의 국제영화제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이 실렸다. 이는 올해의 무난한 성공과 무관하게, 스타 취재에 열을 올리는 언론, 새로운 영화를 한시라도 빨리 접하고 싶어하는 일반 관객과 마켓 관계자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베니스가 앞으로 수많은 선택을 감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늦은 시간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산마르코 광장을 통과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광장을 꽉 채우던 관광객과 노천 카페에서 들려오는 생음악은 흔적도 없고, 적막한 불빛만 보인다. 극성을 부리던 그 많던 비둘기들은 자취를 감췄다. 저물어가는 영화제와 비슷한 광장의 쓸쓸한 풍경이 서글프다. 앞으로 4일 뒤 발표될 수상결과를 둘러싸고, 현재로선 각종 영화들을 둘러싼 개인적이고 정치적이며 주관적인 평가와 소문만이 무성하다. <친절한 금자씨>팀이 공식 행사 이후에도 귀국하지 않았다는 것은 수상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관계자는 전반적으로 <올드보이>에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영화가 황금사자상감은 아니지만, 이번 기회에 감독 자체의 역량을 인정받은 만큼 감독상으로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올림픽 중계를 떠올리는 무성한 추측와 무관하게 분명한 것은, 기대했던 영화 한편에 실망하고, 별다른 정보도 없이 시도한 또 다른 영화에 행복해하면서 지냈던 열흘간의 기억은 남는다는 사실. 순수하게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 그것이 바로 영화제가 남기는 최고의 수확이기 때문이다.